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경대승정권( 1179~1183 ) 고찰

kongbak 2009. 8. 30. 11:05


경대승정권( 1179~1183 ) 고찰


1. 서론
2. 경대승정권 이전
3. 경대승정권의 성립
4. 경대승정권의 도방
5. 경대승정권의 동조자들
6. 경대승정권의 반대자들
7. 경대승정권의 최후
8. 경대승정권 이후
9. 결론
부록 1: 경대승( 1154~1183 )의 연표
부록 2: 경대승정권( 1179~1183 )의 사건

1. 서론

무신정변은 고려의 전기사회와 후기사회를 뚜렷이 나눈 전환점이었으며 무신정권을 탄생시킨 사건이었다. 고려 전기 문벌귀족체제의 폐허에서 출현하여 고려 후기 권문세족체제의 바탕이 되는 이 무신정권은 각기 그 특성상 성립기( 1170년~1196년 ), 확립기( 1196년~1258년 ), 붕괴기( 1258년~1270년 )로 구별이 된다. 그 가운데에서 경대승( 慶大升 ) 및 경대승의 정권은 사료에서부터 그 집권자가 다른 집정 무신과는 달리 평가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질성은 그동안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과연 경대승정권은 어떠한 존재였으며 또한 이전, 그리고 이후의 무신정권에 비하여 어떠한 차이점이 있었을까? 본 장에서는 경대승정권을 간략하게 고찰하며 그와 동시에 경대승정권이 무신정권에 끼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경대승정권 이전

무신정변으로써 처음 성립된 무신정권은 이의방( 李義方 ) 정권이었다. 이의방정권은 무신에게 출사로를 널리 열어주고1) 중방( 重房 )을 국정의 최고 기구로써 강화하는2) 등 무신정변에 참여한 하급 무신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무신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의방정권은 무신, 문관, 승려, 지방 토호 등의 광범위한 반무신란에 직면하게 되었고 마침내 조위총( 趙位寵 )의 난을 계기로 온건파 무신들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이의방정권을 붕괴시키고 등장한 정중부( 鄭仲夫 ) 정권은 새로운 형태의 반무신란과 마주치게 된다. 이미 무신정변 이전에도 민란( 民亂 )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는 고려 문벌귀족체제의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무신정변 자체도 귀족체제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던 일반 군졸 및 농민 등 피지배층의 전폭적인 지지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이들의 여망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로지 문신들의 폐습을 답습하며 한층 더 가혹한 착취를 자행하였다. 무신란과 반무신란으로 이어진 혼란 및 집정 무신들의 탈권( 奪權 ) 투쟁으로 정치가 불안정하자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어 무신 지방관들의 부패가 횡행하였고 그 가운데에서 사회,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아울러 무신정변으로 인해 문벌귀족체제의 신분질서가 붕괴되어 ' 의식화 '된 피지배층이 중앙 통제의 약화를 틈타 봉기를 감행한 것이다.
조위총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서적( 西賊 )이라 불리는 잔당들은 민란의 형태로 활동하여 정중부정권의 최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고 남부지방에서는 남적( 南賊 )으로 통칭되는 석령사( 石令史 ) 및 망이( 亡伊 ), 망소이( 亡所伊 )의 난 등이 일어나 정중부정권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또 정중부정권은 이의방정권과는 달리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그로 인해 하급 무신들의 반발을 야기하였는데 정중부정권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정국이 불안정해지는 결과를 낳았고3) 역으로 이것은 고위 무신들의 정중부정권에 관한 불신감을 낳았다.
4) 그리고 양숙( 梁淑 ) 및 경진( 慶珍 )은 기록 불명이지만 경대승정권 전에 사망하였고 기탁성( 奇卓誠 ), 홍중방( 洪仲方 ), 진준( 陳俊 )이 1179년에 사망해 다수의 온건파 무신들이 죽음으로써 무신들의 과두정치가 정중부, 정균( 鄭筠 ), 송유인( 宋有仁 ), 송군수( 宋群秀 )로 대표되는 정중부일족의 독재로 변질, 가증되었으며 이들의 수탈과 횡포는 많은 반감을 샀다. 그중 정균은 공주에게 장가들려고 하여 명종 및 왕실의 지지를 상실했고5) 또한 정중부정권이 온건노선으로써 기존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는 자체권력을 위하여 행한 것이라 그에 반하는 점에서는 문신들과 마찰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송유인이 한문준( 韓文俊 )과 문극겸( 文克謙 )을 배척함에 따라 절정에 달하였다.6) 이 사건으로 인해 문신들도 등을 돌렸으며 이렇게 여러 계층의 지지를 잃은 정중부정권은 붕괴의 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3. 경대승정권의 성립

1179년 9월, 경대승은 기해정변( 己亥政變 )을 일으켜 정중부정권을 전복시켰다. 이 정변에서 그를 따른 이들은 견룡( 牽龍 )7)인 허승( 許升 ), 김광립( 金光立 ), 김자격( 金子格 )과 결사대 30여 명이었다. 이러한 극소수의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중부정권이 앞에서 나열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정권의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으며 정중부 등이 탈출에 성공하였음에도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보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8)이 그것을 입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서 경대승은 제 2차 숙청에 착수하였다.

왕이 경대승 등을 불러 묻기를, " 이제 정균이 복무하던 승선( 承宣 )의 직임을 장군에게 제수하고자 한다. "하니 경대승이 아뢰기를, " 신는 글을 알지 못하오니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 공이 아니면 장차 누가 좋겠는가? 이부시랑( 吏部侍郞 ) 오광척( 吳光陟 )이 어떠한가? "하니 경대승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 직책 )이니 선비가 아니면 안 됩니다. 오광척이 비록 조금은 문자를 알다고 하나 무관이니 아마 정균과 비슷한 것인가 합니다, "하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오광척이 틀림없이 승선으로 임명될 것을 알고 ( 오광척을 ) 미워하더니, 경대승의 족형( 族兄 )인 장군 손석( 孫碩 )이 평소에 오광척과 원수간이었으므로 경대승을 부추겨 함께 죽여 버리고 드디어 4집의 도당인 장군 김광영( 金光英 ), 지유 석화( 石和 ), 습련( 襲蓮 ), 중랑장 송득수( 宋得秀 ), 기세정( 奇世貞 ) 등을 무찔러 죽였다. -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경대승이 오광척의 승선 임명을 반대하고 오광척 및 정중부정권의 잔당들을 제거하였다는 내용이다. 오광척은 역시 경대승과 함께 무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던 고위층 출신 무신이었으며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고 무관들은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인물9)로 경대승과 비슷한 성향의 인물이었다. 어쩌면 오광척은 경대승을 도와 기해정변에 동참하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명종이 경대승과 함께 요직인 승선 임명을 거론할 정도였으니 설령 정변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새로운 정권에서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이러한 오광척을 경대승은 살해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자료에서 봤듯이 자신의 경쟁자를 꺼려해서였으며 손석이 부추긴 것은 부차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경대승의 잠재적인 경쟁자였고 어쩌면 경대승과 비길만큼의 인물이었을지도 몰랐던 오광척이 제거되었다. 아울러 경대승은 정중부정권의 잔당들마저 제거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대승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10) 그리하여 경대승은 사병조직인 도방을 창설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대옥사를 일으켜 의심가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너무나도 지나친 나머지 명종이 사면령을 내려서 인심을 진정시킬 정도였던 것이다.11) 이렇게 경대승은 도방을 기반으로 하여 독재정치를 시작하였다.

