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본토의 남동 해안에서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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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자연환경
타이완 전체 지역의 약 2/3가 산지와 구릉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지형적으로 5개의 주요지역이 나온다. 험난하고 가파른 타이둥 산맥[臺東山脈], 길고 좁다란 타이둥 지구대, 중양 산맥[中央山脈], 위산 산맥[玉山脈], 아리 산맥[阿里山脈] 등 3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진 중양 산계[中央山系], 구릉이 매우 많은 광대한 지대, 마지막으로 인구가 조밀한 서부 해안평야 및 분지가 그것이다. 분지로는 남쪽에 핑둥[屛東] 분지, 중서부쪽에 타이중[臺中] 분지, 북쪽에 타이베이 분지, 북동쪽에 이란[宜蘭] 분지가 있다.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위산 산은 해발 3,997m로, 섬의 중남부에 있다. 주요강으로는 북쪽에 있는 단수이 강[淡水河]과 서쪽의 줘수이 강[濁水溪]을 들 수 있다. 이 두 강 모두 관개와 수력발전에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타이완의 기후는 북쪽은 아열대, 남쪽은 열대다. 겨울철(10∼3월) 월평균기온은 약 15℃이며, 여름철(6∼9월)에는 30℃ 정도이다. 연평균강수량은 2,590㎜로, 서부 해안이 1,270㎜인 데 비해 산맥의 경사면에는 6,350㎜나 그 이상까지 올라간다. 1년에 보통 3, 4차례 불어닥치는 열대 태풍은 7∼9월의 몇 개월 동안에 집중되어 있다. 타이완 영토의 약 2/3를 덮고 있는 자연식물은 고도에 따라 5개 지대로 나뉜다. 해발 90m 이하의 조수에 의한 삼각주 지역에서는 홍수림이 발견되며, 600m이하에서는 대나무와 종려나무가 혼합된 열대성상록수림이 자란다. 해발 600∼1,800m에는 장뇌·월계수 같은 아열대성상록수림이 많으며, 해발 1,800∼2,400m는 히말라야삼나무·삼나무·노간주나무·철쭉·단풍나무 같은 활엽상록수림이 무성하다. 해발 2,400m 이상에서는 침엽수림이 발견된다. 야생동물로는 여우·사슴·멧돼지·곰·원숭이·염소 등이 있다. 타이완의 광물자원은 비교적 적은 편으로, 대리석·석회석 및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는 석탄, 석유, 천연 가스 등이 있다.
국민
한족이 주민의 98%를 구성하는데 그중 14%가 본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오스트로네시아어족(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계 원주민들이다. 베이징 관화(官話)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민난어[閔南語], 커자어[客家語]와 같은 중국어의 타이완 방언도 쓰이고 있다. 주요종교는 불교·도교·유교이며, 주민의 7.4%가 그리스도교도이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주민도 약간 있다. 1978∼80년에 대략 26만 5,000명이 중국 본토로부터 망명해왔으며, 이들은 타이완 사회에 통합되었다.
타이완은 전통적으로 인구의 연평균증가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정부에서는 2000년까지 증가속도를 0%로 줄이기 위해 만혼(晩婚), 여성고용 및 1가정 1자녀를 권장하고 있다. 1947년에 인구 1,000명당 38명이던 출생률이 1997년 현재 14.7명으로 크게 줄었는데 이처럼 현격한 출생률의 저하는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가족계획정책 덕분이다. 건강보호 프로그램의 시행으로 사망률이 인구 1,000명당 6.1명으로 줄었으며, 유아사망률도 출생한 아기 1,000명당 6.4명(1995)으로 줄었다. 타이완의 평균 인구밀도는 597.5명/㎢으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이다. 특히 조밀도가 높은 곳은 서부 해안평야와 분지이다. 주민의 3/4 이상이 도시에 산다. 대도시에서의 인구폭발을 완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 중에는 중·소 도시 개발이 포함되어 있다. 으뜸 가는 도시 중심지로는 타이완의 수도이자 인구가 259만 5,699명에 달하는 타이베이를 비롯하여 가오슝[高雄]·타이중·타이난[臺南] 등이 있다.
