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읽어라
고은
왜 『백범일지』를 권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무조건 읽어라." 그것이다.
나는 이제껏 『백범일지』를 다섯 번 읽고, 다섯 번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 새로 나온 듯했다.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모자람을 뉘우쳐 백범 김구선생의 10만 분의 l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는 꿈도 꾸어보았다.
옛날, 어른들은 젊은 날 『논어』를 만 번 읽었다 해서 별명이‘논어만독’이었다가 '만독이', '만득이’로 바뀌어지기도 했다. ‘논어만독’, ‘맹자만독’만이 아니라, ‘금강경만독’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책을 읽어 그것을 마침내는 주룩주룩 비 오듯 외우는 일에 익숙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쓴 시(詩)한 행(行)도 외우는 것이 없는 터라 『백범일지』의 몇 줄이나마 외울 나위가 없다. 다만 읽어나갈 때의 그 억누를 수 없는 감명 때문에 울어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리. 그 울음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하겠고, 나라를 잃은 식민지 젊은이의 울분 때문이기도 하겠다. 또한 울음은 삶의 여러 군데에서 갖은 슬픔과 아픔 그리고 수많은 괴로움을 만나게 되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어찌 거기에 울음이 없겠는가. 또한 그렇게 헤어졌던 사람과 만나게 되면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흐득흐득 목 놓아 울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울음 따위가 점차 드물게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할머니가 옛일을 떠올리면서 마른 눈물을 찔끔거리는 것을 보면 ‘아, 이 세상에 아직도 눈물이 있구나.’하고 새삼 눈여겨보게 된다.
눈물은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낡은 것이 아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도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지 않아서인지, 젊은 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달이 휘영청 밝다는 것만으로도 새벽녘까지 운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 살 때는 제주항을 떠나는 정기여객선을 보고 울기도 했었다. 그 배에 탄 사람 중 누구 하나도 나와 상관없을 터인데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타고 있는 것처럼 울었다.
그런 시절을 보낸 뒤 차츰 나에게도 슬픔이 있다 하되 눈물은 없었다. 그렇게 잘 울던 울음도 차츰 없어졌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백범일지』는 울음을 그때마다 찾아주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 처음으로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을 이유가 없었는데도 우연히 그 책이 나에게 왔다. 많은 책 속에 묻혀 있었는데 오랜 불면증으로 의식이 몽롱하던 어느 오후 그 책을 펴보았던 것이다.
나는 누워서 읽다가 의자로 옮겨서 읽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속의 허무와 교만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곧추세워 읽어갔다. 그러다가 한참씩 책에서 눈을 떼었다. 어린 시절의 일이 가끔 서늘한 찬바람처럼 떠올랐다.
김구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건은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1949년 여름이었다. 아버지는“백범선생이 운명하셨다!”고 크게 외쳤다. 아버지는 그 길로 마을 남정네들과 함께 어우러진 비탈길에서 우는 것으로 조상(弔喪)하는 것이었다. 한두 사람은 서울로 떠나기도 했다. 며칠 뒤의 신문에서 백범선생의 국민장 거행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백범 김구선생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없이, 시골의 두메 마을 사람들이 엉엉 울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 울음과 내가 『백범일지』를 읽고 우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백범 김구선생은 1876년(고종 13년) 조선 말기에 태어나서 1949년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진 현대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지도자이다. 그는 한국 국민에게 가장 친화력을 발휘한 민족적, 국민적인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에 검거된 뒤 감옥에서 지은 호인 백범(白凡)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는 내 원(願)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본명은 김창암, 김창수였으나 그 뒤로 김구(金龜)라는 가명을 사용하다가 김구(金九)로 확정한다. 1928년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에 이 자서전 『백범일지』상권을 썼다.
그는 이것을 유서로 쓴 것이다.
『백범일지』는 첫째, 무엇 하나 과장된 것이 없이 언제나 그 자신을 낮추되 당당한 바를 지키고 있다.
한편으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알리기 위한 가족사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거짓도, 꾸밈도 끼어 들 수 없는 정직만이 일관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찬란한 문장의 수사(修辭) 따위가 끼어 들 여지가 없다. 그저 소박한 표현일 따름이다.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어조이며, 옛이야기 책의 문체다. 나 같은 문학 종사자들은 우선 이런 책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문학을 뉘우칠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문학이 아닌 문학인 것이다.