경대승의 문객 한 사람이 길에서 양가집 자제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법관이 체포하여 치죄하려 하였으나 경대승이 극력 주선하여 무사하게 만들었다. 허승과 김광립 등도 경대승과 같이 공 세운 것을 믿고 교만을 부리면서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였다. 또 왕태자에게 친근하게 시종하면서 태자궁( 宮 ) 후면 벽에서 누워 자며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풍악을 치는 등 방약무인의 행동을 하므로 경대승이 그들을 꺼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허승을 자기 집으로 불러다가 죽이고 김광립을 도중에서 만나 선 자리에서 죽였으며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는 한편 왕에게 고하기를, " 허승 등이 방자하여 저를 죽이려 할뿐만 아니라 반역까지 음모하고 있었는바 사정이 절박하여 미처 보고할 사이가 없어서 이미 죽였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근신을 시켜서 위로의 말을 전하였으며 재상 이하는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축하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 치하하니 경대승이 저으기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 두었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위 사료도 역시 경대승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한 행동으로써 경대승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경대승은 반대파에 대해서는 잔인한 탄압을 행하였다. 그러나 소수인 그의 세력으로써 다수의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기에는 힘이 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측근들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었으며 그들이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러도 방관 내지는 비호하는 등의 보신주의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경대승이 그의 측근조직에게 과도하게 의지한 사실은 오히려 내부에서 그 자신과 대항할 수 있는 세력들을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자신의 일인독재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경대승은 이들을 가차없이 숙청하였다. 경대승정권에서의 실력자들이라 볼 수 있는 오광척, 허승, 김광립의 최후를 살펴본다면 경대승이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인물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제거해 버렸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 이는 경대승의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의 단면이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볼 수 있다. 비록 경대승의 노력은 그 당시 상황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뒤를 이은 최충헌( 崔忠獻 )은 경대승의 선례를 본받아 일인독재체제를 견고하게 쌓아올리게 되는 것이다.

4. 경대승정권의 도방

초기 무신정권의 집정부는 중방이었다. 중방은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구성된 합의체 기구로써 무신정변 후에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무신들은 이 중방을 기반으로 하여 과두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정중부정권에도 이러한 정국은 변함없었다.12) 경대승은 이런 정치구조에 처음으로 도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소수의 세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관계로 세력이 미약하였으며 또한 그가 내세운 복고의 뜻으로 인해 무신들의 반감을 조성하여 이런 상황에서 무신들의 합의체 기구인 중방이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나아가서는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취약한 세력을 조직적으로 보강하여 반대세력과 대처해야 하였으며 그러한 까닭으로 도방( 都房 )이 창설되었다. 자료에서 볼 수 있는 도방의 행동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경대승이 겁이 나서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모집하여 집안에 두고 불의의 사변에 대비케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도방이라 불렀으며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주고 주야 교대로 일 숙직을 하라 하였으며 혹은 자기도 그들과 한 이불 속에서 자면서 성의를 보였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2) 경대승이 정중부, 송유인 등을 처치한 후로는 항상 마음이 불안하여 언제나 몇 명의 문객을 거리로 보내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는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11월

(3) 그 때에 서울에는 도적이 많이 생겼는데 자칭 경대승의 도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니었다. 법관이 이런 자들을 잡아 가두면 경대승이 즉시 석방시켰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아무 꺼림 없이 공공연히 약탈을 감행하였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월

(4) 또 경대승과 도방 사람들이 제각기 꺼리는 자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겁이 나서 자기 집 문전 골목밖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경비했다. 이것을 여문( 閭門 )이라 했는데 서울 방리( 坊里 )마다 모두 이를 모방하여 문을 세웠다. - 고려사 열전 이의민,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월

(5) 처음 경대승이 정중부를 처단할 때 견룡 김자격의 협조한 힘이 많았으며 경대승이 그를 사랑하여 도방을 통솔하게 하였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13년 8월

(6) 경대승이 죽자 도방에서 돈을 추렴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해산을 앞두고 전원이 다시 모여 술을 마시었는데 김자격이 이것을 구실로 삼아 왕에게 무고하기를, " 경대승의 도방이 이따금 집합하는 것은 앞으로 반란을 음모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평소에 경대승을 꺼리고 있었으므로 중방에 명령하여 대장군 정존실( 鄭存實 ), 오숙( 吳淑 )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죄케 하였다. 만일 도방 명단에 이름이 실린 자라면 모조리 체포하였다. 그 중에 혹 도망가서 숨은 자가 있으면 그의 보모 처자나 일가 친척들을 붙잡아다가 곤욕을 주었으므로 숨었던 자도 부득이 자수하거나 혹은 자살하였다. 그래서 무릇 6십여 명을 체포하여 가두고 또 다시 정존실 등에게 지시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게 하고 그의 도당들을 엄중 수색하게 하면서 일변으론 내관( 內官 )을 보내어 고문을 가혹하게 하는가 안 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다. 이런 까닭에 매질과 고문이 너무 혹독하였으며 모조리 먼 섬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부분이 도중에서 죽고 생존자는 불과 4, 5명이었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13년 8월

사례 (1), (2)를 보면 도방은 상기한 적대하는 무신세력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해 창설된 사병 조직으로 신변보호 및 탐문수사로써 정권보호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도방은 사례 (2), (3)과 같이 경대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권세를 휘둘렀으며 권력남용 및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폐단을 보였고 아울러 사례 (4)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무신들의 방어태세를 야기하여 정치불안이 더 확대되었다. 그리고 사례 (5)를 보면 국가의 군대인 견룡이 도방에 소속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 사실은 경대승정권의 자체 모순을 설명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자료들을 종합해본다면 도방이 비록 그 이전의 사병들보다 조직적인 기구로써 정권유지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무신수령의 집정부가 아니라 단순한 무력기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직 집정 무신의 권력장치는 미숙하였으며 집정 무신이 중방을 약화시키고 스스로의 집정부를 창설하려면 최충헌정권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방은 사례 (6)에서 봤듯이 경대승 사후 해체되지만( 무고로써 도방 해체에 기여한 김자격은 얼마 후 유배됨으로써 토사구팽의 말로를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 최충헌이 집권하자 부활하였고 확대 개편되었으며 최씨막부로 대표되는 확립기 무신정권의 기초가 되었다. ' 복고의 뜻 '을 지향했던 경대승으로써는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였다.

