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世

[스크랩] 제28계 상옥추제

kongbak 2012. 1. 15. 22:59

[병법삼심육계] 28계 상옥추제...

假之以便 唆之使前 斷其援應 陷之死地 遇毒 位不當也
거짓으로 편하게끔 하고 부추겨 앞장서게끔 만든 뒤 그 뒤에 돕고 호응하는 것을 끊어 고립시키면 사지에 빠지게 된다.

뒤의 遇毒 位不當也은 주역의 화뢰서합火雷??괘에 나오는 "六三 ??肉 遇毒 小吝 无咎. 象曰 遇毒 位不當也"에서 발췌한 것이다. 풀이하자면,

"
마른고기를 씹는데 독을 만난 것이니 조금 인색하나 허물은 없을 것이다. 상이 말하기를 독을 만나는 것은 그 지위가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화뢰서합이란 불을 뜻하는 감괘가 위에 있고 번개를 뜻하는 진괘가 아래에 있는 괘인데, 불은 명징함을 뜻하고 번개란 단호함을 뜻하기에 어둠고 탁하고 악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벌하여 바로잡는 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합의 괘를, "?? 亨 利用獄"라 하여 옥을 쓰는 것이 이롭다 하는 것이었다. 옥이란 아다시피 죄인을 벌하는 기구다.

화뢰가 서합이라 불리운 이유도 그것이다. 마른고기는 거친 것이다. 거칠고 딱딱하다. 그러니 그것을 먹자면 이를다물어 씹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거칠고 마른 세상의 잘못된 이치들도 그같이 씹어 단죄함으로써 순리로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遇毒 位不當也이라 한 것 역시 고기를 잘못 말리면 썩거나 곰팡이가 피기도 하고 또 너무 말라 씹기 곤란할 정도로 딱딱해지기도 하는데, 그것을 두고 아직 죄를 벌하기에는 그 위치나 상황이 좋지 못함을 경고하는 괘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고위정치인 가운데 비리를 저지른 자가 있다. 그런데 이제 갓 임명된 검사가 그 사실을 알고 추적해 조사한다.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초임검사 입장에서도 고위정치인을 상대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지위와 권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배경의 손을 빈다던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도록 유도한다던가,

상옥추제가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내가 상대보다 불리하다. 그러나 상대를 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상대로 하여금 먼저 나서서 움직이도록 함으로써 상대의 유리함을 빼앗는 것이다. 불리함을 드러내고 그 상태에서 뒤를 끊음으로써 고립시키고, 그로써 마른 고기를 씹듯 상대를 벌하여 바로잡을 수 있도록.

그러나 정작 출전을 보면 그와는 조금 다른 뜻으로 <삼국지><제갈량전>의 한 부분에서 비롯되고 있다.

유비가 신야에 머물며 형주의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유표에게는 유기와 유종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기는 원래 유표가 형주로 들어가기 전 전처에게서 낳은 아들로 큰아들이었지만, 유종은 유표가 형주에 정착하면서 정략적으로 형주의 토호인 채씨일족의 여자를 맞아들여 낳은 아들로 외가의 배경도 있고 해서 유기에게는 크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유기가 딱히 유표의 후계 자리를 노리고 유종과 경쟁하려 하지 않아도 유종으로서는 불안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유기에게 어떤 해꼬지를 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직 채씨일족의 힘을 필요로 하던 유표는 그런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유기는 불안했다. 이대로라면 언제 어떻게 채씨일족에 의해 해를 입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적지라 할 수 있는 형주에서 채씨일족의 눈을 피해 유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기는 어쩔 수 없이 그래도 같은 종친이라고 아버지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를 찾아가 방책을 상의했다.

"
아저씨,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유비라고 딱히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유비 역시 여남에서 조조에게 크게 패하고 홀홀단신 유표에게로 도망쳐와 겨우 신야를 얻어 의지하고 있는 터였다. 더구나 전일 유표의 후계문제를 두고 유기의 편을 들었다 채씨일족에 의해 하마트면 죽임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던 터이기도 했다. 유비는 조용히 유기에게 제갈량과 상의할 것을 권했다. 다만 제갈량은 그 장인인 승언이 채씨일족과 관계가 있었기에 그의 도움을 얻자면 약간의 계책이 필요했다.