병자년 칠월 십일일 자시(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육 칠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 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하니, 겨우 열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 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면서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이런 문장은 담담하게 들려주는 지난날의 이야기일지언정, 굳이 문학에 적용할 만한 것이 아니라 다만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 문체와는 어느 만큼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백범일지』의 문체는 함석헌선생의 여러 논설들이 화롯가의 이야기 그대로인 구어체의 매혹을 듬뿍 지닌 것처럼 어디까지나 ‘입의 보석’이다.
김구선생은 소년 시절 동학에 귀의, 교주 최시형을 찾아서 충북 보은 장내에 갔다. 그곳에서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알게 되었고, 그도 고향 황해도에 돌아와 동학농민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와 맞서고 있는 동학군 토벌의 의병 노선인 신천 고을 안태훈의 극진한 배려로 김구 일가가 한동안 신천에 안존할 수 있었다.
안태훈은 바로 안중근, 정근, 공근의 아버지였다. 또한 그곳에서 그는 평생 은사인 고능선을 만나게 된다. 의병장 유인석과는 동문인 사람이었다.
이처럼 『백범일지』는 나라가 기울어지는 시대에 선 비범한 청소년을 통해서 역사와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 보지 아니한 나라가 없고 망해보지 아니 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해서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그와 달라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패는 이 나라에 붙고 한 패는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사 고능선의 말이거니와 이 말에 깨달은 바 있어 김구선생은 청나라에 가서 큰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백두산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가는 여정에 올랐다. 백두산 언저리에는 마적이 들끓어 압록강 상류를 건너 남만주에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고구려 고토(故土)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그 땅에 건너가서 목숨을 부지하던 동포들의 곤궁과, 그런 동포들을 짓밟는 악행을 목격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동안 항일 의병에 참여하다가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동강 하류 치하포 나루에서 변복(變服)한 일본 육군 중위를 죽였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 뒤 그는 인천 감영에 갇힌 사형수가 되었다가 극적으로 감형되어 무기수로 된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김창수(김구)라는 이름이 널리 퍼져서 국운이 다하는 시대의 신화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 곽낙원은 집안을 정리한 뒤 인천에 건너와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식모살이도 해야 했다. 그는 감옥을 탈출한 뒤 그곳에서 사귀었던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지역을 찾아다니다가 공주 마곡사에 가서 삭발 승려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평양 대보산 영천암 주지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고 나서 다시 전국을 떠도는 풍운아가 되었다.
특히 그 시대의 뜻 있는 사람들은 그들 중의 누가 만난 사람을 서로 살폈다가 나라를 위한 인물로 만드는 일을 하는 미풍을, 이 책은 잘 서술하고 있다.
김구선생이 인천 감영에 갇혀 있을 때 그를 구해내기 위해서 옥을 부술 계획까지 세웠던 강화도 김주경과 부평 유인무를 비롯해서, 충남 연산 이천경, 전북 무주 이시발, 지례 성태영에 이어지면서 그들이 김구를 이모저모 살펴서 큰 인물로 만들고자하는 광경은 실로 나라가 다 거덜난 판국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모진 고문과 악형을 당하는데, 그때 다른 방의 동지를 다그치기 위해서“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라고 소리 높여 외치기도 했다. 그 자신 고문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임에도 그랬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곽 씨 부인이 서대문 감옥에 면회하러 와서 한 말이 있다.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도 더 기쁘게 생각한다.”
그 동안 모진 고문을 이겨내면서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그의 어머니와 아들은 오래 전부터 나라를 위한 헌신의 일치(一致)였다. 그것은 단순한 모자관계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야말로 마침내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였다.
이는 인간이 학문이나 어떤 교양에 의해서 위대한 인간이 되기보다, 바람찬 현실을 헤쳐나가는 동안 온몸으로 각성됨으로써 위대한 인간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백범일지』는 그런 사실을 누구에게나 알기 쉽게 밝혀주고 있다.
그는 두 번째의 긴 감옥생활에서 활빈당이나 불한당 등의 전국적인 도적 단체의 현황에 대해서도 훤히 알게 됨으로써 사회와 인간의 이면(裏面)과 만날 수 있었다.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사람들이 그런 도적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수치(羞恥)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그는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해 달라고 안창호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백범일지』 상권을 보면 그는 감옥에서 청소 도중에 우리 정부의 정청(政廳)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 달라고 기도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 같이 애국의 절박한 심정이라 하겠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승만이 떠난 뒤의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는 국무령, 주석이 되어 임시정부의 운명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백범일지』 하권은 상권을 쓴 지 14년 만에 씌어졌다.