5. 경대승정권의 동조자들

경대승은 이제까지의 무신정권 가운데에서 가장 열세의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까닭은 누누이 언급하였듯이 경대승 자신이 반무신정변과 반무신정권의 모습을 보여주여 이에 참여하는 무신세력이 적었던 탓이며 이러한 경대승이 정중부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정중부정권 말기 정권의 기틀이던 온건파 무신들의 사망 및 급진파 무신세력13)이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아 생긴 권력의 공백 상태를 재빨리 포착하여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대승정권도 나름대로의 지지기반은 있었으며 정권의 특성을 활용하여 지지세력을 찾아내었다. 그것들을 찾아본다면 아래와 같다.

(1) 견룡 허승은 용력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복종하게 되었으며 정균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허승과 대정 김광립, 김준익( 金俊翼 ) 등은 모두 경대승과도 사이가 좋았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2) 이소응( 李紹應 )의 사위는 경대승의 동생이다. - 고려사 열전 박제검( 朴齊儉 ), 고려사절요 명종 11년 10월

(3) 무인들의 불법에 분개하고 개연( 慨然 )히 복고의 뜻 있었으매 문관들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 고려사절요 명종 13년 7월

사례 (1)은 경대승정권을 직접적으로 보위하는 무력집단으로 볼 수 있다. 경대승은 정변 이전 금군( 禁軍 )의 행수( 行首 )로써 활동했었으며14) 이 경력은 윗 글의 사례와 같이 견룡군들과 경대승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경대승은 이들 무력집단을 이용하여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고15) 비록 허승이나 김광립처럼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김자격과 같이 경대승정권의 수호자로써 활동하였다. 이들은 도방에 관한 설명에서 살펴보았듯이 경대승이 모집한 사병들과 더불어 중요한 도방의 구성원이 되었고 이를 지휘하기까지 하였다. 사례 (2)는 경대승의 인척 및 그 인척관계의 정체를 말해준다. 경대승의 가문은 그의 부친 경진에서 봤듯이 대표적인 고위층 출신 온건파 무신이었으며 역시 같은 온건파 무신인 이소응과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러한 관계는 가문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유지시켜 주었고 경대승이 금군의 행수가 되게 도와준 요인이기도 하다. 그 외의 인척으로는 오광척 숙청에 협력했던 손석, 경진의 사위인 김준( 金晙 )이 보인다.( 김준은 최충헌정권에서 재상의 반열에까지 이른 인물이기도 하다.16) ) 이런 폭넓은 인맥관계는 경대승에게도 도움을 주었으리라 능히 짐작된다. 또한 역시 같은 온건파 무신인 최충렬( 崔忠烈 ), 이광정( 李光挺 ), 두경승( 杜景升 ), 문장필( 文章弼 )도 경대승정권의 인사발령에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17) 이들 또한 경대승과 가까운 계열의 인물로써 당시 중방을 배경으로 활동하고 있는 경대승 적대세력의 견제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사례 (3)은 문신들로써 이 또한 경대승정권에서 처음 보이기 시작하는 일이다. 무신정변은 고려왕조의 정치질서가 전복되는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고려왕조의 주도세력은 문벌귀족문신에서 무신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문신들이 완전히 거세된 것은 아니었고 무신들보다도 많은 수의, 그리고 고위의 관직을 점하고 있었으며18) 정치의 주도권은 무신에게 넘겨주었으되 문신들은 무신정권에서 계속하여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무신들의 계속되는 경계, 견제와 압박, 탄압에 시달렸으며 문신들의 활동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의방정권에서 보이는 반무신란에 따른 보복행위 및 출사로 축소와 정중부정권에서 보여지는 주로 중방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탄압 등이 그것이다. 아직 성립기 무신정권에서는 반무신세력이 온존하고 있었으며 무신들은 정변으로 인해 생긴 기득권을 수호하고자 이를 억누른 것이다. 경대승정권은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경대승 자신이 복고의 뜻을 가지고 반무신정권의 행동을 보였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또한 그에게 적대하는 무신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문신들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들 문신들은 무력은 없었지만 경대승정권을 정당화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되는데19) 문신 포섭의 소산으로 꼽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신들에 의하여 저술된 [고려사] 열전 경대승일 것이며 이 자료 곳곳에는 경대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엿보인다. 또한 무신들을 억누르고 문신들을 대우하는 이 정책은 이후 최씨정권에서도 사용하여 정권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농민 및 피지배층은 과연 경대승의 정권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경대승에 관하여 호의적인 자료들은 여럿 존재하지만 그 자료들은 문신들의 시각으로 짜여져 있어 피지배층이 보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알기 힘들다. 간접적으로 보건대 경대승정권( 1179년 9월~1183년 7월 ) 동안 민란은 정권 후반기인 1182년에 이르러서야 발발하였고 그 또한 산발적이고 고립된 민란이었다. 이런 사실을 볼 때에 경대승정권은 이의방 및 정중부정권과 비교해본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듯 싶으며 이는 경대승정권의 복고적 성격에 백성들이 부응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검토해볼 때 경대승정권이 취한 정책은 아주 무모한 행위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가 열세인 세력에도 불구하고 집권할 수 있었고 당시 성장하고 있는 무신정변 참여 무신세력과 단기간이나마 능히 맞서 정권을 지켜 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정책들에서 기인한 것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경대승은 권력에만 몰두한 기존 무신정권들과는 다르게 최초로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해진 상황을 종식시켜야 할 정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비록 구체성을 결여한 대안이나마 제시를 하였으며( 이는 최충헌의 봉사 10조로써 구체화된다. ) 더 중요한 것은 그 대안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최충헌은 경대승의 대안을 구체화시켜 봉사 10조를 작성하긴 하였지만 전혀 실천하지 않았고 단지 정권정당화의 도구로써만 이용하였을 뿐이다. ) 복고정책은 후술하듯이 시대착오적 성격 및 경대승정권의 모순, 후속 조치의 결여 등으로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이 처음으로 사회안정을 위한 수습책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모습이 보여지는 바이다.

