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삼십육계] 제 16계 욕금고종(欲擒姑縱)...
逼則反兵 走則減勢 緊隧勿迫 累基氣力 消基鬪志 散而後擒 兵不血刃 需有孚光
적이 너무 쫓기며 군사를 돌리고 달아나면 기세를 약하게 하여 바짝 추격을 하되 너무 급박하게 하지 말라. 적의 기력을 지치게 하고 싸우고자 하는 뜻을 소멸시켜 그들을 분산시킨 뒤 사로잡아 병사의 칼에 피가 묻게 하지 말라.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광명이 있으리라.
두 말 할 것 없이 삼국지에 나오는 칠종칠금에서 유래한 계명이다.
원래 운남은 촉은 커녕 명이 건국되고도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아니 청이 건국되고 운남을 정벌하여 복속한 뒤에도 운남의 토착민들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켜 중국의 지배에 항거해 왔었다. 하물며 후한 말, 그것도 갈갈이 찢긴 서촉의 작은 군벌 따위에 운남이 복속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지배한 적도 없으니 반란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칠종칠금의 고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제갈량을 신격화하기 위한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장차 조위를 무너뜨리고 광무제를 본받아 한을 다시 일으키고자 한다면 -삼국지연의 상의 명분대로라면- 북벌을 해야 하는데 북벌을 하자면 또 당시 촉으로서는 배후라 할 수 있는 운남의 이민족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형주를 빼앗기고 유비가 죽는 가운데 촉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이 지역에서의 불손한 움직임이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배후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옹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기회삼아 남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나 워낙 한의 지배가 미치지 않던 운남이었다. 제갈량이 한 차례 원정에 성공하여 그 우두머리인 맹획의 항복을 얻어내더라도 원래 한과의 관계가 그처럼 희박했으니 돌아서고 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물론 아주 힘으로 눌러서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하면 상관없지만, 그러자면 많은 인력과 비용과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했고, 촉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운남이 아닌 북쪽의 조위였다. 그래서 제갈량이 선택한 것이 칠종칠금. 맹획을 일곱번 놓아주어 그 마음으로부터의 굴복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야기야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어보면 될 것이다. 비도술의 명수인 축융부인 -하필이면 이름이 축융이다- 맹수들을 부려 공격하던 타사대왕, 3미터가 넘는 거구로 힘이 장사이던 올돌골과 그가 이끌던 등갑병, 독물이 들끓는 오지의 지배자 대래동주, 그야말로 중국인이 생각하던 오지에 대한 공포와 환상이 그대로 그린 듯 담겨져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데, 현대 무협소설에서도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거의 고스란히 재생산되어 쓰이고 있다.
아무튼 앞서 말한대로 운남이 중국 영토로 편입된 것이 명나라 이후, 그나마 완전히 복속되어 지배되기 시작한 것이 공산혁명 이후이니 당시 일개 군벌에 불과한 촉이, 조위라는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서도 그 같은 오랜 원정을 통해 운남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믿기 힘들다. 실제 사료를 보더라도 당시 제갈량이 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남정을 떠난 기록도 없고. 말하자면 중국인의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인데,
운남과 운남의 지배자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듯 결국 이 칠종칠금의 고사는 중국인들이 당시 주위의 이민족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기괴하고 난폭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그러면서도 무지하고 미개하여 중화의 덕에 마침내 감화되는, 요즘 헐리우드 영화에서 서구의 앞선 문물에 어느새 동화되어 개화되는 야만인들을 떠올리면 되겠다. 백인에 의해 앞선 문물을 접하고 백인의 사상과 종교를 통해 무지와 야만을 벗어던지는, 딱 그 수준이다. 그것을 삼국지연의는 운남의 왕인 맹획을 제갈량이 일곱 번이나 잡았다 풀어주어 맹획으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굴복하여 따르게 만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국주의적인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야기랄까?
실제 현실에서도 칠종칠금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소민족이나 국가를 지배하는 전략으로 흔히 쓰인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데 사용한 문화통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힘으로 강압하기보다는 근대화된 일본의 앞선 문물을 보여줌으로써 어느새 조선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라도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여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으니.
아마 일본이 무단통치기간이나 30년대 이후 전시체제에서와 같이 조선의 인민들을 억압하고 강제하고 수탈하려 했다면 그렇게 친일파가 양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에 굴복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불의하고 부당한 지배는 반드시 그에 대한 반발을 일으킬 것이기에 민족의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항거로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더 거세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3.1운동을 계기로 강압보다는 교화와 동화를 선택했고, 적당한 자유와 방임을 통해 조선인의 긴장과 반발을 늦추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반감이 희석되면서 식민지조선과 조선인은 그야말로 하마트면 일본에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질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제 3세계에 대한 지배방식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억압적인 독재자에게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에게는 자본주의와 자유를,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나면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그들은 항상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고 그 나라로 진출한다. 그리고 지원한다. 결코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자본과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그 사회 지배계급을 손아귀에 틀어쥔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구원자로서 그 사회의 특히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그들의 지배방식이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도 그것이고.
