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은 중-일 역사와 문화앞선 종가집”

kongbak 2009. 9. 3. 15:01
 
"한민족은 중-일 역사와 문화앞선 종가집”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식민사상 벗어나자
 
강동민 이사장
기록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민족은 창조와 도전, 그리고 개척정신이 넘치는 민족 이었다. 단군보다 약 400년 앞선 기원전 2700년경에 세계최초로 청동으로 청동검과 투구와 갑옷 그리고 농기구를 만든 분이 있었다. 그분을 우리는 '치우천황' 또는 ‘자오지한웅‘이라고 부른다. 돌과 흙으로 모든 것을 만들던 시대에서 동과 철로 만들기 시작했으니 엄청난 변화와 기술발전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동으로 뿔이 달린 가면을 무섭게 만들어 쓰고 얼굴과 손등 팔등에도 동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동두철액(銅頭鐵額)”이란 말이 처음 나왔다. 지금도 기와집의 꼭대기에 ‘귀면와’로서 또는 ‘도깨비’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 등도 모두 치우천황의 갑옷 입은 모습에 쇼크를 받았던 흔적이 있다. 치우천황은 황제헌원과 마지막 73번 째 ‘탁록대전’에서 황제헌원을 굴복 시키고 ‘티벳’을 개척하러 갔다 한다(한단고기). 티벳 말들(김대성 증언) 가운데는 할머니를 할매, 할아버지를 할배, 밥 무운나, 간장을 지렁, 변소를 통시, 두부를 조푸라고 하는 말들이 있다.
 
터키도 우리민족의 일파
 
▲ 강동민 이사장    ©브레이크뉴스
중국이 자랑하는 진시황은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하여” 시황제(始皇帝)라 했다. 뒤이어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지켜보고 있던 흉노가 한신을 공격하여 전쟁이 격렬해지면서, 한신이 위급하니 한고조 유방에게 긴급 지원요청을 했다. 유방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한신을 도와 흉노를 공격 했다. 흉노의 군대가 워낙 막강하여 한고조 유방이 도리어 흉노에게 포위되니, ‘태원’ 아래 ‘백등산(白登山)’까지 후퇴하게 됐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되자 ‘미인계를 써서’ 겨우 살아나게 됐다. 그때부터 한나라는 약 200년간 매년 조공을 바쳤다. 물론 공주들도 수시로 조공 했다. 이 기록은 한나라의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흉노전에 나와 있다.
 
부여에게도 한나라(214년간)가 망할 때 까지 조공했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장례풍습에 옥으로 만든 갑옷인 ’옥갑‘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한나라의 수도가 “서안(西安)”이었기 때문에, 거리가 너무 멀어 “현도군인 북경쪽”에 미리 갔다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흉노 또한 부여에 조공하였는데 흉노왕의 애마인 천리마와 흉노왕후인 알씨까지 부여에 바쳤다고 사기흉노전(史記匈奴傳)에 기록 되어 있다.
 
흉노의 어원은 본래 “환족-훈족”으로 소리 바꿈 된 것이다. 한나라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노비 노(奴)자를 붙여서 흉노(匈奴)라고 불렀겠는가. 이 훈족은 3대 단군 가륵 단군 때(기원전2100년경)갈라져나간 우리민족의 일파이다. 기원후 48년에 내분으로 인해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져서, 남흉노는 한나라에 흡수됐다. 북흉노는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게르만민족’을 압박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키고, 그 게르만 민족이 ‘로마’를 멸망시키게 되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단군조선 시대의 후기 1000년은 부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나게 됐다. 물론 터키도 돌궐족이 남하하여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아사달민족(아사나 민족)”이라고 한다.(신용하 교수증언. 항가리. 유고슬라비아=부여족)
 
발효식품은 최고의 웰빙식품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문화생활 이라는 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말과 글 그리고 의, 식, 주가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민족은 세계최고의 문화민족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민족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요즘말로 웰빙 그 자체이다. 선진 서구사회에서 잘사는 사람들이 무었을 먹고 사느냐 하면, 바로 채소와 웰빙 식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웰빙식품 중 최고급이라고 하는 것은 발효식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발효된 식품이라는 것은 치즈, 와인, 엔초비(멸치젓 비슷) 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옛날부터 먹어오든 식품인, 수십 수백종류를 만들 수 있는 김치(고추 없는 백김치)와 간장 된장 등과 수십 종의 젓갈들은 가지고 있는데, 발효식품이 대부분이다. 또 이들은 최근에 밝혀지기를 항암성분이 풍부하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현미 율무 콩 수수 조등 잡곡밥과 같이 먹는 우리식단은, 우리선조님들의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건강식품 식단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통역관으로 있든 정명악 선생이 일본에서 공부할 때 일본인 선생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일본인 선생이 하는 말이 “정군 오늘 우리가 먹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 라는 질문에 “예 밥상입니다 라고 답하니” 그래 우리일본인들이 먹는 것은 밥상이 맞다. 그러나 너희 조선 사람들이 먹는 상은 밥상이 아니고 ‘약상‘ 이라고 해야 한다.” 라는 이 말은 우리나라 땅은 사계절이 뚜렷하고 위도 경도가 적당하니, 우리 땅에서 생겨나는 풀 한포기도 강한 약성을 띄고 있다고 한 뜻 일 것이다.
 