6. 경대승정권의 반대자들

경대승정권은 이전의 무신정권들과는 색다른 체제였다. 우선 경대승정권 자체가 무신정변을 부정하였고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하였으며20) 그때까지 무신의 합좌기관이었던 중방과 대립하는 도방을 세워 이를 바탕으로 독재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대승은 문신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성립기 무신정권의 특징인 중방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치 및 문신탄압에 어긋나는 것으로써 오히려 확립기 무신정권의 일인독재체제에 가깝다 볼 수 있으며21) 이러한 경대승의 정책은 자연히 무신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경대승정권의 반대자들은 아래와 같다.

(1) 무관 중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 정시중( 鄭侍中 )이 선참으로 대의의 깃발을 들고 문관을 억압하여 우리들이 여러 해 쌓였던 분을 풀어 주어 무관의 위력을 과시한 공이 막대하거늘 이제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대신 4명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처단하려는가? "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2) 중서성령사( 中書省令史 ) 석구( 石球 )를 섬에 귀양보냈다. 석구는 송유인의 가신으로써, 송유인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고 요언을 조작하여 민중을 현혹시키고 난을 일으킬 것을 음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귀양보낸 것이다. -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3) 경대승이 정중부를 처단한 후 조정 관원들이 예궐( 詣闕 )하여 축하할 때 말하기를 " 임금을 죽인 놈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 "라고 하였다. 이의민이 이것을 듣고 크게 겁이 나서 자기 집에 용사를 모아 두고 경비했으며 또 경대승과 도방( 都房 ) 사람들이 제각기 꺼리는 자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겁이 나서 자기 집 문전 골목 밖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경비했다. 이것을 여문이라 했는데 서울 방리마다 모두 이를 모방하여 문을 세웠다. 11년에 이의민이 형부상서 상장군으로 되었다. 지난 때에 경대승이 허승을 죽였을 때 이의민이 병마사로서 북방 국경 지대에 나가 진수하고 있었던 바 어떤 사람이 나라에서 경대승을 죽였다고 잘못 전달하였더니 이의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 내가 경대승을 죽이려다가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이 일은 누가 꾸몄을까? 나보다 손이 빠르구나! "라고 하였다. 경대승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이의민이 돌아 와서는 겁이 나서 불안을 느끼고 병이라는 핑계로 고향으로 떠나갔다. 이의민은 왕이 여러 번 소환해도 오지 않았으며 그 후 경대승이 죽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 고려사 열전 이의민

(4) 경대승이 집권하여 악당들을 거의 다 처치할 때 이영진( 李英搢 )이 위축하였다가 경대승이 죽은 후 또 행실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 고려사 열전 이영진, 고려사절요 명종 21년 10월

(5) 왕이 내심으로는 경대승을 꺼리었으나 외면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베풀어 날마다 진수성찬과 의복, 보화를 주며 그의 청하는 일이면 좋지 않은 일이라도 허락 아니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사료에 나오는 경대승의 반대파로써 먼저 경대승정권에게 도전한 세력은 온건파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사례 (2)에서 보듯이 정중부일족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그런 관계로 경대승정권의 직접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 자라도 사례 (1)과 같이 무신들이 누리던 기득권 상실을 우려하여 저항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정권에서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된 것은 바로 사례 (3), (4)의 급진파 무신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하층계급 출신으로써 무신정변 이후 사회변화에 편승하여 등장하였으며 이의방정권에서 크게 성장하였으나22) 그런 관계로 보수적 성향을 띤 정중부정권에서는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23) 급진파 무신들은 이에 정중부정권에 불만을 품였으며 이는 정중부정권 와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대승정권이 성립된 후 그들의 지위는 더욱 불안해졌다.
경대승은 고위층 출신이었으며 복고의 뜻을 지향한 인물이었고 이의민, 이영진은 각각 천민 내지는 생선장수, 즉 하층계급 출신으로 그들의 정치적 존재가 경대승의 정책과는 처음부터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기존질서를 상징한다 볼 수 있는 국왕을 시해했던 이의민은 그 존재 자체가 체제의 파괴자였고 따라서 경대승은 이의민의 제거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은 급진파 무신세력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기는 하였으나 끝내 이들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 증거로 경대승정권의 인사발령에서 급진파 무신세력의 일원이던 최세보( 崔世輔 ), 조원정( 曹元正 )의 이름들이 보인다.24) 급진파 무신들은 계속하여 경대승정권의 가장 큰 경쟁상대가 되었으며 이후 경대승정권의 뒤를 이어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례 (5)에 나오는 명종 또한 비슷한 이유에서 경대승을 꺼리고 있었다.
명종도 무신정변으로 인해 즉위할 수 있었던만큼 무신정변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경대승의 정책이 계속된다면 명종의 정통성마저 흔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고 이는 곧 왕위상실의 위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명종의 우려도 과히 틀리다고는 볼 수 없었으니 명종은 그 후 최충헌, 최충수( 崔忠粹 ) 형제에 의하여 폐위되고 말았다. 경대승이 과연 명종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도 엄연히 건재하고 있던 무신정변 참여 무신세력들의 존재로 보건대 경대승이 명종을 폐위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
그리고 명종도 경대승의 정책이 가져다주는 권위회복25)이 필요했기에 둘의 공존이 성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점은 언제든지 자신의 왕위를 부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명종은 전전긍긍하여야 했으며26) 더 확실한 왕위보장을 위해서 같은 사회변화의 산물이었던 급진파 무신세력에게 기울어지게 되었고 경대승 사후 그 잔여세력들을 철저하게 말살한 뒤 이의민정권 성립을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명종의 공동운명체였던 이의민정권이 쓰러진 후 최충헌, 최충수 형제는 대대적인 숙청을 행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해버린 후 명종을 폐위시키고 독재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여기서 경대승정권과 최충헌정권의 차이점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경대승은 정중부정권 이전부터 분열되고 약화된 온건파 무신들은 쉽사리 배제할 수 있었던 반면27), 급진파 무신들에 대해서는 별 손을 쓰지 못하였다. 무신정변에 참여한 무신세력은 사회의 변화에 맞춰 점점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커지고 있었으며 이미 그들은 경대승의 손을 넘어서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경대승은 이런 추세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끝내는 실패하고 병사하였으며 급진파 무신인 이의민이 집권하였다. 이후 시대 흐름에 따른 세대교체로 인하여 최충헌에게 무너질 때까지 이의민정권은 최후의 성립기 무신정권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7. 경대승정권의 최후