유럽의 근대를 연 계몽주의와 그 계몽주의에서 파생한 민족주의도 욕금고종의 예라 할 수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경우 스스로 국민의 공복을 자처하며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꾀하는 등 새로이 성장한 시민계급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결국 그 목적은 그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어 인구와 생산에서 프랑스에 크게 뒤지던 프로이센을 군사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부국강병책이었다.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국가라 하면 국왕과 소수 특권계급의 국가를 말했었다. 영지의 영민은 있어도 국민은 없었고 도시의 시민은 있어도 국가의 국민은 없었다. 도시를 지배하는 귀족과 장원을 지배하는 영주와 국가를 지배하는 국왕과, 단지 그들이 세금을 거둬 자기들끼리 땅따먹기 놀이나 하며 노닥거리는 것이 봉건사회의 국가였다. 그것을 국민들을 끌어올려 국가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만든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경기장을 건설하고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만들고 군대와 관료로 입신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은혜를 베풀어 더욱 국가에 - 정확히는 군주에 충성토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도 흔히 말하지 않던가.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 그거다.
전국시대 병법가로 이름이 높았던 오기 -오자병법의 저자- 도 바로 그런 원리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오기를 따라 전장에 나간 자식을 둔 한 어머니가 자식이 종기가 났는데 오기가 입으로 그 고름을 빨아주더라는 말을 듣고 마치 자식이 죽기라도 한 듯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었다. 이웃사람이 물었다. 높은 사람이 고름을 빨아주었으니 그것이 큰 은혜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어머니는 더 크게 목을 놓아 울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놈 아비도 장군을 따라 전쟁에 나갔는데 종기가 난 것을 장군이 빨아주자 감격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오. 아마 그놈도 그리 은혜를 입었으니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려 할 테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소."
한 마디로 마음을 사는 것이다. 욕금고종이란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지배하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솝우화에 나오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햇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북풍한설은 옷자락을 여미게 만들지만 따뜻한 햇볕은 마음을 풀고 옷깃을 여민 손도 풀어지게 만든다.
역시 삼국지에 나오는 장면인데, 낙봉파에서 방통이 죽고 장임과 뇌동으로 인해 유비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제갈량은 유비의 요청을 받고 장비와 조운과 함께 파촉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장비가 촉으로 들어가던 길이 파군을 통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 파군에는 황충과 더불어 노익장으로 이름높은 엄안이 지키고 있었다.
워낙 난공불락의 요새라 파군을 공략하는 것은 역전의 장비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엄안 역시 만만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참을 고전하다 겨우 파군으로 이르는 샛길을 발견하고 그 샛길을 이용하여 마치 그 길로 파군의 뒤를 공격할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엄안을 성밖으로 불러내 사로잡을 수 있었다. 상당히 고난이도의 만천과해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엄안을 사로잡아 포박해 오자 장비는 포승줄에 묶인 엄안을 자기 손으로 풀러주며 주위에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어찌 엄안과 같은 명사를 이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이게 또 조조나 유비나 손권이나 한 세력 하는 인간들이 잘 쓰는 짓거리다. 풀어줌으로써 마음을 산다.
그러고 보면 극동의 어느 나라의 대통령도 지역주의를 깨 보겠다고 낙선이 확실시되는 지역구에 출마하여 끝내 떨어짐으로써 수많은 고정지지자들을 얻었던 경우였다. 당선되어봐야 기껏 국회의원 한 자리, 그러나 지역주의라고 하는 확고한 명분과 그를 위해 낙선마저 불사했던 그 용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끝내 그들로 인해 만년 낙선의 정치인이던 그가 무려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과연 국회의원 한 번 되어 보겠다고 신념을 버리고 시세에 영합하려 했다면 그리 될 수 있었을까? 물론 탈세에 위장취업에 위장전입을 저지르고서도 대통령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항상 가장 좋은 것은 마음으로 굴복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 좋은 것이 계략으로 굴복시키는 것이고,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사기란 너무 힘들고 비싼 터라 사람들은 흔히 계략으로써 상대를 속이거나 힘으로 억누르려 한다. 계략이 들통나면 오히려 인심을 잃게 되고, 힘으로 누르는 것은 힘이 다하고 나면 그 힘에 의해 보복을 당하게 된다. 계책이 다해도 힘이 다해도 남는 것은 결국 인심.
명이 멸망하고도 조선이 명을 사모하여 그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제사를 모시고 그 연호를 썼던 것은 명이 강성해서가 아니었다. 명이 갖는 명분, 즉 중화라고 하는 가치가 조선인의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명이 힘으로 조선을 지배하려 했다면 중화는 곧 뙤놈이 되어 중국에 대한 반감만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명은 조선을 힘으로 어찌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공을 하면 그 몇 배의 선물을 돌려주곤 했었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칠종칠금에서의 이민족에 대한 교화의 전략일 텐데, 그럼으로써 굳이 명이 어찌하지 않아도 조선이 알아서 명을 섬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가지려 하면 놓치게 되고, 놓으려 하면 도리어 얻게 되고, 연애를 하더라도 적당히 튕기고 적당히 놓아주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잡는 한 방법이다. 금도끼와 은도끼를 보아도 쇠도끼를 찾아야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얻듯 당장의 욕심을 버리고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얻고자 해서가 아니라 얻으려 않기에 스스로 달려드는 이익이다. 그것이 욕금고종, 병법삼십육계의 16번째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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