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바칠 정도로 혼을 불어 넣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박대연 KAIST 교수
가난 축복의 기회 인가 저주인가?
[IT리더들 희망은 불황보다 강하다]
티맥스소프트 창업 박대연 KAIST 교수
도대체 불행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고난의 끝은 없는 걸까.
프랑스 극작가 로망 롤랑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고 했는데
티맥스소프트의 창업주 박대연(49) 이 어린 시절 늘 가졌던 의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자신은 사환으로 동생은 구두닦이로 누나는 가정부
로 돈벌이에 나섰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젖먹이 동생은 입양돼야 했다.
가난하고 불행한 그 어떤 가정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축복의 기회 로 보느냐 벗어날 수 없는 저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나 보다.
소년가장 박대연은 고난을 넘어 역경을 딛고, 국내 굴지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일궈냈다.
야간상고 출신이지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공학과 교수도 됐다.
바로 자신의 혼을 바치는 집념으로-.
# 가난.고난.역경…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1968년 박대연은 운수회사 전남화물의 사
환으로 취직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버지는 암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고 5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월급은 3000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원래는 7남매였습니다. 그런데 먹을 쌀이 부족해 갓 돌을 지난 막내
는 남의 집에 입양시켜야 했습니다."
동생들은 그나마 초등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구두닦이로, 가정부로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동생들은 정상적인 입학 나이를 다섯 해나 지나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갔
을 정도였다.
사환 생활을 하면서도 박대연은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광주 동성중 야간과 광주상고 야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아버지마저 숨을 거뒀다.
낮에는 사환, 밤에는 학생, 집에서는 소년가장이라는 삼중고의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에선 늘 수석이었다.
수석졸업이면 무시험으로 은행에 들어갈 수 있어서 고3 때인 75년 한
일은행에 취직했다. 은행원 월급(초봉 7만원)과 빚으로 동생들을 대학
에 보낼 수도 있었다.
부평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을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생겼다.
전산실 요원을 모집한다는 것. 적성 테스트를 받은 뒤 전산부로 배치됐다.
훗날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컴퓨터와의 첫 인연이었다.
은행 컴퓨터와 12년6개월을 뒹굴었던 88년 7월 그는 더 큰 결심을 하
게 된다.
미국 유학이었다.
퇴직금으로 손에 쥔 돈은 1300만원.
이 돈을 밑천 삼아 그는 오리건대로 향했다.
# "나는 목숨까지 걸었다"
"개학 전날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탈장이었죠.
그러나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학비를 병원비에 쓸 형편이 못됐습니다.
그날로 퇴원해 버렸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녀오면 온몸이 피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박대연은 뒤늦게나마 배운다는 기쁨이 너무 커 아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때가 96년.
벌써 나이는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교수직을 얻기 위해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다.
나이도 많은 데다 지역 연고나 선.후배도 없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덜컥 외국어대 제어계측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유학 시절의 올A 학점과 최우수 논문상 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시절 그는 회사를 하나 차렸는데, 그것이 나중에 대박을 터뜨린 티
맥스소프트였다.
KAIST 교수 모집 때는 언짢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가 "KAIST가 어떤 곳인 줄 아느냐"고 질문했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너무 당돌하게 응시한 것 아니냐는 말투였다.
수업과 사업을 한창 병행할 때인 98년 8월 국방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귀사가 개발한 미들웨어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이 다운되지 않고 원활히 잘 돌아가게 해주는 소
프트웨어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개발에 성공한 순수 원천기
술이며….
" 그로부터 1년여 뒤 국방부 발표가 나왔다. 자신의 회사 제품이 1등으
로 통과됐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그의 회사 제품은 삼성전자.포스코 등 굴지의 대기업과 은행.증권
사.
정부 부처 등 각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고난과 역경으로 그는 자연스레 강해져 있었다.
남에게 공부는 짐이었지만 그에게는 재미였다.
사업을 할 때도 최고가 돼 보겠다는 욕심에다 혼까지 투자한 것이 성공
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
습니다.
