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삼십육계] 제 15계 조호리산(調虎離山)...
待天以困之 用人以誘之 往蹇來反
하늘의 때를 기다려 적을 곤궁하게 만들고 사람을 써서 적을 유혹하여라. 주역의 건괘에 말하기를 계속하면 어렵고 돌아오면 편하다라 하였다.
후한말 한왕실이 쇠퇴하면서 각지에 군웅이 들고 일어나 천하를 다툴 때 강동에는 소패왕이라 불리우는 손책이 있었다. 십상시를 죽이고 황실을 장악한 뒤 패악을 일삼던 동탁을 제거하고자 17로(路)의 제후가 일어났을 때 그 선봉을 맡았던 손견의 아들이었다.
손견이 황조와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손책은 한동안 원술의 밑에 의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술의 그릇은 손책을 담기엔 너무 작았고, 손책 역시 원술의 그늘 아래 있기엔 포부가 남달랐다. 더구나 그에게는 손씨의 장남으로서 손견이 죽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가신들을 다시 다잡아 가문을 일으켜야 할 의무까지 있었다.
결국 손책은 손견이 남긴 전국의 옥새를 원술에게 넘겨주는 댓가로 1만 5천의 병사를 받아 당시 아직 무주공산이던 강동을 공략하여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자 꾀하게 된다. 이때 장강의 북쪽에서 손책이 근거지로 삼고자 했던 곳이 바로 여강이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여강은 북으로는 회수를, 남으로는 장강을, 수춘과 여남과 강하에 인접하여 바로 장강을 건너면 강동과 강남을 노릴 수 있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문제는 당시 여강에는 주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손책은 먼저
일찌기 손견의 명성이 대단했던 터라 손책이 원술로부터 군사를 받아 강동으로 진격해 온다고 했을 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유훈은 손책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만 마음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기왕에 예물도 받았고 하니 그동안 노려오던 상료를 공략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바로 손책이 노리던 바였다.
"호랑이가 이미 나의 계책에 의하여 산에서 내려왔으니, 우리들은 빨리 그 굴로 가서 차지하자!"
호시탐탐 유훈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손책은 유훈이 군사를 이끌고 여강을 떠나 상료로 향하자 바로 군사를 이끌고 주인이 떠나버린 여강을 공격했다. 요충 중의 요충이었지만 그 우두머리가 병사의 상당수를 데리고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저항은 없었다. 일부러 험로를 골라 공격하자 여강은 그대로 함락되고 만다.
결국 유훈은 상료도 얻지 못하고 본거지인 여강마저 잃은 채 조조하게 의탁하게 되었으니, 호랑이의 굴인 여강은 이로써 말릉에 건업을 건설하기까지 손가의 근거지가 되어 버린다.
손책이 말한 호랑이가 이미 산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조호리산(調虎離山)이다.
조호리산에는 두 가지 숨은 뜻이 있다. 첫째는 손책이 유훈을 끌어내고 여강을 차지했던 것처럼 산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호랑이가 무서워서이니 호랑이를 밖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조가 서주의 유비를 허창으로 불러들이고 서량의 마등을 허창으로 불러 죽인 것처럼 호랑이가 무서운 것은 산속에 숨어서이니 산에서 끌어내어 약해진 것을 잡는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아직 진왕으로 있을 때 태자로 있던 이건성이나 제왕으로 있던 동생 이원길은 고조 이연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이세민을 질투하여 제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특히 돌궐이 침입해 오자 그것을 토벌하는 것을 구실로 제왕을 대장으로 진왕을 따르던 위지경덕, 진숙보, 정교금 등을 부장으로 딸려 보낼 것을 청하니 그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이세민을 제거하려는 계략이었다.
이에 이세민은 처남인 장손무기를 찾아가 대책을 논의했다.
"저들이 그리 하려 한다면 같은 방법으로 돌려주는 것이 좋겠지요. 기왕 하려면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
이세민은 장손무기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날 밤으로 고조 이연을 찾아가 태자와 제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그들이 의도한 바를 고해 바쳤다. 그리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건성과 이세민, 이원길 세 형제로 하여금 고조 앞에 출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세민이 의도한 바였다.