화재에 약해 천년 이상 가는 건물들은 드물다. 공기를 정화시키는 한지로 만든 문을 열면, 앞산과 먼 산이 모두 정원이었으니 항상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었다. 온돌방은 원적외선 효과로 근육을 이완시켜, 피로회복에 효과적이며 건강 유지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다. 단지 오랫동안 보관해야 할 것은 “합천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보관 하듯이, 모든 자연조건을 감안하여 순리에 잘 맞게 만들었던 것이다. 후세인들이 잘못 손대면, 경주 토함산 석굴암처럼 실패 보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경면주사와 옻칠 을 활용한 특수처리방법들 또한 우리민족의 집에 관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복을 한번 살펴보면, 우리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중국의 최고 고서이며 세계 최고 고서인 ‘산해경’에도 우리민족을 ‘백민’ 이라고 표현했다. 조조가 세운나라 위(魏)나라의 역사책인 ‘삼국지위지동이전’에 기록하기를 “동이사람들 즉 부여 사람들은 밝은옷 흰옷을 즐겨 입고 외출 시(時) 허리에는 금, 은 보화로 치장하고 신은 가죽으로 만들어 신더라, 부자나라이고 대국이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씩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영고(迎鼓)’라고하며 7일을 밤낮으로 가무음곡이 좋더라”라고 기록돼 있다. 그때부터 우리를 이웃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백의민족‘이라고 했다. 고구려 때는 일반인들도 실크를 입고 다녔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줄무늬 물방울무늬 등의 옷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요즈음도 이러한 디자인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고대복식을 연구하는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미 고조선(기원전2000년~3000년) 이전부터 야생 목화를 이용하여 면을 만들고, 삼을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었다고 썼다. 짐승의 털과 가죽을 이용한 고급모피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이웃나라와 교역했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선조들이 만주에서 제일먼저 개발, 생산한 흔적과 유물유적이 발굴되는 것으로 봐서, 중국 황하 중앙지역보다도 동북삼성지역 쪽이 약500년에서 700년 정도 앞서 있다고 발표 하고 있으니, 당시의 방직기술이 매우 높고 섬세했음을 알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송나라 4대 사서중 하나인 '태평어람(송나라 4대사서: 977~983:이방. 송백 등이 태종의 칙령으로 만든 책 1000권으로 됨. 태평환우기.광기.책부원구 )'에서는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말하길 “무릇 진귀한 물건이 나는 곳은 모두 중국과 서역으로, 다른 지방의 토산물은 이보다 못하다. 대군(代郡)의 황포(黃布)가 곱고, 낙랑(樂浪)의 연(練)이 정교하고, 강동(江東)의 태말포(太末布)가 희지만 모두 백첩(白疊.白?)의 깨끗함만 못하다”고 했다.
이것은 위나라의 문제가 백첩포의 곱고 깨끗함은 어느 것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는 선비족인 문제(文帝)의 개인적 취향에서 한 말은 아니다. 백첩포가 중국에 알려진 당대에 백첩포의 우수함을 모두 극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세종대왕이 창제
 
문자문화를 살펴보겠다. 지금 우리가사용하는 한글은 세종대왕께서 창제했다.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에는 ‘옛글자를 모방하여(象形而字倣古篆) 대왕께서 새로 창제 하셨다’고 되어 있다. 옛 글자라는 것은 단군조선 때 (3세단군 가륵. 기원전 2182년경) 만든 가림토 문자(38자)를 말하는 것이다. (한단고기) 가림토문자의 유적유물은 ‘북한의 평양 법수교 아래서 발굴되었고’ ‘중국 할빈의 선춘령에서 발굴되었으며‘ 일본 오사까의 이세신궁에 가림토문자 99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두문자는 신라 설총이 총 정리를 했고 근세조선조 말까지 사용됐다.
 