경대승정권은 심복인 도방의 구성원들, 견룡군, 경대승의 일족 및 고위층 출신의 온건파 무신 일부, 문신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집권하였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대승정권은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중방을 중심으로 하는 무신들의 도전에 맞서야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도방을 조직하여 강압책을 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중방의 세력은 점점 강화되어 갔다.
경대승정권의 붕괴요인을 들어본다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경대승정권 자체의 모순이다. 경대승은 그 자신이 복고의 뜻을 가지고 정변을 일으켰으며 집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복고책은 경대승정권의 강점이기도 하였으나 단점이기도 하였으니 경대승의 집권 및 그의 도방조직, 다시말해 경대승정권 자체가 그 복고의 뜻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경대승도 어쩔 수 없는 ' 시대의 아들 '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열전에 나오는 기록인 " 사직하고 집에 있었으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궐로 나가서 결정을 내렸다. "라는 기록에서 그의 모순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당대에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별다른 관직 없이 집정 무신의 지위만 유지하는 최씨 막부체제 관습의 기원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경대승의 움직임 자체가 그의 정책과는 맞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스스로가 자신의 정권에 이러한 주박( 呪縛 )을 걸고 만 셈이다. 이러한 모순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 때문에 경대승 자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그런 까닭에 경대승정권의 영향력은 충분히 미치지 못하였고 이는 그 다음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두번째는 경대승정권의 민생안정 노력의 결의이다. 전술하였듯이 경대승정권은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국정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였고 또한 경대승은 적대세력 탄압 및 자신의 신변보호, 다시 말해 정권안보에만 주력을 했던 반면 무신정변 이후 점증된 공사문란( 公私紊亂 )을 막을 전면적인 방책을 수립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 부정부패나 인사문란 같은 무신정권의 고질적 폐해의 뿌리를 뽑지 못하였다.( 오히려 당시에 나오는 부정부패의 기록들은 주로 경대승정권의 동조자들에 대한 것이다. ) 여기서 경대승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그는 복고의 뜻을 천명했으며 또 실행하였으나 그 대상은 정권의 지지세력인 문신 및 온건파 무신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었고 자신의 권력유지 이상의 행동으로는 더 나아가지도 못했고, 나아가지도 않았다. 이런 점에서 기존 질서의 틀에서 강압적인 행동을 통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던 경대승정권은 보수 내지는 반동적 정치성향을 지녔다 할 수 있다.

(1) 그 때 정사는 다 권세 있는 집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경( 奔競 )과 뇌물이 ( 당연한 일처럼 여겨 ) 다시 염치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무신으로서 기세( 氣勢 )가 있는 자는 제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여 벼슬자리를 차지하게 하는데, 만약 관을 얻지 못하면 집정( 執政 )자의 집에 가서 갖은 말을 다하여 다투고 따지니 집정자가 다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곤 하였다. 총재 민령모( 閔令謨 )는 성질이 우둔하고 비겁하여 젊어서 몸가짐에 결점이 있었으며 판병부( 判兵部 ) 이광정은 완고하고 탐욕스러워 무식하였다. 그런 까닭에 전주( 銓注 )가 함부로 되므로 이러한 주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급하여 중지시킨 자도 역시 각각 뇌물을 써서 못 하는 일이 없었다. - 고려사절요 명종 11년 1월

(2) 이에 앞서 지난 무술년 재상 송유인, 이광정 등의 건의에 의해 10도( 道 )에 찰방사( 察訪使 )를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지방 관리들에게 상벌을 적용하게 하였는데 그 때 장물죄에 걸려서 관직을 빼앗긴 자가 990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이 은 50여 근을 공동으로 거출하여 정중부에게 뇌물 주고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정중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채 실권을 하였다.
이 때로부터 권세 있는 고관들에게 뇌물을 크게 먹이면서 이름을 빼달라고 하였으나 국가 법령을 공공연히 위반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성명을 삭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 집권자들이 말을 꾸며, " 천벌이 빈번하고 거짓말이 더욱 많이 떠도는 것은 다 억울한 죄명을 쓴 자들이 있기 때문 "이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의 죄를 용서한 것인데 대각( 臺閣 )에서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리를 아는 인사들은 이를 탄식하였다. -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11년 9월

사례 (1), (2)에서 보듯이 경대승정권의 중반기부터 다시 부패가 횡행하였고 경대승정권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으며 때에 따라서는 묵인, 조장하는 행태까지 보였다. 물론 이러한 부패를 시정하려는 노력도 했지만28) 근본적인 대책 없이 오로지 힘에 의존하는 경대승정권의 고식책은 도리어 도방의 행동에서 봤듯이 사회불안만 일으켰으며 재개된 지방관들의 착취는 중앙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백성들의 인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와 재차 민란이 발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182년 2월에는 관성( 管城, 현 충북 옥천 )과 부성( 富城, 현 충북 서산 )에서 민란이 발발하였고 3월에는 전주에서 죽동( 竹同 )의 민란이 발발하였는데 이 반란은 전라도 전 군대의 토벌에도 불구하고 40여 일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자중지란이 일어남으로써 간신히 진정이 되는 등의 강한 세력을 드러내었다.
이들 민란으로 인하여 열세였던 경대승정권은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세번째는 경대승 자신의 독재 때문이다. 경대승은 서술한 것처럼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온건파 무신들 일부의 협조 내지는 묵인에 힘입어 정중부정권을 몰락시킬 수 있었고 다수인 급진파 무신들과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경대승은 앞서 봤듯이 일인독재를 위해서는 잔인하게 경쟁상대를 타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무신들의 과두체제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런 까닭에 온건파 무신들과도 소원할 수 밖에 없었다.29) 경대승이 온건파 무신들과 연계를 보이는 기록이 거의 없으며 게다가 경대승과 비슷한 계열의 두경승과 문장필 등이 경대승정권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의외로 경대승집권기에 그들의 활동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경대승정권 몰락 이후 대부분은 이의민정권에서도 계속 활동한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비록 온건파 무신은 경대승에게 적대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이로 인하여 그는 고립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뿐만 아니라 급진파 무신 적대세력이 다수로써 엄연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그것은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결정적으로 경대승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네번째는 경대승정권에 대항하는 세력의 성장이다. 경대승정권의 주요 반대자들로는 무신정변 참여 무신들로써 이들은 아성( 牙城 )인 중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대승정권 때에 중방의 활동을 [고려사]에서 간단히 보면 다음과 같다.

