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스크랩] 김광우의 <공학가·도시설계가·건축가·물리학자·의학자·화가 레오나르도>

kongbak 2012. 9. 13. 09:23

 

 

공학가·도시설계가·건축가·물리학자·의학자·화가 레오나르도

김광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후에 더 위대한 예술가로 인식되었으며, 단지 르네상스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반에 걸쳐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두 사람은 근대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개념을 확고히 했으며 서양미술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예술가가 부와 권력의 수족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고유한 창작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생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근대 예술가의 규범이 되었다.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독특한 그의 양식을 좇으려고 했다.
레오나르도를 존경한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플라톤의 모습을 레오나르도로 대신했다.


바사리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Vite de piu eccellenti pittori ed architettori』을 출간했다.
미술가들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수집한 이런 종류의 책을 그가 처음 출간한 것이다.
그는 초판에 레오나르도를 염두에 두고 찬사의 글을 썼다.


하늘은 이따금 인문학뿐 아니라 신성까지도 대변하는 인물을 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모방하게 하며 우리의 정신과 지성이 하늘나라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568년의 재판에서는 이 구절을 삭제했는데, 이때는 미켈란젤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놓고 누가 더 우수한 예술가냐고 묻는다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훨씬 많기 때문에 그가 미술에 끼친 영향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더 문명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꼽아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미술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에게 화가란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을 지배하는 명료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를 샅샅이 조사하려고 했고 또한 사물들에 감동을 받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재창조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실험가였다.
151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가 타계하자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는 “자연은 이제 그분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데 무력할 뿐”이라고 탄식하며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제자가 스승에 대해 쓴 글이라 객관성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예술가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는 데는 제자가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후 멜치는 레오나르도의 의붓 남동생들에게 스승의 타계소식을 알리면서 “그분은 제게 있어 최고의 어버이셨습니다”라고 적었다.


레오나르도는 무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다.
글의 양으로 보면 그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저술가라고 해도 타당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기를 바랐지만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생전에 120종에 달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했지만 현존하는 것은 50종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여졌는데, 절반은 흘린 글씨로 왼손잡이가 동양식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었으며 37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성서는 물론 이솝, 디오게네스, 오비디우스, 리비, 플리니우스, 단테, 페트라르카, 포지오, 피치노, 풀치의 저술들과 맨드빌의 여행기, 수학 논문집, 우주 구조론, 해부학, 의학, 농학, 수상술, 병법 등에 관한 책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쓴 글을 양적으로 보면 과학과 미술에 관한 내용이 반반이며 그 중 미술에 관한 것은 1651년에 『회화에 관한 논문』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당시 출판사가 편집했지만 글이 중복되고 짜임새가 없으며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내용 면으로는 우수하지만 문장력은 매우 취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회화를 오로지 회화로서만 익힐 수 있다는 당시의 사고를 부정하고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기보다는 자연을 연구하고 알아야 한다면서 들에 나가 다양한 대상들을 바라보고 각 대상의 상이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화가는 해부학·원근법·명암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각과 경험을 중요시한 것으로 그의 사고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래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지각 안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라는 문구에 요약되어 있다.


사람들은 내가 해놓은 증명들이, 경험 없이 얻어낸 판단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들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나를 비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내 작업이 나의 유일한 참스승인 순수하고 단순한 경험의 소산임을 알지 못하는 태도이다.


레오나르도는 은필, 목탄, 초크, 펜과 잉크 등을 사용해 드로잉하면서 물질적·정신적 요소를 두루 표현하려고 했다.
자연에 관심이 많은 그는 풍경을 드로잉했으며 인물을 그릴 때도 배경에 나무, 강, 바위, 산, 구름, 바다 등을 삽입해 자연을 회화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에게 있어 회화의 확실성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첫째,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눈에 의존하고 둘째,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은 실제 척도를 따라 판단을 검증하며 셋째, 기하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 등이다.
시를 옹호하는 사람과의 논쟁에서 그는 “회화가 자연의 모습을 시보다 진실되게 나타내기 때문에 회화가 시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으며, 회화와 시의 관계를 실재와 그림자에 비유했다.
또 회화가 조각보다 우수함을 역설하면서 조각은 색채나 대기의 원근을 나타낼 수 없으며 발광체나 투명체를 비롯하여 구름과 폭풍우,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묘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회화를 일종의 과학으로 보고, 예술적 모방은 과학적 행위이지만 단순히 기계적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이론에 근거하는 실천을 역설했다.