경제
타이완에는 대체로 제조업·국제무역·서비스업에 기초한 시장경제가 발달해 있다. 타이완이 매우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주로 1946∼67년에 외국에서 들어온 자본 때문이다. 그뒤로 자본은 국내저축에서 수급되었으며, 투자는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최근에는 첨단산업으로 옮겨갔다. 국민총생산(GNP)은 1997년 2,983억 6,800만 달러로 합계되며, 국민 1인당 수입은 1만 3,819달러였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15도 채 못 되며, 농업 고용인구도 노동력의 겨우 1/8 정도이다. 가족 소유의 소규모 농장이 대부분이다. 농토의 생산력은 높지만,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농이 급증해 농촌노동력이 점차 고갈되고 있다. 쌀 생산은 국내수요와 맞아떨어지지만 그밖의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야채·버섯·과일을 재배하기 위해 많은 논이 전용되고 있다. 옥수수와 콩은 돼지 및 가금 사육용으로 재배된다. 수출되는 농산물로는 냉동돼지고기·설탕·버섯통조림·바나나·야채류·차 등이 있다. 숲이 영토의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는데, 벌목한 통나무 대부분이 공업에 이용된다. 어획물은 거의 국내에서 소비된다.
한정된 양의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등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광업은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연료와 광물의 대부분은 수입된다. 자철광·황철광·구리·금이 소량 채굴되며, 고령토·백운석·장석·석회석·활석도 다량 생산된다.
제조업이 GDP의 약 1/3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약 1/3을 고용하고 있다. 중공업은 타이완 남부의 가오슝에 집중되어 있다. 가오슝은 1965년 수출가공지대로 건설되었다. 추가로 가오슝 외곽과 가오슝에서 더 북쪽에 있는 타이중에 공업지대가 건설되었다. 경공업은 타이베이와 그 주변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수입원자재는 부근의 지룽 항[基隆港]을 통해 들어온다. 타이완의 경공업은 노동집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출주도산업으로는 전자장비·의류·직물 등이 있다. 약품·정밀기계·전자기기를 생산하는 첨단기술산업은 1970, 1980년대에 발전했다. 전기는 절반 정도가 화석연료로 발전되고 있다. 소량의 전기만이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원자력에 의해 발전된다. 타이완전력회사에서 원자력발전소에 크게 투자했다. 1948년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중국 노동자연맹은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노동조합이며, 파업은 금지되어 있다. 실업은 최저수준이며, 그결과 임금이 생산력보다 빠른 속도로 인상되어왔다.
타이완 전체 도로의 1/7만이 포장되어 있다. 도로와 항구는 다소 혼잡한데, 정부에서는 기본설비를 개선하기 위해 몇 개의 주요계획에 착수했다. 타오위안[桃園]과 가오슝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경제는 원자재와 약간의 소비재 상품의 수입, 그리고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주요시장으로는 1996년 타이완 수출의 1/4을 차지한 미국을 비롯해 일본·홍콩을 들 수 있다. 주요수입국은 일본·미국·독일이다.
정치·사회
타이완은 흔하지 않은 헌법 구조에 따라 내각제와 총통 체계를 병행하고 있다. 정부는 원래 1947년 중국 전체에 선포된 헌법에 근거하고 있다. 1949∼50년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쫓겨 온 국민당은 중국 본토에서 행사하던 통치를 타이완 원주민들에게 적용시켰다. 그때 선포된 계엄령과 국가비상사태는 1987년까지 지속되었다. 1949년부터 1980년대말까지 국민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정부와 정치사를 지배했다. 1996년부터 최고 통치권자인 총통은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6년이다. 총통은 광범위한 임명권을 가지며 정부의 여러 부서간 문제를 중재한다. 총통 아래 행정(내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함)·입법·사법·고시(考試 : 지방 공공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함)·감찰(정부행정을 감독) 등 5개 원(院)이 있다. 행정원은 정책과 행정을 책임지는 반면 입법원은 주요 법률제정기관이다. 사법원은 국가의 사법기관체계를 관리한다. 국민당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야당의 전국적 공직 선거 참여를 처음으로 허용했고, 또한 국민당 내 대표자도 민주적으로 선출했지만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정부기관 구성원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초까지 정치 발전의 주요 추세로 1945∼50년 중국 본토에서 피해온 국민당원 대신에 타이완 본토박이 출신의 정부 대표자가 늘어났다. 군사력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육군이며, 공군과 해군, 그밖에 다른 군대도 있다.
타이완의 사회복지사업은 주로 기업체의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노인·신체장애자·병자·임산부·산재노동자들에게 연금과 의료보장이 제공된다. 보건·위생시설이 신장되고 식사도 개선됨에 따라 건강상태가 크게 좋아졌다. 평균수명이 남자는 71.8세, 여자는 77.7세로, 이는 선진국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주택난은 정부의 주택정책에 따라 점차 완화되고 있다. 문맹률은 약 10%밖에 되지 않는다. 6∼15세의 어린이를 위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직업학교를 포함한 중등학교의 등록자수는 1970, 1980년대초에 크게 증가했다. 주로 잡지와 외국신문에 대해 행해지던 언론검열은 점차 완화되고 있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 대부분이 상업적 방송국이다.