(1) 중방에서, " 연말에는 무슨 변이 생길 것 "이라는 요망스러운 말을 듣고 대단히 두려워서 금군( 禁軍 )을 시켜 칼을 뽑아들고 왕궁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왕의 곁에 있던 환관으로써 도망치고 숨은 자가 태반이었다. - 고려사 명종 9년 12월
(2) 새로 지은 강인전( 康仁殿 )이 완공되었다. 이 전에 정문 현판을 향복( 嚮福 )이라고 하였었는데 그 정문이 중방 동쪽 모퉁이와 접근해 있었으므로 무관들의 의견에, " ' 향복 '은 ' 항복 '과 음이 비슷하니 대개 문관들이 이것으로써 무관들을 위압하려 항복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그 현판을 고치자고 청하였다. 왕이 평장사 민령모( 閔令謨 )에게 명령하여 영희( 永禧 )로 고치게 하였더니 무관들이 서로 또 말하기를, " 문관들의 생각을 측량할 수 없은즉 ' 영희 '에 따로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희( 禧 )는 복 희 자이나 영( 永 )자 뜻의 길흉( 吉凶 )을 알 수 없고 중( 重 )자는 본방( 本房 )의 명칭이니 중희( 重禧 )로 고치기를 청합니다. "라고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쫓았다. - 고려사 명종 10년 11월
(3) 재추( 宰樞 ), 대간( 臺諫 ), 중방 관원들이 경시서( 京市署 )에 모여서 말( 斗 )과 휘( 斛 )을 검사하고 간상( 奸商 )을 검찰하였다. - 고려사 명종 11년 7월
(4) 중방에서 밤마다 장군 1명이 부하 장병을 지휘하여 궁문 바깥과 베개 요소에 복병을 하여 놓고 불의의 사태를 방비하도록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쫓았다. - 고려사 명종 11년 7월
(5) 의종의 화상을 효안사( 孝安寺 )로 옮겼다. 처음에 서쪽에 있는 해안사( 海安寺 )에 화상을 두었었는데 이 때에 와서 무신들이 의논하기를 의종은 무인을 원수로 여겼으니 그 화상은 무방( 武方 )에 두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드디어 왕에게 제의하여 성 동쪽에 있는 오미원( 吳彌院 )을 선효사( 宣孝寺 )로 개칭하고 거기에 진전( 眞殿 )을 지어 의종의 화상을 옮겨 오고 해안사는 중방의 원당( 願堂 )으로 지정하였다. - 고려사 명종 11년 12월
(6) 중방에서 동반( 東班 )의 관직을 줄이라고 하였다. - 고려사 명종 13년 5월
(7) 경대승의 도방에 속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모두 먼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 고려사 명종 13년 8월

이 자료들을 본면 사례 (1). (4)에서는 경대승정권이 성립된 후 무신들의 불안감을 엿볼 수 있으며 사례 (2), (5)에서는 경대승정권의 지지자였던 문신들 및 복고정책을 견제하는 중방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사례 (3)에서는 여전히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정부기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제활동에까지 간여하는 중방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비록 경대승의 권력기구인 도방과 대비되는 바이며 그가 중방과는 독자적인 행보를 시도했지만 경대승정권에서의 주요한 기구는 역시 중방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례 (6)에서는 경대승정권에 대한 중방의 결정적인 우세를, 마지막으로 사례 (7)에서는 경대승정권에 대한 중방의 최종적인 승리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 이미 무신정변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불러온 만큼 경대승의 엉성한 방식으로써는 시대의 흐름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대승은 1183년 7월 30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죽음은 아래 기록과 같다.

경대승이 홀연 꿈에 정중부가 칼을 들고 호통치며 달려드는 것을 본 후에 병을 얻어 죽었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이 기록을 본다면 경대승의 최후 순간까지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무신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상기한대로 중방이 경대승정권 말기에는 그의 세력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살펴본다면 경대승은 병사하였지만 만일 그가 병사하지 않았더라도 필경에는 중방의 무신세력에게 타도되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그 자신도 알 수 있었을 터이고 그런 불안감 때문에 병사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만일 그렇다면 기록에 나온 경대승의 죽음은 경대승정권 최후의 정세를 일러주는 암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8. 경대승정권 이후

경대승 사후 무신정권은 다시 중방의 과두정치로 복귀하였다. 이후 이의민정권으로 대표되는 무신정변 참여 무신세력은 누구보다도 많이 무신정변의 수혜를 받은 집단들으로써 기존 질서에서 크게 일탈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30) 이러한 점으로 인해 이의민정권은 보수 고위층 무신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31) 끝내 최충헌, 최충수 형제가 일으킨 정변으로 붕괴되었다. 경대승의 정책은 최충헌에게 계승된다. 그는 경대승과 같이 고위층 무신가문 출신으로 집권해 동생이었던 최충수를 비롯하여 경쟁세력들을 모조리 없애버렸고 무력장치인 도방을 부활시켜 확대 개편하였으며 이어 교정도감( 敎定都監 )을 창설하여 중방에 갈음하는 무신정권의 집정부를 완성시킴으로써 경대승정권 때에 이미 맹아( 萌芽 )를 보이던 확립기 무신정권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계자들도 정방( 政房 ), 서방( 書房 ) 등의 권력기구들을 잇달아 설치하여 독재체제를 보강하였으며 이들 대부분이 붕괴기 무신정권의 최후까지 이어졌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경대승정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경대승과 최충헌의 차이점은 경대승이 옛 제도의 복구에 중점을 둔 반면에, 최충헌은 경대승의 모순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독재체제 강화에 중점을 둔 점이었다.3
2) 그로 인하여 최충헌은 최씨 막부체제를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그것을 4대 60여 년에 걸쳐 세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미묘한 차이점으로 인하여 경대승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왕조체제를 보존하려는, ' 의병을 일으킨 '33)자로써, 최충헌은 기존 질서를 변질시키고 왕조체제를 파괴한, " 악( 惡 )의 우두머리 '34)로써 평가되어 각각 고려사 제신 열전과 반역 열전에 수록됨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9. 결론

무신정변은 정치 및 사회의 극심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문벌귀족체제의 붕괴로 인해 고려사회는 체제가 공백상태가 되었으며 집권자들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했다. 급진파 무신정권( 이의방집권기 ), 온건파 무신정권( 정중부집권기 )을 거치면서 야기된 정치 및 사회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은 무신정변 및 정변으로 이루어진 변화에 대한 부정에까지 이르렀으며 드디어 경대승의 복고파 무신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경대승은 복고의 뜻을 가지고 집권하였고 또한 옛 제도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미 누적된 문제점으로 인해 무너진 옛 체제는 단순한 강압책으로는 회복하지 못하였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오히려 경대승의 행동들은 성립기 무신정권에서 확립기 무신정권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최씨 무신정권은 바로 경대승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이러한 경대승정권의 양면성은 바로 무신정변 이후 보수적인 세력과 변화를 요구하는 세력 사이의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경대승정권은 좁은 의미로는 무신정권의 변화를, 폭넓은 의미로는 무신정변 이전의 사회와 무신정변 이후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한다.