초대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 박사가 대만정부 초청으로 대만에 갔을 때, 파티석상에서 우리한글의 우수성을 한참 자랑하면서 한자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는 자리에서, 임어당 선생이 다가와 “한자도 ‘동이족’인 당신네 선조들이 만들었다. 왜 한글만 자랑 하는가’?”라고 하는 말에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안 박사는 그때부터 우리학자들이 연구하며 찾아보니, 과연 동이족만이 할 수 있는 발음이(입성) ‘양나라 때(543년) 처음 만든 옥편에 약 35%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랬다고 했다. 예로 한자는 4성(평성. 상성. 거성. 입성)으로 발음을 하며, 발음기호가 글자마다 있다. 그러니 입성 발음은 ‘겨울발음에 해당되어’ 겨울이 있는 지역 사람들이 잘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한자는 ‘일 음절’로 발음 하라고 발음기호에 아예 적혀 있다.
 
북경의 북 자는 발음기호가 ‘박묵절(博墨切)’이라고 되어 있다. 즉 박(넓을 박)의 ‘비읍자와‘ ’묵(먹 묵)의 욱자’를 합하라는 말이다. 두자를 합하면‘ 북’이 된다. 요즈음의 옥편에는 ‘필묵절’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푹’이다. (절운(切韻): 반절(反切)은 한자(漢字) 두 글자의 음을 반씩 따서 합쳐 한소리로 만드는 법) 이렇듯이 “한글, 이두문자, 가림토문자, 한자”를 공식적으로 문자를 4번씩이나 만든 민족은 지구상에 우리민족 밖에 없다.
 
우리민족이 지혜롭고 훌륭한 문화민족인데 무엇이 모자람이 있겠는가. 정말 자랑스럽지 않은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뿐만 아니라 짐승과 풀 한포기 까지도 사랑으로 대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망각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민족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고 서로 싸우게 됐다.
 
숙신, 예, 맥, 돌궐(터키), 흉노(환-훈), 글안, 선비, 여진, 말갈, 물길 등으로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선비족과 여러 부족들이 중원으로 들어가서 한족이 되었다. 다른 한편
으로는 바다를 건너가서 섬사람들인 묘족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래도 홍익인간정신이 조금남아 있었든 조선조 때는 3족을 멸하고 9족을 멸한다고 말은 했었지만, 사실은 조선왕조 600년에 그 많은 ‘사화’ 중에 직접 사형 시킨 사람은 28명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리안치(가시울타리)나 귀양 보냈다. 귀양간 사람들 중에 제주도로간 김정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전라도 쪽으로 간 정약전은 물고기들의 생태를 조사한 ‘자산어보’를 완성했다. 허준 선생은 ‘동의보감’을 만들었다. 평소 공직생활 때 바빠서 못하던 연구를 귀양 가서 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인 우리가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육신으로 끝까지 불사이군의 고집을 꺾지 않았던 그들의 머슴 중에 자기자식을 대신 죽이고 주인의 아들을 들쳐 업고 산으로 도망가서 숨어살다가 죽기 전에 ‘내가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누구시다’ 이렇게 유언을 남겼든 사람들이, 사화 때마다 부지기수로 많았다. 이 모든 것은 머슴과 주인의 사이라기보다 친형제 이상의 존경과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박팽년(朴彭年)’의 아들을 들쳐 업고 도망쳐서 살려낸 머슴이다. 지금도 그들은 사육신을 다 같이 모시고 있다. 그래서 그 머슴들에게 자기들의 성씨를 주어 같은 집안으로 대우해 주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극렬한 노사분규로 회사가 극도로 어려움에 처해지고, 서로 불신하며 직장을 마치전투장처럼 생각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진정한 본성이 아니다. ‘역사의식과 홍익인간정신이 없어진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 한다.
 
정치계나 사회나 어느 집단이든지 간에 자신의 일에 관한 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사람 그러한 단체가 발전 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알고 민족적자부심을 가지게 되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졌을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자들의 애국심은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국민의 기본자세가 아니겠는가.
 
지금 중국의 내몽고 적봉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기원전 7000~8000년의 유적유물들과 기원전 3000년~4000년의 유물들은 중국학계에서도 이미 한족의 유물과 다르고 시대가 훨씬 앞선 시기이기 때문에 ‘황하와 양자강의 유물들도, 이곳으로부터 발전하여 전해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동북공정’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가져가서, 세계최고의 역사를 만들고 북한 땅의 권리주장을 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종가집
 
이렇듯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 보다 훨씬 앞선다는 점과 중국과 일본을 만들고 말과 글을 비롯한 모든 문화를 전수해준 큰집이요, 종가집인 우리나라이다. 우리 문화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점을 전 국민들에게 교육시키고 알려서, 하루빨리 우리민족의 자부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많이 알고 깊이 안다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왜냐하면 자부심과 자긍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세뇌 시킨 말들 가운데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조선인들은 명태처럼 패야 맛이 난다,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반도인이다, 조석으로 마음이 바뀌는 엽전과 같은 민족이다”는 말 등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왜곡된 식민사상을 벗어나야 한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강동민은 민족문화운동가. 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코메론 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