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국토의 장남인 독도

kongbak 2007. 11. 12. 18:23
국토의 장남인 독도

최근 경찰박물관 자문위원 자격으로 독도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18명의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는 늦가을의 하늘을 바다새처럼 날아갔다. 얼마쯤 갔을까. 까마득한 망망대해에 손가락만한 물체가 삐죽 솟아있었다. 독도였다. 대양의 거친 파도에 휘말려 금방이라도 쓸려갈 것 같은데 의연하게 등대처럼 솟아있는 독도는 경이로웠다.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암벽과 해안은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도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6세기 전까지 독도는 본도(本島)인 울릉도에 속해 우산국이라 불리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신라 지증왕 때 비로소 우리나라가 되었다. 강릉의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러 나선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사부는 성질이 거친 우산국 부족들을 단숨에 굴복시키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나무로 만든 거대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연기를 피우고 북과 나각으로 요란스럽게 굉음을 냈다. 그리고는 우산국 주민들을 향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나운 사자를 섬에 풀어놓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본래 바다가 터전인 그들은 사자가 육지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인줄 말로만 들어서 알 뿐 본 일은 없었다. 결국 진짜 사자인 줄 알고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고 한다.

 예전에 나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 국토를 돌아본 적이 있다. 음양이 교차하여 한반도의 기가 모이는 배꼽 강화도, 신령한 백두산, 영험하면서 할머니 같이 푸근한 계룡산, 딸 같은 제주도와 지리산 등 가는 곳 마다 이채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처음 방문한 독도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첫발을 내딛자 거대한 해류의 맥동이 울려왔다. 사람으로 치자면 정수리에 해당인 셈이니, 우리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기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독도를 지키다 순직한 사람들의 위령비를 찾아 묵념했다. 조선시대 안용복을 비롯하여 근대 독도의용수비대, 현재 경비대에 이르기까지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장렬한 정신을 추모했다. 독도를 지키다가, 일터로 삼다가 숨진 영가들이 우리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섬을 돌며 외적으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으니 그들은 독도의 수호령을 자처하고 있었다.

 섬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독도에 대해 한참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독도를 한반도 동쪽의 끝 섬으로서 국토의 막내 섬 취급을 해왔다. 늘 본토를 그리워하며 홀로 외로이 있어 돌봐줘야 할 섬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독도는 막내가 아니라 장남이었다. 우리 국토의 첫 섬이며 대한민국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태평양의 거센 풍파를 가장 앞서 막아내며 국가 안보의 최전방 해양 요충지로서 중요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다. 가장 앞서 하루를 열고 말없이 모진 풍상을 막아내는 장남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라는 이름은 1881년 처음으로 불렸는데 그 뜻이 왠지 소외되고 방치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어감이 좋아보이진 않는다. 사람도 이름대로 팔자가 정해진다고, 독도 또한 그런 이유로 자꾸 일본이 억지 생트집을 잡는지도 모르겠다. 잃을 실(失)자 실향민이 아니라 얻을 득(得)자 득향민이라고 하면 그 이미지가 확 바뀌는 것처럼 독도 개명도 의미있는 일인 듯 싶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우산국을 무릉도원이라고 적고 있다. 우산국에는 본토의 혹독한 세금 착취를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탐관오리들이 없었기 때문에 무릉도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독도 이전에 불리던 우산도, 두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 졌으니 쌍섬, 또는 해돋는 섬 정도면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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