부록 1: 경대승( 1154~1183 )의 연표

1168년( 의종 23년 ): 15세에 문음( 門蔭 )으로 교위( 校尉 )에 보직
1174년( 명종 4년 ): 행수( 行首 )로써 활동. 1174년~1178년에 장군( 將軍 )이 됨
1178년( 명종 8년 ): 청주에서의 소란으로 청주사심관( 淸州事審官 )에서 파면됨
1179년( 명종 9년 ): 기해정변으로 정중부정권 타도
1183년( 명종 13년 ): 30세로 병사함

부록 2: 경대승정권( 1179~1183 )의 사건

서기 1179년( 명종 9년 )

9월: 경대승( 慶大升 )이 허승( 許升 ), 김광립( 金光立 ), 김자격( 金子格 )과 함께 기해정변( 己亥政變 )을 일으켜 정균( 鄭筠 ), 이경백( 李景伯 ), 문공려( 文公呂 )를 죽이고 정중부( 鄭仲夫 ), 송유인( 宋有仁 ), 송군수( 宋群秀 )를 잡아죽임. 이어 경대승이 손석( 孫碩 )과 함께 오광척( 吳光陟 ), 김광영( 金光英 ), 석화( 石和 ), 습련( 襲連 ), 송득수( 宋得秀 ), 기세정( 奇世貞 ) 등을 제거
경대승이 이의민( 李義旼 ) 제거를 선언
경대승 제거 선언의 유언비어가 나돔. 이어 경대승이 도방을 창설
송유인의 가신 석구( 石球 )가 모반하다 귀양감
11월: 명종이 경대승이 일으킨 옥사들로 투옥된 사람들에 대한 대사면 단행

서기 1180년( 명종 10년 )

1월: 이의민이 경대승의 도방을 꺼려 방어태세를 갖춤
7월: 중방에서 종참( 宗○ ) 등 승려들을 귀양보냄. 이소응( 李紹膺 ) 사망
12월: 경대승이 허승과 김광립을 죽임

서기 1181년( 명종 11년 )

3월: 한신충( 韓信忠 ), 채인정( 蔡仁靖 ), 박돈순( 朴敦淳 ) 등이 모반하다 귀양가고 좌천
4월: 이의민이 경주로 낙향

서기 1182년( 명종 12년 )

2월: 최충렬( 崔忠烈 ) 사망. 관성( 管城, 현 충북 옥천 )과 부성( 富城, 현 충북 서산 )에서 민란이 발발
3월: 전주에서 죽동( 竹同 )의 민란이 발발
4월: 죽동을 타살하고 민란을 진압

서기 1183년( 명종 13년 )

4월: 1, 2차 무신란으로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빌음
5월: 중방에서 문신들의 관직을 줄이라 제의
7월: 경대승 사망

1) 겨울 10월에 제하여, 삼경( 三京 ), 사도호( 四都護 ), 팔목( 八牧 )으로부터 군( 郡 ), 현( 縣 ), 관( 館 ), 역( 驛 )의 직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인을 임용하게 하였다. -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3년 10월

2) 군국( 軍國 )의 권력을 중방에 속하게 만든 것은 실로 이의방의 힘이다. - 고려사 열전 이의방,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7월

3) 정중부정권은 무신의 출사로를 축소하여 하급 출신 무신들과의 마찰이 잦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로 인하여 군기문란현상 및 여러 차례의 무고와 옥사가 일어났다.

4) " 여름 4월에 병부에서 무인의 산관( 散官 )을 모아 전주 짓는 것을 시험보여서 지방관직의 보임에 충당하게 하였다. - 고려사절요 명종 8년 4월 " 정중부정권 말기에는 다시 무신의 출사로를 열었으며 무신정변으로 세력이 크게 성장한 하급 무신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보수적 정책의 실패를 말하며 고위층 온건파 무신들의 불만을 불러왔으니 이런 까닭으로 온건파 무신들 대부분이 경대승의 정변을 묵인 혹은 협조했다 본다.

5) 정균이 은밀히 공주를 처로 삼을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임금도 걱정하고 있었다. - 고려사 열전 정중부,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6) 사료에서는 정중부정권에서 행해진 문신탄압이 주로 권력자의 탐욕과 횡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문신을 제압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7) 견룡과 응양( 鷹揚 ), 용호군( 龍虎軍 )과의 관계는 여려 학설이 있으나 필자는 견룡군이 2군에 속하여 국왕의 숙위( 宿衛 ) 및 의식을 담당한 숙위군이라는 설을 따른다.

8) 고려사 열전 정중부,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9) 고려사 열전 경대승 부( 附 ) 오광척, 열전 유응규( 庾應圭 ) 부 유자량( 庾資諒 ), 고려사절요 고종 16년 8월
 
 10) 경대승이 그의 반대파들을 대량으로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후 경대승 제거를 제의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경대승 반대파가 계속하여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11)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9년 11월

12) 중방은 급진파 무신인 이의방정권에서 힘이 강화되었으나 온건파 무신인 정중부정권에서는 하급출신 급진파 무신들의 저항으로 힘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세력의 강약을 막론하고 중방은 두 정권 아래에서 무신정권 최고의 기관이었음이 확실하다.

13) 급진파 무신세력의 정의란 주로 하층계급 출신으로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기존의 제도에 크게 구속되지 않은 변혁적인 집단으로 규정한다. 물론 그 변혁적이라는 것은 고위계급 출신 온건파 무신들과 비교해서다. 그들은 옛 질서를 파괴하는 주도자들이 되었지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지 못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성립기 무신정권을 끝으로 세력을 상실한다. 급진파 무신세력으로써 가장 유명한 자는 바로 이의민이다.

