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스트레스는 활력소가 되기도 하고 자기발전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스트레스에 면역이 덜 된 아이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스트레스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병이기 때문이다.
전문의 한분이 최근 신종 병이 유행한다며 하루아침에 생긴 소아당뇨를 이야기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유명한 문화인이었고,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기에 늘 또래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소년의 아버지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려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실리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큰 충격에 빠진 소년은 곧바로 소아당뇨에 걸렸던 것이다. 전문의는 이 소년을 지켜보며 영양이나 운동뿐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발병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특수한 경우보다도 아예 일상화된 아이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더 문제일 수 있다. 좋은 학업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골고루 다 잘해야만 한다. 자칫 한 과목이라도 삐끗하면 석차가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마니 말이다. 치열한 학벌경쟁시대에 우리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운동신경이 발달한 아이, 음악에 소질이 있는 아이, 수학이나 발명에 천재적인 아이들이 있을 터인데 열댓 과목의 평균을 내서 우열을 가리고 마니 평균성적이 좋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등생이 되어야만 하는 세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과연 이 시대의 학생으로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인가.
남보다 못한 나머지 과목을 비교하여 열등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야하는 풍토가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사람은 타고난 것이 있어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따로 있기에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 왜 하는지 그 목적도 돌아볼 틈 없이 내몰리는 맹목적 경쟁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해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한 여학생 영가의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구명시식 자리에서 부모 앞에 여전히 피투성인 채로 나타난 여학생 영가는 부모는 물론이고 선생님, 반 친구들까지 원망했다. "내 모든 꿈을 빼앗아갔어요."
좋은 점수로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바라는 꿈을 이룰 생각도 말라고 주위에서 귀 따갑게 들어온 터였는데, 성적이 떨어지자 그만 옥상에서 몸을 던지고 만 딱한 아이였다.
"아무리 공부가 중요한들 목숨보다 더 하겠느냐, 이 불효막심한 것아. 어째 부모보다 먼저 저 세상을 간단 말이냐." 어머니의 통곡이 이어지고, 중간에 내가 나서서 서로 옭매인 마음을 어렵사리 풀기는 했지만 너무 뒤늦은 후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열등감 스트레스를 양산하는 교육세태는 사회에도 큰 손실을 끼친다. 흔히 사회인들이 하는 대표적인 푸념이 '학창시절 배운 거 사회에 나와서 하나도 쓸모없다'이다. 과장된 거품을 걷어낸다고 할지라도 그 속뜻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사회에서는 두루뭉술한 팔방미인보다 하나라도 확실히 처리하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 우리 교육이 정작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재를 양산하면서 젊은이들을 열등감 스트레스만 조장한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병균이 활개를 치듯 아마도 우리 아이들의 꿈이 빼앗긴 자리에 파고든 신종 스트레스 질병이 소아당뇨는 아닐까.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마음의 병은 스스로가 치료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겐 단순함이 최고다. 한없이 넓고 단순한 펼쳐진 수평선과 바다를 보면서 아이들은 꿈을 꾸지 않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