혼을 바치지 않았으니까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좇지 말고 혼을 좇아라.' 나라 일도 마찬가집니다. 유능한 인재
들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혼을 불어넣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
‘야간상고 신화’로 불렸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대연(51·전기전
자공학과·사진) 교수가 강단을 떠났다.
KAIST는 27일 내부 인사 공지를 통해 지난달 말 박 교수가 제출한 사
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KAIST 교수직을 박차고 떠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바쁘
다”는 것.
박 전 교수는 사표를 내기 전 동료 교수들에게 “현재 새로운 프로젝트
를 수행 중인데 강의를 병행하기 어렵다”며 “앞으로는 연구에만 집중하
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고도 불리는 그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벤처기업인
㈜티맥스소프트 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올해로 창업 10돌을 맞은 티맥스소프트는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응
용 프로그램을 연결하는 미들웨어 소프트웨어 분야의 강자로 2005년 I
BM 등을 제치고 국내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올해 매출액 목표는 13
00억 원.
그러나 이런 성취를 이루기까지 박 전 교수의 인생 역정은 거칠었다.
3남 2녀의 장남인 그는 집안이 어려워 1975년 2월 광주상고 야간과정
을 졸업한 뒤 은행에 입사해 동생들을 보살폈다. 소프트웨어와의 인연
은 은행 전산실에서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1988년 동생들 뒷바라지가 끝나자 “컴퓨터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
다”며 서른두 살의 나이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로 유학을 떠나 8년 만
에 학부와 석박사 학위를 모두 마치고 귀국했다.
잠시 외국어대에서 강의를 맡았던 그는 5명의 직원으로 1997년 티맥
스소프트를 창업했고 이어 이듬해인 1998년 2월에는 KAIST 교수로
임용됐다.
강단을 떠났지만 후학 양성이라는 꿈까지 접은 것은 아니다. 그는 “캘
리포니아공대(CALTEC)와 같은 우수한 공과대를 우리나라에 설립하
는 것이 꿈”이라며 “내년에 회사를 나스닥에 등록해 자금이 모아지면
꿈의 실현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세상이 바뀝니다...
박대연 KAIST 교수
가난 축복의 기회 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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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리더들 희망은 불황보다 강하다]
티맥스소프트 창업 박대연 KAIST 교수
도대체 불행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
고난의 끝은 없는 걸까.
프랑스 극작가 로망 롤랑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고 했는데
티맥스소프트의 창업주 박대연(49) 이 어린 시절 늘 가졌던 의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해 자신은 사환으로 동생은 구두닦이로 누나는 가정부
로 돈벌이에 나섰다.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젖먹이 동생은 입양돼야 했다.
가난하고 불행한 그 어떤 가정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난과 역경을 축복의 기회 로 보느냐 벗어날 수 없는 저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나 보다.
소년가장 박대연은 고난을 넘어 역경을 딛고, 국내 굴지의 소프트웨어
회사를 일궈냈다.
야간상고 출신이지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공학과 교수도 됐다.
바로 자신의 혼을 바치는 집념으로-.
# 가난.고난.역경…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1968년 박대연은 운수회사 전남화물의 사
환으로 취직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아버지는 암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고 5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월급은 3000원.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원래는 7남매였습니다. 그런데 먹을 쌀이 부족해 갓 돌을 지난 막내
는 남의 집에 입양시켜야 했습니다."
동생들은 그나마 초등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구두닦이로, 가정부로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동생들은 정상적인 입학 나이를 다섯 해나 지나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갔
을 정도였다.
사환 생활을 하면서도 박대연은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광주 동성중 야간과 광주상고 야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아버지마저 숨을 거뒀다.
낮에는 사환, 밤에는 학생, 집에서는 소년가장이라는 삼중고의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에선 늘 수석이었다.
수석졸업이면 무시험으로 은행에 들어갈 수 있어서 고3 때인 75년 한
일은행에 취직했다. 은행원 월급(초봉 7만원)과 빚으로 동생들을 대학
에 보낼 수도 있었다.
부평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을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기가 생겼다.
전산실 요원을 모집한다는 것. 적성 테스트를 받은 뒤 전산부로 배치됐다.
훗날 그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준 컴퓨터와의 첫 인연이었다.
