스토리

가을의 미덕

kongbak 2007. 11. 27. 07:42
만약 가을이 없다면 어떨까? 폭염과 엄동설한이 갑자기 교차한다면 배겨나질 못할 것이다. 지친 여름을 돌아보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할 여유를 주는 게 가을의 미덕일 것이다. 이처럼 계절마저 쉬어 가는데, 인생살이인들 어찌 크게 다를까.

 젊은 나이임에도 단기간에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 L대표는 재계에서 부동산 귀재로 통하고 있었다. 얼마 전 그를 만날 일이 생겨 회사로 찾아갔다. 그런데 L대표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비서로부터 '회의가 늦게 끝나서 4분 정도 늦을 것'이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두말도 않고 자리를 나와 버렸다. 조금 뒤에 L대표로부터 황급한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몇 번이고 사과하며 차를 돌릴 것을 통사정했지만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매우 바쁜 것 같은데, 한 달 정도만 쉬세요."

 나는 단지 약속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인데, 내 말이 씨가 되었을까? L대표는 다음날부터 고열이 오르고 따갑고 근질거리더니 온몸에 이상한 반점이 돋는 게 아닌가. 놀라서 병원을 찾았는데 면역력이 약할 때 생기는 수두였다. 열이 40도나 올라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하는 상태였다.

 그는 업무를 지속하기 위해 평소 친분이 있던 서울의 대형 병원을 찾았는데 다른 환자들에게 옮는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절하는 게 아닌가. 몇 군데를 더 알아보았으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매몰차게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인적이 드문 강원도 모처에서 어렵사리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꼬박 한 달이 걸려서야 완쾌해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 지인은 앞으로는 나와는 제대로 말도 못하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나와 대화하다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 들으면 어쩌겠느냐는 것. 어떤 사람은 '(법사님에게) 미운 짓을 하는 사람에게 L대표에게 한 것처럼 한 마디 하면 혼쭐이 날 것'이라며 농담처럼 말하기도 한다.

 정말 내가 입만 뻥긋해도 그대로 실현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깊은 산속에 혼자 입을 닫고 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점은 다행히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인연과 자신이 지은 카르마(업)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L대표처럼 나와 지은 업이 없는 사람은 과보가 그대로 전달되지만 나와 오랫동안 지낸 사람들은 그 지은 업의 크기에 따라 상쇄된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내게 10년 동안 잘해오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나를 험담했다고 하루아침에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좋은 업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 돌아온 L대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내게 한 달 휴가 받은 것 같아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의 부인은 남편이 더 입원해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부인으로서 남편이 지독한 병에 걸려 그토록 고생을 했는데 병이 도지기를 바랐다니. 남편 모르게 생명보험이라도 들어 놓거나 애인이라도 생긴 것일까?

 이유는 따로 있었다. L대표가 사업을 한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부터 집에서는 제대로 얼굴 볼 새가 없었는데 이번에 입원으로 남편 병간호하면서 그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

 이쯤 되면 누구 때문에 수두에 걸리게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내 말이 씨가 된 것인지, 아니면 평소 그 부인의 남편에 대한 바람이 내게 알게 모르게 전달된 것인지. 어쩌면 L대표는 한 달 휴가에 대해 부인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