예로부터 아득히 먼 파촉(巴蜀)의 파(巴)가 바로 중경이었다. 그곳의 망명생활과 독립운동 끝 무렵에 쓸 때의 감회를 “이 붓을 드니 53세 때, 상해 법조계 마당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
이윽고 김구선생이 한국광복군을 정식으로 조직하고, 서안에 총사령부를 두어 일제 식민지로 된 조국으로 무장 침투할 작전을 세워놓자마자 일제가 항복하였다. 그러자 민족의 자력으로 한번 싸워보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선생은 그 기쁨과는 다른 원통함을 느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3·1운동 이후의 상해 시대의 정파 분열과 좌우갈등 그리고 이봉창·윤봉길 의사들의 거사 지휘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김구선생은 윤봉길 의사와 서로 시계를 바꾸고 헤어졌다. 선생의 마지막 말은“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였다. 그 길로 윤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일제 요인을 폭살하는 의거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김구선생은 60만원 현상 수배인물이 되어 더 이상 상해에서 숨어 있을 수 없어서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숨어 다니다가 끝내 머나먼 중경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새삼 한민족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날을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이제까지 민족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가지 않는가. 주자(朱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건너온 어머니와 9년 만에 합류할 때도 그는 다시 어머니의 깊은 심증을 발견한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그는 이 말에 무척 감동했다.
또한 어머니가, 아들의 동지들과 청년들이 당신의 생일 축하연을 차리려는 것을 눈치 채고, 생일잔치에 쓸 돈을 주면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먹겠다 해서 그 준비금을 받아내다가, 그 돈으로 권총 두 자루를 사서 독립전쟁에 쓰라고 내놓은 일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경 생활 이후의 조국에 돌아와서 보낸 1,2년 간의 일도 덧붙여서 하권을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서 『백범일지』 속의 여러 곳에서 만나는 그 감동을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이상 몇 가지 일만으로도 나는 김구선생의 인격·인간성·애국심 그리고 그 견실성이야말로 우리가 이어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한다.
김구선생은 인도의 간디, 중국의 손문, 베트남의 호치민,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에 해당하는 우리의 국부적(國父的)인 존재다.
한국전쟁 직전, 38선의 남북분단을 극복하려는 선생의 충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민족통일의 원칙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백범일지』 상권 서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또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라.”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강조한 대로 끝까지 ‘문화’가 목적인 정치를 지향한다.
그에게는 결코 부국강병이 정치가 아니었다. 문화가 그의 정치적 최고 형태인 것이다.
이 책은 깊고 어려운 철리(哲理)나 지식을 담고 있지 않다. 또한 현란한 수사학(修辭學)이 동원된 것도 아니다. 이 책은 살아온 것 전부를 담은 긴 서술도 아니다.
투박하기까지 한 한문투로 쓴 수수한 원문을 그대로 한글체로 번역 해 놓은 이것은 읽는 사람에게 눈으로 판독하기보다 그 육성을 그대로 귀로 듣게 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 하나 거짓이 용납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허영이 끼어 들 겨를이 없는, 하늘 아래의 하심(下心) 하나로 민족의 양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실컷 울고 싶을 때 또 이 책을 읽으려고 책꽂이에 꽂아두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나는 너무 뒤져 있는 사람일 따름이다.
곽낙원
고은
물론 낫 놓고 기역자 알 리 없는
황해도 텃골 군역전 부쳐먹는 쌍놈의 집 아낙입니다.
그런 아낙이 제 자식 창수가
대동가 치아포 나루에서 왜놈 한 놈 때려죽이고
물 건너 인천 감리영 옥에 갇히니
초가삼간 다 못질해버리고
옥바라지 객주집 식모살이 침모살이 해가며
차꼬 물린 살인죄 자식 면회 가서
나는 네가 경기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
이렇게 힘찬 말 했습니다.
몇십 년 뒤 그녀는 여든 살 바라보는 백발노모
중국에 건너와
낙양군관학교 사람들이 생신날 축하하려고
돈 몇 푼씩 걷은 걸 알고
그 돈 미리 받아내어
생신날 단총 두 자루 내놓으며
자네들 걷은 돈으로 샀으니
내 생일 축하의 뜻으로 이 총 쏴
부디 부디 독립운동 이루어주시게
그 뒤 그녀는 여든두 살로 중경 땅에서 눈 감았습니다
나라 독립 못 보고 죽는 것 원통하다
이 말이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 아니고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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