14)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4년 5월

15)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16) 김준의 아들 김중구( 金仲龜 )는 장녀를 최충헌의 아들 최구( 崔球 )에게 시집보내 혼사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인맥관계는 경대승과 최충헌정권의 유사성 내지 연결성을 지적해주는 것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17) 고려사 명종세가 명종 10년, 11년, 12년 12월,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2년 12월

18) 무신정변 이후 인사발령을 보면 문신들이 그때까지도 무신정변의 3거두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 李高 )보다 높은 벼슬을 차지하였다. 정중부는 부재상인 참지정사( 參知政事 )였고 이의방과 이고는 재상에도 끼지 못하였다.

19) 사료를 보면, " 경대승이 뭇사람의 분노에 의하여 드디어 그를 죽였는데 - 고려사 열전 정중부 부 송유인 ", " 일국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 고려사 열전 정중부,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 " 경대승이 왕실의 미약함을 분개하고 강신( 强臣 )의 발호를 미워하여 하루아침에 의병을 일으켜 정중부 부자를 목베어 여우 토끼 사냥하듯이 하였으며 -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27년 9월 "라고 경대승의 집권을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 ( 오광척 및 정중부잔당들을 죽이자 ) 조정 관리들이 대궐로 들어가서 축하를 드렸다.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9년 9월 ", " ( 허승과 김광립을 죽이자 ) 재상 이하는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축하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어 치하하니 - 고려사 열전 경대승,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2월 "라고 그의 숙청행동마저 정당화되고 있다. 비록 이 글들은 후세의 자료들이지만 그 당시 문신들이 가지고 있는 경대승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문신들이 어떻게 경대승정권을 뒷받침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20) 이의방정권과 정중부정권도 숙청은 있었지만 경대승정권 이전은 반무신란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 그 숙청은 주로 정변 때에 있었다는 것, 두 정권에서는 과두정치를 행하였으며 반대세력에 대한 회유를 활발히 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1) 경대승정권 때에 권력의 구심점은 첫째는 정권 이전 권력의 핵심이었던 중방, 둘째는 경대승정권에서 새로이 떠오른 도방 내지는 경대승 자신( 도방이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무력장치였고 그는 관직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적인 무신 집정으로써 권력을 행사했다. )의 이원집정부제였다.( 이미 껍데기였던 정부기관까지 합하면 삼원집정부제인 셈이다. ) 이런 과도적인 권력 배치도는 이의민집권기에서 다시 중방으로, 그리고 최충헌집권기에는 무신수령의 집정부인 교정도감으로 변하게 된다.

22) 급진파 무신으로 분류되는 이의민, 박존위( 朴存威 ), 조원정, 석린( 石隣 ), 이영진들이 이때 사료에서 처음 등장해 크게 등용되어 사회적 지위를 넓혀나가기 시작한다.

23) 이의방과 가까웠던 이의민, 두경승은 정중부정권 대부분의 시기를 조위총 토벌군으로써 외직에 있었는데 이는 정중부정권이 이들 급진파 무신을 견제하고자 포석을 취한 듯 싶으며 이의방의 수하라고 알려져 있는 조원정, 이영진은 아예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24)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12월, 11년 12월

25) " 명종은 천품이 잔약한 데다가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자칫하면 곧 놀라고 두려워하여, 대체로 군국의 기무( 機務 )는 다 무신들에게 견제되었으며, 성색( 聲色 )에 이르기까지도 감히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였더니, 적신( 賊臣 )이 주멸( 誅滅 )됨에 이르러 비로소 여자의 정에 빠지게 되었다. -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10년 6월 " 기록을 보면 명종이 경대승정권 이후에야 비로소 약간의 행동자유가 생겼다 알 수 있을 것이다.

26) " 경대승이......의병을 일으켜...... 이 때야말로 반드시 현량( 賢良 )을 임용하고 기강( 紀綱 )을 세워, 왕실을 다시 떨치게 할 시기인데도, 왕은 능히 그렇지 못하고 안일( 安逸 )에 만족하여 그 하는 일이 평상시의 아무 일이 없을 때와 같았다. -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27년 9월 " 이 자료는 후세의 사관이 경대승정권 때 왕권강화를 하지 않은 명종을 비판한 것이지만 명종 자신이 경대승 정책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27) 이미 온건파 무신들은 정중부집권기에 중요 인물 다수가 사망하였거나 경대승정권에 협조하였고 경대승의 숙청대상이 주로 정중부의 잔당이었던 온건파 무신이었기 때문에 경대승의 반대자로써 활동한 온건파 무신은 사례 1)과 같이 그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세가 미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28) " 인재를 뽑고 배치하는 법이 이렇게 문란하였으므로 이상과 같은 건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로 미루어 두었던 사람들이 또 뇌물질을 하므로 최충렬, 한문준 등이 이 건의를 적극 배격하면서...... 여러 낭관( 郎官 )들은 다시 시비질을 하지 못했다. - 고려사 전주 선법( 選法 ) " 기록과 같이 인사문제를 공평히 하려는 건의가 나왔지만 경대승정권은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의 동조자들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으며 이와 같이 경대승정권은 최소한의 변혁마저 거부함으로써 정권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29) 게다가 그 당시 온건파 무신들은 대부분 최충렬, 이광정처럼 보신주의적 면모를 보이는 자나 두경승, 문장필같이 무신정변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무신정권에는 참여해 친분과 이해관계에 따라 각각 노선이 달랐던 자들로 급진파 무신들과 쉽사리 융화가 가능하여 문제점이 더 심화되었으리라 본다.

30) 이의민정권에서는 무신들이 내시직 및 심지어 문신만 보임할 수 있는 사관( 史官 )직에도 임명되었으며( 까막눈 최세보와 두경승이 의종실록편찬을 주관하여 큰 물의를 빚었었다. ) 또한 이의민의 별명인 신도재상( 新道宰相 )으로 짐작컨대 이의민정권은 무신정권들 중에서 가장 기존질서를 거부했던 면모를 보여준다 짐작하는 바이다.

31) 사료에서 이의민집권기 당시 온건파 무신의 대표급인 두경승이 급진파 집정 무신 이의민과 마찰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는 점을 볼 때 이의민정권 때 온건파와 무신정변으로 진출한 급진파의 대립이 증대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32) 경대승이 복고의 뜻을 표방하였고 형식적으로나마 무신정권임을 부정한 반면, 최충헌은 그렇지 않고 노골적인 독재를 하였으며 또 일인독재를 위해서는 국왕의 폐립마저 서슴치 않았다는 점이 상기한 글을 뒷받침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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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고려사 명종세가, 고려사절요 명종 27년 10월

34) 고려사절요 고종 6년 9월


출처 : 경대승정권( 1179~1183 ) 고찰
글쓴이 : 푸른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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