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 (37) 땅은 나라의 주권 (1) ]

kongbak 2007. 4. 9. 10:27
[ (37) 땅은 나라의 주권 (1) ]
농민은 향토 지키는 수호신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한 요인은 여러 가지 들 수 있다. 명나라의 참전, 해상의 장악, 화포와 거북선 같은 앞선 무기. 가장 중요한 요인이 의병이란 사실을 잊기 쉽다.

 전쟁이 발발하자 왜군들은 신무기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시켰다. 조총 앞에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 조선의 장수들과 오합지졸 관군을 격퇴할 때만 해도 왜는 승리감에 도취했다. 그러던 왜군이 당황했다. 지휘관이 죽으면 군사들이 동요하고, 그 틈을 타서 전투를 벌이면 군졸들이 흩어지고, 그 지역 백성들은 새로운 점령자들에게 복종할 줄 알았던 왜군. 농기구로 무장한 향토의 민간인들이 군 대열의 후미를 치고 성곽을 지키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모든 백성을 다 없애야 끝나는 전쟁은 의미가 없었다.

 군신유의(君臣有義)와 충효(忠孝)를 일갈하던 위정자들과 관군이 지리멸렬하는 동안 팔도의 무명용사들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의령의 곽재우, 진주 김시민, 충청도의 조헌과 칠백의사…. 평소엔 땅을 일구던 순박한 농민, 천대 받으며 어렵게 살아온 천민들, 죽음도 불사한 이들의 애국심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땅'이다.

 농본시대 양반들은 땅을 '재산'으로 보았다. 하지만 직접 땅을 일군 농민들에겐 '생계의 터전'이었다. 국토가 왜군들에게 짓밟히자 양반들은 논밭이야 어디 가지 않으니 제 목숨과 전답문서만 챙기면 되었다. 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했던 것. 반면 농민들은 자기 몸이 짓밟힌 것처럼 향토를 지키는 수호신을 자청하여 적군에 대들었다. 이른바 텃세였다. 의병들은 호국영령이 되었다.

 구한말에도 임진왜란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신미양요, 병인양요, 운양호 사건으로 외침이 빈번했으나 조정의 많은 위정자와 문벌들은 기득권에 집착했다. 국권이 넘어가도 토지의 소유권만 인정된다면 기꺼이 시대에 순응하기로 했다. 하지만 토지를 직접 일구는 민중들은 신음했다. 일제는 임란 같은 큰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손쉽게 한반도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한반도 통치를 위해 고심했다. 외교권을 박탈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지만 일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의 악몽이 떠올랐다.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 구국운동을 벌이자 일제는 이번에는 조총 대신 최신 무기 기관총을 공주 우금치에 설치했다. 수천 명을 그 자리에서 학살하였고 동학 의병들은 기꺼이 향토의 호국령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일제는 고심했다. 민초들 하나하나가 이렇게 저항하는데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완전히 병합시키자는 의견과 식민지 통치를 하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한민족의 얼이 관료 지위나 통치 체계에서 오는 게 아니라 '땅과 문화'에서 온다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한반도의 지기(地氣)와 토속문화부터 꺾기로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마을마다 향토신을 모신 성황당 폐쇄. '귀신을 섬기는 것은 미신'이라며 모두 불태우고 모든 무속 행위를 금지했다. 그런데 성황당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의 신사다. 자신들은 조상신과 지신을 모신 신사에 극진히 제를 올리고 참배하면서 조선의 조상과 지신을 모신 성황당은 없애고 '귀신'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전국 산야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의 혈을 끊으려 했다. 자신감이 붙은 일제는 무력을 앞세운 '무단통치'를 감행했다. 그러나 민중들은 전 국토에서 일어나 3ㆍ1운동을 전개했다. 놀란 일제는 급히 문화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문화정치'를 펴서 부드러운 통치방식으로 바꾸었다.

 지기가 쇠약해지고 성황당이 없어져 지신과 문화가 떠도는 것처럼, 독립투사들은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전전하면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였고 기꺼이 광복의 제물(祭物)이 되었다. 토지를 가진 지주와 소유권은 없지만 토지를 일구던 소작인들 사이의 원한의 업보가 반목하자 해방은 외세에 의해 주어졌다. 그리고 더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피비린내 나는 6ㆍ25 동족상잔의 보복 살육전으로 폭발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가 외세의 침략에서 비롯되었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원인 제공은 조선에 있다. 땅에 대한 주권 의식이 희박해지자 땅주인이 뒤바뀌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