문화
타이완에서는 중국 문화가 우세하다. 중국의 민속전통이 남아 있는 예술과 대중문화에는 중국화·음악·민속춤·공원·원주민춤 등이 포함된다. 순회공연단에서는 전통 가극과 타이완 가극을 공연한다. 타이완 가극은 주로 중국 전통 가극을 본뜬 것으로, 표준어 대신에 푸젠 방언을 사용한다. 타이완은 중국 영화 제작에서 홍콩과 경쟁관계에 있다. 1949년 본토에서 가져온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 구궁박물관[故宮博物館], 고기물(古器物)·기록물·장식미술 등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역사박물관, 인류학·동물학·식물학과 관련된 타이완 성립박물관(省立博物館) 등에서는 이 섬의 자연사 및 중국의 4,000년 역사가 이룩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
이미 7세기에 중국인들은 타이완과 말레이폴리네시아인의 후손인 원주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이 이 섬에 정착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처음으로 방문해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하 포르모사(Ilha Formosa)라고 이름지었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1626년 이전에 네덜란드인과 스페인인들이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요새화된 상업지구를 세웠다. 164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정착촌을 장악하고는 이 섬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뒤 1616년 네덜란드인들은 멸망한 명나라(1368∼1644)의 관리들이 대규모로 이 섬에 들어옴에 따라 쫓겨났다. 이들 중국인의 대거 유입으로 인해 섬의 주민은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683년 청나라(1644∼1911/12)의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타이완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하고는 타이완을 푸젠 성에 병합시켰다. 1796년 만주족들이 섬의 동쪽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842년까지 주민은 약 25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중국으로 설탕과 쌀을 주로 수출했다. 1875년 타이베이가 타이완 북부의 수도가 되었으며, 1886년에는 타이완이 중국의 1개 성이 되었다. 1894년 타이베이는 성도가 되었다. 다음해에 타이완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에 할양되었다. 일본 치하에서 타이완은 일본에 쌀과 설탕을 공급하는 주요공급처였다. 1930년대에 일본의 타이완 정책은 값싼 수력전기 에너지에 바탕을 둔 공업 발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40년 섬의 인구는 587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타이완은 중국에 되돌려졌다. 1945년 당시에는 국민당이 이곳을 통치했다. 1949년 본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타이완으로 피해왔다. 1954년 국민정부와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으며, 타이완은 거의 30년간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은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미국의 원조와 자유시장정책을 활용했다. 20년간 미국과 많은 비공산주의 국가들은 타이완을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로 대했으나, 1971년 미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나라를 타이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대체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중국 본토를 방문했다. 이 사건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그러나 타이완은 국제적 위상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20세기말 환태평양지역의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직에 올라 민주정치개혁의 기초를 다졌다. 1988년 장징궈의 뒤를 이어 타이완 본토박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통직에 오른 리덩후이[李登輝]가 개혁을 도해 나갔다. 1980년대말 타이완은 비공식적으로 중국 본토와의 무역과 여행을 허용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양국 사이에 제한된 무역 중계망이 설치되었다. 이무렵 타이완은 양당 정치제제와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중국 본토와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국과의 관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왔다. 1948년 8월 13일 한국은 타이완과 단독수교를 맺고 상호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양국은 항공협정(1952. 3)·무역협정(1961. 3)·문화협정(1965. 5)·해운협정(1983. 9)·항공운수협정(1986. 11) 등을 체결하여 관계를 긴밀히 유지해왔다. 1949년 장제스 총통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196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타이완을 방문했다.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공국가로서 서로의 입장을 지지해왔으며, 모두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로서 경제협력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타이완은 본토수복을 정치적 목표로 삼아 반공친미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중국이 국제무대에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자유진영의 우방들을 잃게 되었다. 1971년 중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자 국민정부는 탈퇴했으며, 1972년 일본의 중국 승인으로 대일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1979년 중미상호방위조약이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파기되었다. 1990년 타이완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한국만이 유일한 수교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992년 8월 한국이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함으로써 타이완과 한국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타이완은 국제적으로 고립노선을 취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일본 등과 민간관계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표부를 설치하는 등 새로운 경제협력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1996년 현재 대한 수출액은 27억 2,541만 달러이며, 대한 수입액은 40억 491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은 1,040명, 체류자는 1,54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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