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판내시부사 김처선 / 영화 `음란서생`에 나오는 내시 | |
영화 ‘왕의 남자’에 이은 ‘음란서생(淫亂書生)’의 인기에 힘입어 내시(內侍)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내시에 대한 일반인의 생각은 그저 TV 사극이나 영화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항상 왕을 따라다니며 궁에서 생을 마치는 거세된 남자’ 정도이다. 또 수염이 나지 않은 사람, 구부정한 허리, 움츠린 어깨, 중성적인 목소리, 음흉한 눈초리 등으로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물론 맞는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내시는 ‘왕을 보좌하는 비서관 역할을 하던 거세된 남자 관리’를 가리킨다. 물론 이는 조선시대의 경우이고 고려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구분되어 있었다. 국어사전을 보면 내시는 환관(宦官), 내관(內官), 내수(內 )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서양에도 내시를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싸리쓰’ 그리스어로는 ‘유누코스’로 표기했다. 이는 ‘침실(寢室)을 지키는 자’라는 뜻이고, 영어의 ‘유너크(eunuch)’로 차용됐다. 이러한 내시제도는 기원 전의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로마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과 터키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 서남아시아, 이집트,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일부 국가, 유교문화권인 중국과 한국, 베트남에서만 존재했던 특이한 제도다.
중국 은(殷)나라의 갑골문자에도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내시의 역사는 오래됐다. 거세를 하는 궁형은 사형 다음 가는 중형인데,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부터는 사형을 받을 자 가운데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 본인이 희망을 하면 궁형으로 감형하여 목숨만은 살려주는 관례가 있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연년(李延年)은 궁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에서 내시의 수는 많게는 1만3000명, 적을 때는 3000명이 있었고 10만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 중국에서 환관제도가 가장 번성했는데, 이는 전쟁 포로를 궁형(宮刑)으로 거세시켰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한 폐해도 막심하여 명나라 때는 왕진(王振), 왕직(汪直), 유근(劉瑾), 위충현(魏忠賢) 등 전횡을 휘두르는 환관이 많이 나왔다. 이 가운데 왕진은 금·은을 채운 창고를 60개 이상 가졌고, 위충현은 황제에 뒤지지 않는 호사를 누렸으며 ‘황제 만세’를 본떠서 스스로 ‘구천세’라고 부르게 했다.
▲ 구한말 내시 | |
한국에서의 내시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나오는 ‘흥덕왕 원년(826) 환수(宦竪)’라는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급제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유명한 사립대학인 문헌공도(文憲公徒)를 세운 해동공자 최충(崔忠)의 손자 최사추(崔思諏), 주자학을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安珦) 등은 학문적·관료적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직을 지낸 인물이다. 고려의 내시는 여러 근시(近侍)들과 함께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경전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고려 조정에서 중임을 맡았던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그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2세기 의종 때엔 유신(儒臣)으로 구성된 좌번(左番)내시와 부호집 자제로 구성된 우번(右番)내시의 이원조직이 있었다. 이 중 우번내시가 좌번내시보다 힘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의종조엔 국정이 문란하여 심지어 환관도 내시가 될 수 있었다. 환관 정함(鄭 )과 백선연(白善淵) 등이 당시 내시를 역임한 이들이다. 따라서 과거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에 발탁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적인 관아가 없다가 공민왕 때에 121명의 정원을 가진 정2품 관아로서 독립적인 내시부가 생겼다.
궁형(宮刑·남근 제거형)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자를 내시로 충원했는데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여 인위적으로도 내시를 양산했다. 사고에 의해 내시가 되는 경우는 어렸을 때 개가 어린 아이의 똥을 핥다가 고추까지 잘라먹어 고자가 된 경우인데 이는 극히 드문 것이다. 유계(兪棨)의 ‘시남집(市南集)’에 의하면 북쪽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 중에는 혹독한 병역이나 부역을 면해보려고 부모나 자신이 직접 거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세를 했을까? 유계(兪棨)의 기록에 의하면 명주실을 어린아이의 고추에 돌려 묶어 놓으면 피가 통하지 못해 결국 썩어 떨어져 나간다.
그런데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金東福·77)씨에 의하면 여의도(汝矣島)의 영등포쪽 샛강 근처 ‘용추(龍湫)’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종 34년(1897)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있었다. 당시 시술과정에서 남근 부분은 남겨 놓은 채 정낭 부분만 제거했다.
시술은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많이 했다. 그것은 수술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게 되는데, 이 비명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혹독한 수련과정이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시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언제라도 대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했기에 내시로서의 자질시험 또한 주로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데 집중됐다. 말하자면 얼마나 고문에 잘 견디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정없이 물을 퍼 먹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달아보기도 하였으며, 코에 모래를 넣어 문질러 보는 등 어려운 상황을 견뎌야만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
선발시험 과정을 통과하여 내시부에 들어온 어린 내시를 정식 내시인 내관(內官)과 구분하여 소수(小 ·어린 내시) 혹은 소환(小宦)이라고 했는데, 견습 내시인 이들은 관아에서 수업을 받은 후 실제 업무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수는 모두 90명이었다. 업무에 투입된 어린 내시는 궁궐 청소와 심부름뿐 아니라 왕을 모시는 중요한 임무까지 수행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식 내시가 되면 내시부에 소속돼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이 맡은 주요 업무는 대전(大殿), 왕비전, 세자궁, 빈궁(嬪宮) 등에서 음식물 감독, 왕명의 출납, 궁궐 문지기, 궁궐 안 청소 등이었다. 또 왕실 직영 잠실(蠶室)에 파견되어 누에를 치는 잠모(蠶母)를 관리하는가 하면, 왕릉을 보살피고 왕명으로 관리의 상가에 파견돼 왕 대신 부조를 하며 제사를 지내주는 일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업무를 맡은 내시부의 정원은 16개 관직에 140명이었다. 그러나 이 중에 종 2품의 상선(尙膳)을 비롯해 종 9품의 상원(尙苑)에 이르기까지 관계(官階·벼슬의 등급)를 가진 자는 59명에 불과했다.
그럼 내시는 어떤 식으로 승진을 하였을까? 조선조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살펴보면 내시들은 사도목(四都目)이라 하여 승정원(承政院)에 의해 1년에 4차례 인사고과를 평가받았다. 시험 과목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 사서(四書) 가운데 한 권,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가운데서 한 권을 선택하게 했다. 하지만 35세가 되면 시험을 면제시켜주었다. 이 나이가 되면 공부를 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통해 내시들은 왕을 모시는 보좌관으로서 최소한의 소양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선조조의 내시 이봉정(李鳳禎)의 경우는 왕의 필체를 흉내내는가 하면 원나라 조맹부(趙孟 )의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의 대가이기도 했다. 구한말의 내시 중에는 개인 문집을 남긴 경우도 있었다.
내시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시도 일반 사대부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자녀를 두고 결혼생활을 했다. 이들이 양반 관료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왕실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는 성적으로 불구자였기에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양자(養子)제도를 통해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시의 양자로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양자의 수는 ‘명종실록’에 의하면 많은 경우 한 집에 4~5명까지 있었다.
이러한 내시가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선 진짜 역사와 다르게 표현돼 관객과 시청자의 혼란을 야기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영화 ‘왕의 남자’에서 판내시부사 역으로 나왔던 김처선(金處善)은 연산군 11년(1505) 4월 1일 왕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으나 영화에서는 반정의 기미를 눈치채고 자살한 것으로 묘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