원래 이건성이나 이원길도 이세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세력이 작지 않았다. 만일 이세민이 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려 한다면 이기기도 쉽지 않거니와 자칫 싸움이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고조의 분노를 사 이세민 자신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사실 그 때문에 이건성이든 이원길이든 이세민이든 서로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황제를 만나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들을 이끌고 궁으로 향할 그 순간이 이세민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황제를 만나는데 많은 세력을 동원할 수 없을 것이니 숲을 나와 약해진 호랑이 따위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사냥하면 될 터였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 장손무기와 위지경덕은 현무문 밖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성과 이원길이 역시나 최소한의 인원만을 데리고 입궁하려 하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몸을 돌려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려 하자 이세민이 말을 달려 그 뒤를 쫓았다.
"전하, 도망가지 마십시오!"
이세민이 쏜 화살에 이건성이 쓰러지자 위지경덕이 쏜 화살에 이원길마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수행원들과 이세민의 세력이 맞부딪혔을 때 위지경덕은 고조에게도 달려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태자와 제왕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진왕이 다행히 그들을 죽였습니다. 진왕께서는 폐하께서 놀라실까 두려워 특별히 저를 보내어 폐하를 보위하라 하셨습니다."
아마 대세는 정해진 뒤였다. 이건성이나 이원길이 살아 있다면 모르지만 그들이 죽은 이상 명분은 이건성과 이원길의 잔당이 아닌 황제의 아들이자 진왕인 이세민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신료들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이로써 이건성과 이원길의 남은 무리들마저 모조리 일소되니 그해 이세민은 이건성을 대신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8월 고조로부터 양위를 받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저 유명한 현무문의 정변이다.
사실 과연 이건성과 이원길이 먼저 이세민을 공격하려 했던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세민과 그를 따르던 유문정, 장손무기 등은 처음부터 고조 이연의 황제즉위에 관심이 많았는데, 과연 이연으로 하여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공이 있어도 더 있었고 세력이 있어도 더 컸고 과연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세민에 도전할 주제가 되었을까? 아마도 이세민이 그들로 하여금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압박한 결과라 할 것이다.
아무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이건성과 이원길을 황제의 명령을 빌미로 근거지에서 끌어내어 최소한의 인원만을 거느린 상태에서 황궁의 현무문 앞에서 그들을 죽이게 되었으니, 호랑이를 숲에서 끌어내어 사냥한 예라 하겠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일본군의 작전의도를 완전히 좌절시켰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본군에 치명적인 존재였다. 싸웠다 하면 패하고 그렇다고 싸우지 않자니 수로가 열리지 않으면 육로도 막히고 차라리 유인해서 어떻게 해 보려 해도 오히려 한산도에서 나올까 섬마다 성을 쌓고 방비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심장에 박힌 가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전장에서는 당할 자 없는 상승의 명장이었지만 중앙에 있어 연줄도 인맥도 없는 외로운 신세라 공을 세운 것이 독이 되어 아주 약간의 이간질만으로도 오히려 조선조정에 의해 이순신은 제거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조선 수군이었다. 비록 5000년 역사에 보기드문 머저리 원균이 지휘하고는 있지만 이순신에 의해 조련되어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이던 한산도에 웅크리고 있는 조선수군이.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수군통제사만 된다면 수군을 이끌고 남해의 바닷길을 열겠노라 호언장담했던 원균이었다. 그로 인해 이순신을 대신해 수군통제사가 된 이래 조정으로부터 출진하라는 압력이 가해졌고 심지어 도원수 권율로부터는 곤장을 맞는 수모마저 당해야 했었다. 그런 상황에 억지로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더니 이게 웬걸? 일본군이 알아서 물러가 주는 거다. 별로 이기거나 한 건 없지만 확실히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을 만나자마자 도망치는 것이었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것도 있고 해서 속에 불을 품고 있던 원균은 기회다 싶어 그것을 쫓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조선수군이 한산도를 나와 일본수군의 영역인 동쪽 바다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일본군은 신중했다. 원균은 구제할 수 없는 머저리였지만 그 밑에는 이억기를 비롯 이순신과 싸운 장병들이 다수 있었고, 그들은 싸움에 능하고 이기는 것에 익숙했다. 조선수군이 완전히 전투력을 잃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선수군이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바로 그 때가 오기까지 일본군은 끈질기게 기다리며 조선 수군을 유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칠천도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닻을 내림으로써 그 기회는 찾아왔다.
