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僞作不知不爲 不僞作假知妄爲 精不露機 雲雷屯也 차라리 거짓으로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을지언정,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으로 아는 척 하여 망령되이 거짓으로 하지 말라. 고요하게 있어 기미를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름과 번개가 어우러지니 둔괘라 할 것이다.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친다는 것은 비가 내릴 조짐이다. 구름이 드리워지고 번개가 치고 있으니 조용하나 곧 비가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군자는 마땅히 형세를 살펴 어려움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가치부전이란 인내다. 요즘 말로 하면 한 마디로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 괜히 모르면서 아는 척 나대기보다는 알더라도 모르는 척 가만히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살피면 더 큰 기회가 올 것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를 한다. 물론 펀드니 뭐니 믿음이 안 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개인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나. 주식투자를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이상 재테크 정도로 하면서 전문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기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저 위에는 주식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모르면 아예 하지 말던가, 할 것이면 차라리 전문적인 업체나 개인에게 맡기고 아예 잊어버리던가, 괜히 어설픈 지식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고 나서면서 크게 사고치고 하는 것이다. 설사 믿고 맡겼더니 주식과 펀드가 반토막이 났다... 그래도 차라리 바보가 되어야지 미친 척 자기가 나서다가는 더 크게 사고치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아예 말던가, 바보가 되던가...
아마 그 대표적인 예가 2차세계대전 당시의 처칠과 히틀러였을 것이다. 그나마 군사적인 재능만 놓고 보자면 히틀러가 처칠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티이거라든가 나스호른 등의 개발에도 직접 관여했던 히틀러는 모델의 평가에 따르면 사단 이하의 전술에 대해서는 1차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하사관출신으로 나름 이해가 있었다. 물론 매우 호의적인 해석으로 모델의 정확한 평가는 사단규모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해군상으로 1차세계대전에서도 갈리폴리 상륙작전 등에서 사고만 여럿 크게 쳤던 처칠과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결과는 그나마 조금은 군사적으로 나았던 히틀러가 아닌 처칠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왜? 한 마디로 처칠은 영국의 시스템과 주위의 견제로 인해서 군사적인 부분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던 대신, 히틀러의 경우는 무소불위의 총통의 권한으로 이리저리 군사적인 중대한 결정에 관여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퇴각이 필요한 시점에 사수를 명령하고, 기동방어가 장기이던 독일군에 거점방어를 지시하고,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항거하는 지휘관을 해임하거나 좌천시키고, 그나마 가만히 있었으면 조금은 나았을 것을 어설픈 자신감이 독일을 더 빨리 패망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하긴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자체도 미친 짓이기는 했다. 원래 히틀러에 대한 서구세계의 호감은 상당했었다. 심지어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독일은 재건되었고 새삼 세계의 열강을 긴장시키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소련의 위협도 있었기에 독일의 존재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을 터였다. 1차세계대전의 상처가 채 다 가시기 전이기도 했던 터라 그래서 체코의 합병까지 용인했던 것이었는데... 그러나 거기서 더 가고 말았다.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고 채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휩쓸리고 말았으니.
그나마 일본의 경우는 더 심했다. 사실 일본의 수뇌부 누구도 중일전쟁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만주사변조차도 구일본제국의 계획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하마구치 내각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고자 가장 크게 일본의 사회와 경제에 부하를 주고 있던 군비의 축소마저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군부의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일본의 군부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쵸슈와 사츠마 두 번 출신들에 의해 거의 군벌화되어 있었기에 군비의 축소란 그들의 영향력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주사변과 5.15쿠데타는 바로 그러한 군부의 불만과 불안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이로써 일본은 오히려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끌려다니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기왕에 저질러진 것 만주까지만 차지하고 그만두었으면 어땠을까? 만주제국과 그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서도 용인하는 분위기였으니. 런던군축조약에서도 일본은 열강의 하나로서 동아시아에서의 그 군사적 지분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이은 중일전쟁부터는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아시아의 열강으로 인정받은 일본이었는데, 러일전쟁의 승리와 만주침략의 성공에 고무된 일본의 군부는 그런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이미 현실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었던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가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야 아는 바대로...
당장 북한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적당히만 했으면 핵문제에 있어 북한의 입장에 귀기울여주는 국제여론이 적지 않았었다.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패권주의에 비판적인 여론이 국제사회에도 적지 않았던 터라 북한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었던 탓이었다. 더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수용하며 국제사회로의 대화의 통로마저 열어주고 있었으니. 과연 노무현 정부에서 북한이 한 걸음 더 나가 양보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북한이 미친 척 한 결과 오히려 미국의 오바마정부마저 북한에 냉소적이고, 남한에는 북한에 적대적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말았다. 영리한 척 하다가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미친 짓거리였던 셈이다.