그 계책에 대해서는 정사와 연의가 전하는 바가 서로 다른데, 어찌되었거나 유기는 마침내 유표의 후계문제에 얽히기 싫어하는 제갈량을 꼬드겨 누각인지 아니면 다락인지 높은 곳으로 함께 오르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리 하인들에게일러 누각, 혹은 다락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치우게 했으니, 제갈량이 상황을 깨닫고 그를 꾸짖어 화를 낼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오늘 위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땅으로 내려가지 못하니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지 내 귀로 들어올 뿐입니다. 부디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상황이 이쯤 되고 나면 아무리 후계문제에 얽히는 것이 꺼려지더라도 더 이상 유기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유기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이며, 그것은 장차 유표에게 의지해 있는 유비에게도 해로울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실권이 없어도 유기는 유표의 큰아들이었다. 유기가 앙심을 품게 된다면 분명 그 피해는 주군 유비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유기에게 짧게 대답해 주었다.

"
공자는 신생이 왕자의 자리에 있어 위태롭게 되고, 중이가 도망쳐 편안하게 된 것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는 춘추시대 진나라 헌공 때, 여희가 자신의 아들인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모략을 꾸며 신생과 중이, 이오의 다른 형제들을 제거하려 한 고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신생은 성품이 충후하여 여희가 모략을 꾸미는 것을 알고는 아버지와 다툴 수 없다 하여 자결하고 있었고, 이오와 중이는 그대로 달아나 각각 진목공과 제환공에 의지해 후일을 기약했었다. 먼저 해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은 이오였지만 진목공과의 약속을 저버린 탓에 마침내 중이가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이오의 아들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문공이었다. 제갈량은 그 고사를 빌어 괜히 남아 있어 위험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당장의 위험을 피하라 조언한 것이었다. 유기는 그대로 따랐다.

마침 그 무렵 황조가 손견이 죽은 일로 오래도록 원한이 깊던 동오의 손권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황조가 죽고 나면 당연히 손권과의 최전선인 강하가 비게 될 터였다. 유기는 나서서 자기가 그 강하로 갈 것을 청했다. 강하를 비워둘 수 없으니 자기가 가서 강하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후계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유표나, 유기에게 적대적이던 채씨일족에게나 모두에게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유기가 성을 나간다니. 이제 유표의 후계는 유종으로 굳혀지리라.

결국 유기는 강하태수가 되어 비록 유표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채씨일족이나 조조의 남하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 유비와 겨루기에는 경륜과 역량 모두가 부족했기에 결국 유비에게 이용당하는 처지가 되어 처음 신야에서 쫓겨오는 유비를 도왔다가 나중에는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는 명분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물론 그렇더라도 유종이나 채씨일족, 혹은 조조에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조선중기 윤원형의 실각을 계기로 새로이 조선의 국정을 주도하게 된 사림은, 그러나 명종의 외척으로 훈구세력에 속했던 심의겸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일찌감치 조정에 출사하여 훈구세력과도 관계가 깊었던 전배와 선조 이후에나 출사하여 상대적으로 훈구세력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웠던 후배로 나뉘게 되었고, 이는 다시 후배였던 김효원의 후임으로 이조전랑 자리에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을 임명하는 문제로 대립하면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정치라는 게 서로 입장차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입장이 다르고 이해가 다르면 서로 무리를 지어 대립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선조 22년 일어난 기축옥사였다. 이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림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선조의 의도와도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당시 동인의 공격으로 환천되어 천인으로 전락했던 송익필이 정여립이 대동계를 만들어 확산시키는 것을 문제삼아 안악군수와 재령군수등을 사주해 그를 역모로 고발하며 일어난 것이었다. 동인에 대한 송익필의 악감정이 개입된데다, 천성이 편협하던 정철이 정치적으로 동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이용함면서 기축옥사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정언신, 최영경 등 거의 천 명이 넘는 인사들이 죽임을 당했으니, 이 가운데는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문인들이 많았고, 특히 호남의 유림은 이로써 맥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이 사건이야 말로 조선의 당쟁이 반정에 환국으로 이어지며 피에 피를 부르는 막장극으로 치닫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정리해 볼 생각인데, 아무튼 동인의 인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죽어나가고, 이산해와 정인홍마저 관직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니 동인 입장에서도 원한이 없을 리 없었다. 당장 서인에게 주도권을 내준 동인은 그 원한을 갚을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오게 되었다.