어찌나 지쳤는지 원균은 경계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고 배를 정박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조선수군 그 누구도 몰랐다.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기까지. 그리고 공격이 시작하자마자 원균은 가장 먼저 앞장서서 용맹하게 도망쳤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비겁하게 이억기와 최호가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 전사하는 사이 가장 먼저 도망쳐서 칠천도에 상륙한 뒤 칼을 뽑아보지도 못하는 무용을 떨치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비아냥거린 거다. 원균더러 명장이니 맹장이니 하는 덜떨어진 소리에 대해)
결국 이 한 번의 싸움으로 100여 척이 넘던 조선수군은 배설이 일찌감치 이끌고 도망쳤던 13척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배가 있어도 배를 운용할 병력이 부족해서 울돌목에서 한 척을 따로 빼어 쓰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억기도 죽고 최호도 죽고 많은 장수가 죽고 많은 병사들이 죽고 포로가 되었다. 그야말로 한 번의 싸움으로 완전히 무적을 자랑하던 조선수군의 연합함대가 완전히 녹아버린 것이다.
싸움의 여파는 더 치명적이었다. 남해의 수로가 뚫리자 그때껏 수세에 놓여 있던 육군도 작전을 개시해서 마침내 남원까지 함락하고 호남을 유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내내 그나마 전란에서 비껴나 있으면서 조선의 곡창 역할을 했던 호남이 적에게 유린되면서 다시금 한양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수군이라는 호랑이를 한산도라는 호랑이굴에서 끄집어내 마음껏 유인하고 돌린 결과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죠라쿠에 성공한 뒤 전국의 주도권을 쥔 것은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겐지도 아니었고 슈고도 아니었으며 전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하극상으로 권력을 쥔 한미한 출신의 다이묘에 불과했다. 그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독단과 맞물려 명문을 자처하던 아사쿠라나 다케다, 특히 쇼군 요시아키를 자극했다. 그래서 결성된 것이 노부나가 포위망. 노부나가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리고자 죠라쿠를 시도하던 다케다 신겐이 다카텐진성을 공격하다 급사한 뒤 상황은 급반전하게 되었다. 가장 위협이 되는 다케다 신겐이 사라지자 오다 노부나가는 더 이상 지체치 않고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가했던 아사쿠라, 아사이 등을 멸망시키고 요시아키를 쿄토에서 쫓아냄으로써 불과 2년만에 자신을 위협하던 모든 적들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다. 남은 것은 다케다 신겐이 죽은 다케다가 뿐이었다.
그런데 이 다케다가의 근거지인 가이는 산이 많은 지형으로 다케다 신겐 자신조차 겨울이면 작전을 펼치기에 제약이 많았을 정도로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나오기도 쉽지 않고 따라서 들어가기는 더욱 쉽지 않고, 다케다가가 그대로 가이에 머물러 지키고자 한다면 아직 많은 적이 남아 있던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으로서는 공략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끌어내야 했다. 가이라고 하는 호랑이굴로부터 다케다 군이라는 호랑이를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이 원하는 벌판으로.
마침 다케다 신겐의 뒤를 이어 다게다가의 가독을 물려받은 가쓰요리는 무척이나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다케다 신겐에 의해 멸망한 집안의 딸의 소생이라고 하는 출생과 어울려 워낙 다케다가에서도 소외되어 있던 가쓰요리의 처지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인정받고자 과잉된 군사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었다. 어차피 가독은 가쓰요리의 아들인 노부요시에게 물려주도록 되어 있었고, 그의 출신으로 인해 가독을 물려받는 것에 비우호적이었던 가신들은 여전히 그를 견제하고 있었다. 의지할 곳도 없고 믿을 이도 없고 그야말로 고립되어 있던 가쓰요리로서는 오로지 군사행동으로서만 자신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3년은 군사행동을 하지 말도록 경고한 다케다 신겐의 유언은 그러한 가쓰요리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더 극성스럽게 군사행동을 하는 가쓰요리를 두고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은 이렇다 할 대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도토우미의 아케치성을 포위하고 다케다 신겐이 공략에 실패했던 다카텐진 성을 함락시키고서도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은 침묵할 뿐이었다. 마치 가쓰요리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은 젊은 가쓰요리를 더욱 자극했다. 더 큰 성공과 더 큰 명성과 그를 통해 미약하기만 한 가문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자 했던 가쓰요리는 마침내 그 유혹을 넘어서지 못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가쓰요리가 미카와의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면서부터였다. 미카와에서 가이는 참으로 멀다. 그리고 나가시노는 가이에서는 멀지만 오와리나 미카와로부터는 가깝다. 숲에서 나온 호랑이를 집앞에 함정을 파고 잡으러 갈 때였다.