인조의 외교정책도 그 한 가지라 볼 수 있다. 어차피 조선이란 중국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괜히 자존심 세우며 군사적으로 경쟁해봐야 인구와 경제, 군사 어느 하나 중국과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만주의 여진족 역시 흩어져 있을 때는 만만했지만 뭉치고 나면 그런 중국마저 위협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으로 허약해진 조선이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자면 광해군처럼 명 뿐만이 아닌 후금 - 청에 대해서도 자세를 낮추어 차라리 바보가 되기를 꾀했어야 했다. 바보가 되어 무시당하더라도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그러나 인조는 바보가 되기에는 너무 용감했다. 그리고 정의로웠다. 중국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한낱 만주족에게까지 고개를 숙일 수 있겠느냐. 그래서 명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단절한 나머지 돌아온 결과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과연 인조가 바보가 되고자 했다면. 나 죽여주십사 새로 일어난 강자에게 약자로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힐 수 있는 약간의 비겁함만 있었담면. 물론 인조가 후금도 아닌 명에 대항해서 그러고 있었다면 인기는 대폭발이었을 것이다. 대신 지금 우리는 한자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기꺼이 바보가 되려는 자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선덕여왕은 당나라 황제에게 수를 놓고 시를 써서 바치고 있었다. 당나라 황제는 어찌 아녀자가 왕이 될 수 있느냐며 자기 친척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골라 왕으로 보내주겠노라 모욕을 주고 있었고. 덕분에 비담의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선덕여왕은 참았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모욕이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당면한 위협이었으니까. 차라리 업신여김을 당하더라도 믿을만한 동맹국으로 남는 편이 신라에게는 이익이었던 것이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이 신라에 대해서마저 야욕을 드러냈을 때에는 신라 역시 당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바보로 업신여김을 당할 수는 있지만 그대로 망할 수는 없는 것이니.
그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토중래일 것이다. 권토중래란 당나라 때 시인 두목의 "제오강정"이라는 제목의 시에 나오는 권토중래미가지捲土重來未可知에서 유래한 말로, 자신을 지지해 준 강동의 유지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죽음을 택한 항우에 대해 당장의 굴욕을 참고서 강동으로 돌아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면 결과는 알 수 없지 않았겠느냐며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당장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보다는 참고서 다음을 기약하라. 실제 강동은 항우가 죽고서도 상당기간 유방의 군대에 대하하고 있기도 했었다. 두목 역시 나처럼 항우의 인간적인 매력에 매료되었던 터라. 당장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행동에 옮기는 것은 한 마디로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노자 역시 가장 큰 지혜는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大智若愚고 말하고 있거니와 원래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지혜란 주어진 상황을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지 일부러 드러내어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지혜란 이롭고자 하는 것이지 지혜 그 자체로써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리하다면 물러서는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멈추는 것이다. 상대가 강하고 내가 약하다면 굽히는 것이다. 이로운 것이 없다면 굳이 이로움을 취하려 할 필요 없다. 모자르면 모자른대로, 불리하면 불리한대로, 손해를 보면 손해를 보는대로, 그래서 상대가 나를 낮추어 보고 틈을 보인다면 그것을 노려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만일 상대가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로써 안전은 도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많고 기회는 언제고 돌아온다.
영화 "쉐인"에서도 쉐인은 악당 앞에 비겁하기만 한 아버지에 대해 경멸하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아버지야 말로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다."
뒤가 없다면 용기를 내도 좋을 것이다. 반드시 이길 수 있다면 불의에 분노하여 용기를 내봐도 좋을 것이다. 아니더라도 지켜야 할 것이 없다면 목숨을 걸어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차라리 당장의 굴욕은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한 희생이라 할 것이다. 분노조차 할 수 없다는 비겁이야 말로 자신의 용기마저 희생하는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싸워야 한다면 당연히 싸워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면 당연히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굳이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잠시의 비겁함으로, 잠시의 어리석음으로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더 큰 손해와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면. 사람은 때로 비겁해져도 좋은 것이다. 때로 어리석은 것이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불리한 가운데 이로움을 얻자면 스스로 비겁해지고 어리석어지는 것으로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어 노려볼 수도 있는 것이고.
비겁할 수 있는 것. 어리석어질 수 있는 것. 하찮아질 수 있는 것. 업수이여김을 감당할 수 있는 것. 기다릴 줄 아는 것. 큰 뜻을 품었기에 작은 것을 무시할 수 있는 것. 어리석은 척 하라는 것은 지혜로우라는 것이다. 미친 척 말라는 것도 지혜로우라는 것이다. 가장 큰 지혜에 대한 계명, 병법삼십육계의 27번째 가치부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