선조가 원래 서인을 부추겨 동인을 숙청하게 한 것은 사림이 너무 비대해져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것을 꺼려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서인이 너무 강해져 다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산해는 그런 선조의 변화를 알았다.

이산해는 먼저 정철을 부추겨 그로 하여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주청을 드리도록 유도했다. 마침 선조에게는 정궁에게 후사가 없고 후궁에게만 아들이 여럿이라 반드시 후계문제가 일어날 것이니 명분도 적당했다. 미연에 후계를 확정함으로써 분란을 없앤다. 류성룡 등과 함께 한 자리에서 이산해는 자신도 그 문제에 대해 동의하고 있음을 전했고, 마침내 정철이 앞장서서 선조에게 세자책봉에 대해 건의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이산해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산해는 이미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인빈 김씨도 당시 이미 신성군이라는 왕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면 당장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후가 위험하다... 이는 인빈 김씨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위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빈 김씨를 통해 선조에게로 전해지며 선조로 하여금 분노케 하는 이유가 되었다. 과연 신성군 때문에 화를 냈는가, 아니면 서인을 약화시킬 기회가 왔기에 화를 낸 것인가... 어쨌거나 전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자책봉을 건의하려 했던 정철은 그대로 그 불벼락을 맞게 된다.

다만 이때 정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동인 안에서도 갈등이 빚어졌는데, 일단 정철에게 원한이 깊었던 이산해와 정인홍 등은 정철을 죽일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이황계열의 문인들은 그렇게까지 할 것 있겠느냐는 입장이었다. 결국 이것이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는 이유가 되었는데, 정철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남인이 일단 우세하여 피를 부르는 보복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은 탓에 겨우 귀양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동인인 김성일이 전란의 가능성을 축소왜곡한 책임을 물어 동인이 실각하면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다시 권력으로 복귀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때 이산해가 쓴 전략, 즉 정철로 하여금 광해군의 세자책봉문제를 선조에게 건의하도록 하고, 뒤로 다시 광해군의 세자책봉과 이해가 충돌하는 인빈 김씨를 충동질하여 선조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기화로 정철은 물론 서인을 한 순간에 몰아낸 그것이야 말로 상옥추제의 정수라 할 것이다. 정면으로 정철을 치기에는 이미 국정의 주도권이 정철이 속해 있던 서인에게 있었으니, 오히려 정철을 안심시켜 앞으로 나서도록 함으로써 정철의 배후라 할 선조와 충돌케 한 것이었다. 정치란 이렇게 교묘하면서도 치밀하고 잔인하면서 냉혹하다.


흔히 쓰는 견벽쳥야 역시 상옥추제의 한 예라 할 것이다. 견벽청야의 요체는 결국 적으로 하여금 자국의 영토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도한 뒤, 보급을 끊고, 배후를 차단하여 고립된 적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19
세기 초 새로이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항하는 러시아의 전략이 그랬다. 당시 프랑스는 명실공히 유럽 최강이었다. 희대의 천재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자체도 유럽최강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거니와, 이제 유럽의 패자로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으로부터도 10만 이상의 군대를 징발할 수 있었던 프랑스군 앞에 러시아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어 보였다.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과 물자를 모두 징발하려 마련한 나폴레옹의 60만 대군 앞에 러시아의 서쪽을 방어하는 20만 군대는 사소해 보일 뿐이었다. 러시아의 앞날은 결정된 것처럼 보여졌다. 나폴레옹은 불패의 상승장군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쉽사리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현명했으며 냉철했고 인내심이 강한 군주였다. 그는 재빨리 영국과의 동맹을 확인하고 오스만투르크와도 평화조약을 맺는 등 외교적으로 주위를 정비한 뒤 프랑스군을 맞았다. 그리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프랑스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서서히 동쪽으로 물러났다. 심지어 러시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마저 내주며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러시아로 더욱 깊숙이 들어와 지치고 소진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모스크바 서쪽에서 이대로 모스크바를 순순히 내줄 수는 없다는 쿠투조프의 계획에 따라 프랑스 동맹군과 러시아군의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었다. 러시아군은 강했다. 혹독한 러시아의 환경에서 단련된 러시아군은 역사가 증명한 것처럼 인내심이 강했으며 헌신적이었고 용감했다. 프랑스동맹군은 러시아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서야 겨우 모스크바에 입성할 수 있었다. 퇴각하는 러시아군의 뒤를 쫓을 생각도 못할 정도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 얻은 모스크바에는 러시아의 수도라는 상징성 말고 프랑스군이 이용할 수 있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모스크바에는 불이 났다. 크래믈린 궁전마저 불타버릴 정도로 큰 불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집들마저 다시 쓸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곧 강화를 요청해 올 것이라 믿었던 알렉산드르 1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보급품은 한정되어 있었고 러시아의 겨울은 유럽의 그 어느 곳보다 빠르고 추웠다.

