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레닌의 노래

kongbak 2006. 9. 22. 00:13

레닌의 노래



지워지는 것은 짓밟히는 것
지금도 거꾸로가 아니다
자동차 물결에, 헤드라이트 불빛에
200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진다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조금씩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풍경 속으로 내려앉으며
겹치고, 덜컹댔다, 자동차 앞좌석이 겹침의
계단이. 그리고
광경과 음악의, 덜컹대는 겹침 속에,
드러났다, 모종의 사라짐이.
오 그렇다, 자본주의는 불야성
IMF 외환위기는 연필보다
일상적이고 전쟁보다 더 메마른 단어다
출근은 진한 화장뿐
퇴근하는 뒷모습의
어깨의 표정이 가장 솔직하다. 생계와 화해한
만큼만 그것은 가난하고 안온하다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그 위로 겹쳐진다
지워지는, 짓밟히는, 메마른
풍경과 질문 위로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액화,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
시절은 화음의 광채로만 남아
생애가 차라리 슬프다는 풍문에 달한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거리 풍경과 살을 섞으며
합쳐진다, 그것만이 위로가 되다는 듯이
그때 우리는 모두 레닌이다
지워진 것들의


*

김정환 - 1954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지울 수 없는 노래>, <하나의 이인무와 세 개의 일인무>, <황색 예수전 1, 2, 3>, <해방 서시>, <텅 빈 극장>, <순금의 기억>, <레닌의 노래> 등 20여 권의 시집과, 소설 <세상 속으로>, <그 후>, <사랑의 생애>, 음악 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 문학 창작 방법론 <작가 지망생을 위한 창작 강의 일곱 장>, 역사 교양서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역사서 <상상하는 한국사>, 대중문화교양서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등이 있다.

열림
원 문학.판 시 12 - 레닌의 노래
김정환 지음 | 열림원 펴냄 | 정가 6000원 | 2005년 9월

시, 소설, 교양산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해온 김정환 시인의 시집. 2003년 <하노이-서울 시편>을 펴낸 후 3년동안 발표한 시들을 모았다. 이번 시집은 20세기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담는다. '지워진 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노래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화해, 이상(理想)과 생계와의 화해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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