학문적 바탕이 없이 실제 작업에만 힘을 쏟는 사람들은 키나 나침반을 갖지 않고 바다로 나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선원들과 같다.
실천은 늘 확고한 이론에 근거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뛰어난 공학가였다.
그가 발명한 것들을 보면 나사를 자르는 기계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롤러-베어링 브레이크, 최초의 연발총, 톱니바퀴가 부착된 기어로 끌어올리는 절구, 여러 개의 벨트를 사용하는 방법과 세 가지 속력을 내는 변속기어,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나사를 조일 수 있는 조절 가능한 렌치 등 그 밖에도 그가 고안한 기계들이 아주 많다.
물속을 탐험하는 계획도 세웠지만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증기기관차에 관해서도 연구했으며 낙하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작방법을 기록했다.
생애의 절반을 인간이 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연구한 그는 새를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우수한 종으로 생각했다.
새 날개와 꼬리의 기능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면서 상승하고 하강하며 방향을 전환시키는 비행물체를 고안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기하학적 형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시기 그는 <최후의 만찬>169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기하에 대한 그의 관점을 파악하면서 감상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천체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 “달에는 겨울과 여름만 있다”고 적기도 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했으며 물로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땅속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면서 이를 인체의 혈관에 비유했다.
고지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과 물고기뼈 화석을 보고 물이 한때 고지에까지 찼었다고 추측했는데, 보카치오 역시 1338년 『필로코포 Filocopo』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다.
레오나르도는 사하라 사막도 한때 바닷물에 잠겨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성서가 말하는 대홍수를 믿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운동과 중량에 관해 백 페이지 분량으로 적었고, 또한 그만큼의 분량으로 열·음향·광학·색채·수리학·자석에 관해 적었다.
그는 “기계학은 수학적 과학의 천국이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수학의 열매를 맛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대단했으며 전화의 원리, 즉 소리의 전달 가능성을 발견했다.
“배를 멈추고서 가늘고 긴 튜브를 바닷물 속에 담그고 튜브 끝을 귀에 대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배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음악을 통해 소리의 파장을 발견한 그는 간단한 기구 튜브로도 소리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리보다는 시각과 빛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눈의 역할에 매우 경이로워하면서 “눈은 우주 전체의 이미지가 아주 작은 공간에 들어 있음을 믿는다”고 적었으며 정신은 아주 오래된 이미지를 상기해내는 힘이 있음을 지적했다.
눈을 카메라 렌즈의 원리로 이해하여 카메라와 눈 모두 빛의 작용으로 이미지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았고, 햇빛을 분석하여 무지개로 나타나는 사실도 알았다.
알베르티와 마찬가지로 그도 4세기 후 미셀 세브루가 명료하게 밝혀내기 전에 이미 보색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물에 관한 논문을 수없이 썼다.
물의 운동은 늘 그의 뇌리 속에 있었다.
2천 1백 년 전 탈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도 “물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물은 그에게 만물의 근원이었다.
그는 밀라노에서 운하를 디자인하고 건립하여 배들이 지름길로 물자를 운반할 수 있게 했으며 물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통해 일상생활에 편리함을 주려고 했다.


자연을 관찰한 그는 자연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식물의 잎이 줄기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자연법칙을 정립하기 시작했고 나이테로 나무의 나이를 아는 방법도 알아냈다.
그렇지만 당대의 망상을 전부 버리지는 못했는데, 어느 특정한 동물이 눈앞에 있거나 그 동물을 만질 경우 낫는 병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인체를 직접 해부하며 인간의 내부와 각 부분들의 작용을 알게 되면서부터 미신적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서른 구 이상의 시신을 해부했으며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수백 점의 드로잉과 글을 기록했다.
자궁·심장·폐·두개골·힘줄·창자·안구·뼈대·두뇌, 그리고 여인의 하복부 등을 직접 보고 드로잉했다.
자궁을 과학적으로 재현한 것은 그가 처음이며 해부학에 관한 상세한 드로잉과 글은 전에 없던 것들이다.
오늘날 공동空洞으로 알려진, 광대뼈에 난 구멍을 드로잉으로 보여준 것도 그가 처음이다.
또한 죽은 황소의 심장에 액체 왁스를 넣어 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했다.


인체에 관한 주요 논문들은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입했을 때 사라졌지만 오늘날 그는 위대한 과학자로 기억된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성과를 알 때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이는 미켈란젤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점으로 두 사람을 동일한 관점에서 비교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두 사람의 진가는 각기 상응하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드러날 수 있다.

출처 : 광우의 문화읽기
글쓴이 : 김광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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