결국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보낸 강화요청이 묵살당하자 모스크바를 점령한 지 1개월만에 철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겨울은 닥쳐왔고 보급품은 바닥나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이 러시아군보다 빠르게 프랑스 동맹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추격해 오는 러시아군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당장 자고 일어나면 얼어 죽고 굶어 죽어 있는 시체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몇 차례의 교전에서 형편없이 패주하며 나폴레옹은 마침내 더 이상의 조직적인 전투를 포기하고 프랑스군에 자유행동을 명령했다. 한 마디로 군을 해산해 버린 것이다.

나폴레옹이 가까스로 파리로 귀환했을 때, 그와 함께 한 것은 고작 3만의 병력에 불과했다. 러시아로 침공할 당시 무려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니 95%의 병력이 러시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더구나 이 가운데 대부분이 또 나폴레옹과 함께 유럽의 각지를 누비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역전의 노병들이었던 터라 그 타격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황제가 되어 그에 반대하는 적들과 싸울 때 숙련병의 부족은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길 수 없으면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적을 끌어들여 버티며 기회를 노린다. 물자와 시설은 옮기거나 파괴하여 적이 이용하는 것을 막고, 장차 적이 자신의 근거지로부터 멀어져 자연스레 지치고 약해지면 그때를 노려 마치 늑대와도 같이 물어뜯는다. 한 번 물고 나면 적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고 악랄하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침내 토요토미 히데요리로 하여금 오사카성 여름싸움을 벌이게 한 것이나, 대정봉환 이후 쵸슈와 사츠마의 세력이 쿄토의 막부세력을 자극해 토바 후시미 싸움을 유도한 것이나 비슷한 예다. 도쿠가와에게는 굳이 토요토미를 공격할 명분이 없었고, 삿쵸에게 있어서도 굳이 텐노에게 모든 권력을 양도한 바쿠후를 공격할 명분이 없었다. 어쨌거나 토요토미는 간바쿠였고, 바쿠후는 이미 스스로 권력을 놓고 물러났다. 그러나 도쿠가와와 삿쵸에게는 만일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토요코미와 바쿠후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토요토미를 자극했고, 삿쵸가 주도하는 조정 역시 바쿠후를 자극하고 있었다이대로 계속 참는다면 그대로 몰락할 뿐이라,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와 조정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굳이 대항하기 전에는 공격할 명분이 없지만, 일단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려 한다면 명분이 생긴다. 오사카성 여름싸움은 그렇게 도쿠가와의 도발에 어쩔 수 없이 궁지에 몰린 토요토미에 의해 일어났고, 토바 후시미 싸움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강요를 해오는 조정에 반발하여 바쿠후가 무력으로 저항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결과는 아는 바대로. 도쿠가와나 메이지조정이나 이로써 장차의 불안요인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2002
년 당시 미국의 국무부 차관보 켈리와 북한의 외무부 제 1부상 강석주의 회담 역시 그런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강석주가 한 말은 "이런 것도 가질 수 있다. 이보다 더한 것도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핵무기를 보유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달리 보면 북한에게도 핵무기를 보유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그 발언은 켈리 차관보의 줄기찬 핵무기개발여부에 대한 추궁과 자극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감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 발언을 바로 핵무기 보유사실을 시인한 것이라 확정해 버렸다. 당연했다. 당시 부시행정부는 클린턴이 북한정부와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체결한 협약에 대해 경멸하는 입장이었기에, 북한과 클린턴 행정부가 맺은 협약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깨뜨릴 명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좋았다. 클린턴 행정부의 판단이 잘못되었다. 그 근거만 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아도 협약이행을 미루기까지 하고 있던 상황에 강석주의 그같은 발언은 불감청고소원이었던 것이다. 바로 국제사회에 그것을 알려 북한을 고립시킬 수 있었던.