사실 당시 병력수에서 보면 오다 - 노부나가 연합군이 한참 우위에 있었다. 다케다가의 병력이 1만 5천 정도, 그러나 오다 - 도쿠가와 연합군은 그 두 배가 넘는 3만 5천이었다. 영화 카게무샤 등을 통해 기병돌격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다케다가의 기병이란 말을 타고 돌격하는 기병이 아닌 말을 타고 이동하여 싸움에 임해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싸우는 기마보병이었다. 코요군감에서도 그래서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쓰여 있다던가? 다시 말해 당시 나가시노에서 부딪힌 다케다군과 오다 - 도쿠가와의 연합군은 모두 같은 보병이었고, 그런 주제에 오다 - 노부나가군이 두 배 이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당시 나가시노의 싸움은 머릿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오다 - 도쿠가와의 연합군이 미리 함정을 파고 기다려 다케다군을 포위공격하여 괴멸시킨 전투였다. 그리고 다케다군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것도 나가시노에서가 아닌 패배를 자인하고 퇴각하는 것을 추격하는 과정에서였다. 가쓰요리가 마침내 퇴각을 결심했을 때 바바, 야마가타 등 가신들은 가쓰요리의 퇴각을 돕기 위해 후미를 막고 나섰고 그 과정에서 다케다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론 뎃포도 나름 역할을 하기는 했겠지만 사실상 싸움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더구나 오다 노부나가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 다케다가에 적당히 손을 써 두고 있던 참이었다. 다케다군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먼저 그들이 움직였다. 결국 호랑이가 숲을 나와 사냥꾼에 상처를 입고 굴로 돌아가려 해도 이미 그 굴마저 사냥꾼의 손아래 들어가게 된 셈이다. 결국 가쓰요리는 본거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오다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다 그 가족과 함께 스스로 할복하여 목숨을 끊는다. 겐지의 명문 가운데 하나였던 다케다가가 완전히 멸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조호리산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굳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전봉하여 미카와에서 원래 호조씨가 다스리던 에도로 옮기도록 한 것은 도쿠가와의 기반인 미카와에서 이에야스를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원래 도쿠가와 - 이전에는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의 토호로서 미카와 무사집단의 충성심이 매우 대단했었다. 그것은 돈을 주고 고용한 사실상 용병이나 다름없는 오다나 토요토미 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아사이 - 아사쿠라 연합군과의 아네가와 전투에서도 오다군은 상황이 불리하자 오히려 퇴각하거나 흩어지고 있었는데 미카와군이 끝까지 버티고 밀어붙여 마침내 아사이와 아사쿠라를 물리쳤던 것처럼 말이다. 전술이나 전략이야 오다나 토요토미가 한 수 위였지만 정작 무사집단의 전투력이나 끈질김은 도쿠가와가 한참 위였다. 역시 뿌리가 깊고 튼튼한 전통적인 다이묘와 하극상과 운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경우와의 차이라 하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호조씨를 멸망시키고 도쿠가와로 하여금 근거지에서 떠나 에도로 들어가게 한 것은 좋았는데, 히데요시로서는 불행하게도 에도는 미카와보다 더 깊은 숲이었다. 미카와 무사집단처럼 충성스런 가신단은 없었지만 오사카의 토요토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었고, 그만큼 토요토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채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마침내 도쿠가와는 동국의 무사들의 지지를 얻어 토요토미 사후 세키가하라에서 토요토미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국의 무사들을 무찌르고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호랑이를 끌어내더라도 호랑이를 잡으려 하면 호랑이를 내 쪽으로 끌어내야 하고, 산을 차지하려면 호랑이를 멀리 떠나보내야 했을 터인데도, 호랑이를 산에서 끌어내려 하다가 더 깊은 산으로 숨게 해 도리어 자신의 멱줄을 끊게 만든 경우라 하겠다.
호랑이가 무서운 것은 산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산이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랑이를 잡고자 하면 먼저 산에서 끌어내야 한다. 산을 차지하고자 한다면 먼저 호랑이가 산을 나서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강한 적은 약해지고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요새는 비어 버린다. 약해진 적과 비어 버린 요새를 차지하는 것은 무에 어려울까. 그것이 조호리산, 병법삼십육계의 15번째 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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