은행 컴퓨터와 12년6개월을 뒹굴었던 88년 7월 그는 더 큰 결심을 하
게 된다.
미국 유학이었다.
퇴직금으로 손에 쥔 돈은 1300만원.
이 돈을 밑천 삼아 그는 오리건대로 향했다.
# "나는 목숨까지 걸었다"
"개학 전날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탈장이었죠.
그러나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학비를 병원비에 쓸 형편이 못됐습니다.
그날로 퇴원해 버렸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녀오면 온몸이 피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박대연은 뒤늦게나마 배운다는 기쁨이 너무 커 아픈 줄도 몰랐다고 했다.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때가 96년.
벌써 나이는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교수직을 얻기 위해 여러 대학에 원서를 냈다.
나이도 많은 데다 지역 연고나 선.후배도 없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덜컥 외국어대 제어계측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유학 시절의 올A 학점과 최우수 논문상 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시절 그는 회사를 하나 차렸는데, 그것이 나중에 대박을 터뜨린 티
맥스소프트였다.
KAIST 교수 모집 때는 언짢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가 "KAIST가 어떤 곳인 줄 아느냐"고 질문했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너무 당돌하게 응시한 것 아니냐는 말투였다.
수업과 사업을 한창 병행할 때인 98년 8월 국방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귀사가 개발한 미들웨어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인터넷 사이트 시스템이 다운되지 않고 원활히 잘 돌아가게 해주는 소
프트웨어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개발에 성공한 순수 원천기
술이며….
" 그로부터 1년여 뒤 국방부 발표가 나왔다. 자신의 회사 제품이 1등으
로 통과됐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그의 회사 제품은 삼성전자.포스코 등 굴지의 대기업과 은행.증권
사.
정부 부처 등 각계에서 애용되고 있다.
고난과 역경으로 그는 자연스레 강해져 있었다.
남에게 공부는 짐이었지만 그에게는 재미였다.
사업을 할 때도 최고가 돼 보겠다는 욕심에다 혼까지 투자한 것이 성공
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
습니다.
혼을 바치지 않았으니까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좇지 말고 혼을 좇아라.' 나라 일도 마찬가집니다. 유능한 인재
들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혼을 불어넣으면 세상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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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상고 신화’로 불렸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대연(51·전기전
자공학과·사진) 교수가 강단을 떠났다.
KAIST는 27일 내부 인사 공지를 통해 지난달 말 박 교수가 제출한 사
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KAIST 교수직을 박차고 떠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너무 바쁘
다”는 것.
박 전 교수는 사표를 내기 전 동료 교수들에게 “현재 새로운 프로젝트
를 수행 중인데 강의를 병행하기 어렵다”며 “앞으로는 연구에만 집중하
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고도 불리는 그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벤처기업인
㈜티맥스소프트 창업자이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올해로 창업 10돌을 맞은 티맥스소프트는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응
용 프로그램을 연결하는 미들웨어 소프트웨어 분야의 강자로 2005년 I
BM 등을 제치고 국내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올해 매출액 목표는 13
00억 원.
그러나 이런 성취를 이루기까지 박 전 교수의 인생 역정은 거칠었다.
3남 2녀의 장남인 그는 집안이 어려워 1975년 2월 광주상고 야간과정
을 졸업한 뒤 은행에 입사해 동생들을 보살폈다. 소프트웨어와의 인연
은 은행 전산실에서 일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1988년 동생들 뒷바라지가 끝나자 “컴퓨터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
다”며 서른두 살의 나이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로 유학을 떠나 8년 만
에 학부와 석박사 학위를 모두 마치고 귀국했다.
잠시 외국어대에서 강의를 맡았던 그는 5명의 직원으로 1997년 티맥
스소프트를 창업했고 이어 이듬해인 1998년 2월에는 KAIST 교수로
임용됐다.
강단을 떠났지만 후학 양성이라는 꿈까지 접은 것은 아니다. 그는 “캘
리포니아공대(CALTEC)와 같은 우수한 공과대를 우리나라에 설립하
는 것이 꿈”이라며 “내년에 회사를 나스닥에 등록해 자금이 모아지면
꿈의 실현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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