다만 문제라면 가장 미국에 협조적이어야 했을 남한에 하필 북한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섰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남한에 부시와 보조를 맞춰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동참했을 정부가 들어섰다면 부시의 의도는 성공해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더욱 압박하는 데 성공했을 텐데, 그것이 안 되었으니. 다만 그렇게까지 했을 경우 궁지에 몰린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는 94년의 예를 보더라도 결코 남한에 유리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물론 그렇더라도 태평양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 영향이 갈 일은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단지 북한 핵문제 해결만 몇 년을 더 끌도록 만들었을 뿐.


특정 언론이 특정 대통령을 향해 쓴 방법이라는 것도 이것이었다. 말이란 한 번 나오면 되돌리기 힘들다. 말을 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말을 듣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언론은 그 말의 전달을 맡고 있다. 특정언론은 그 사실을 아주 교묘히 잘 이용했다.

대통령이 말을 한다. 그러면 취사선택하여 그 말의 의미를 부풀리고 비틀고 꺾어 전혀 다른 뜻으로 대중에 전한다. 나중에 다른 경로로 진실이 알려저 사실을 정정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이미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같은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 테니. 한 번 각인된 이미지를 되돌리기란 말을 되돌리기만큼이나 힘들다. 대통령이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러나 말을 하면 그것을 자꾸 부풀리고 비틀어 전혀 다른 뜻으로 대중에 전해 오해하게 만들고, 등돌리게 만들고, 물론 국민이 현명했다면 그런 수작질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정부의 언론장악의도를 보면서도 50%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는 것이 그 수준이라. 어느 나라라고는 않겠다. 요즘 글을 쓰며 주어를 넣으면 유행에 뒤쳐지는 것일 테니까.

상대를 자극해서도 지붕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지만, 이미 지붕위에 올라가고 난 뒤 사다리를 치우는 것도 한 방법인 것이다. 아니면 주위를 깊이 파서 지붕만큼이나 높이 만들어 다시는 내려올 수 없게 하거나. 중요한 것은 상대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미 움직인 뒤이더라도 그 뒤를 끊어 다시 되돌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막다른 길로 몰아 옴짝달싹 못하게 고립시킨다. 그리고 고립된 상대를 명분까지 얻어 차근히 "징벌"하는.

사실 예는 얼마든지 많다. 어쩌면 가장 많이 쓰는 계략 가운데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부추겨 행동하게 만들고 그것을 빌미삼아 상대를 고립시키고, 마침내 스스로 몰락하게 만드는... 특히 정치에서 많이 쓰이는 것은 정치야 말로 명분싸움이기 때문이다. 명분이 없는 정치란 단지 폭력일 뿐이다. 어떻게 명분을 확보하고 정적을 제거하는가. 혹은 군사에서는 적을 스스로 유리한 곳에서 나와 불리한 상황에 처하도록 할 때 쓰인다. 오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쓰요리를 유인하던 것처럼. 아니면 어떤 추리물에서처럼 증거 없이도 범죄자로 하여금 죄를 자백하도록 만들거나.

당장의 불리함이 있다고 그것이 항상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당장의 불리함 가운데도 유리함이 있고, 당장의 유리함 가운데도 불리함이 있다. 내가 불리하여 움직일 수 없으니 상대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만들고, 상대가 움직여 상황이 바뀌면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고, 유리함을 불리함으로 바꾸어 상대를 도리어 고립시키고 궁지로 내모는. 스스로 불리한 것으로 유리한 것으로 바꾸니 반객위주라 할 것이고,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고 있으니 타초경사라 할 것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나를 믿고 상대를 믿고, 뿐만 아니라 주위까지 모두 알고 믿고서, 그 모두의 유기적인 상호작용 속에 이루어지는 스케일의 전략. 병법삼십육계의 스물여덟번째 상옥추제일 것이다. 적을 지붕 위로 올라가게 하여 사다리를 치운다

 

출처 : 네잎 클로버
글쓴이 : 네잎 클로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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