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역사
분명히 '자기'의 것인 이름. 그러나, 남이 주로 써 주므로 이름은 공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름은 함부로 지을 수도 없고 적당히 생각할 수도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옛날에는 여자나 천한 계급에 있는 사람은 아예 이름이 없는 수도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부를 때는 적당히 '딸년'이나 '먹쇠' 같은, 이름 아닌 이름을 쓰는 수도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이름에 관한 사회의 관심이 대단히 높아졌다. 그리고, 이름이란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변해 온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먼저, 우리 이름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순 우리말 이름은 삼국 시대에도
한자가 이 땅에 들어와 널리 쓰이기 이전인 고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당시의 사람 이름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 흔히 보는 이름들이 아닌 독특한 것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혁거세, 수로, 을지, 이사부, 거칠부, 사다함, 개소문 등.
당시에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은 지금과 달리 영수(英洙), 경자(京子)식으로 한자 중심의 이름이 아닌 우리 토박이말에 바탕을 두고, 또 두 음절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망이나 특징을 담아 짓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 이름이 역사책에는 분명히 한자로 되어 있으나, 이 이름들은 모두 당시의 우리말에 바탕을 둔 '우리식 이름'이었다. 예컨대,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Ꟊ诅뉘'로, 지금의 말로 '밝은 세상'을 뜻하고 있고, '수로(首露)'는 '마로'로, '으뜸(머리)'를 뜻하고 있다. '을지문덕'의 '을지(乙支)'는 '웃치(상관=上官)' 또는 '엄지'의 뜻으로 유추되고 있고,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漆夫)'는 각각 '이은(계승한) 머리(상관)'와 '용감한 장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름은 한자가 보편화된 통일신라 이후로 차츰 중국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모든 이름들이 중국식으로 거의 두 음절로 통일되고, 우리 토박이말과는 거리가 먼 이름으로 옮겨갔다.
원래, 고대의 우리 사회에는 성과 이름의 구별이 없었다.
삼국시대로 들어와 상류 계급에서 이름을 갖기 시작했으나, 서민 계급에서는 대개 성이 없이 이름만 써 왔다. 거칠부, 이사부, 사다함, 아사달 같은 이름들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성 외에 관(貫)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신라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本), 본관(本貫), 향관(鄕貫)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씨족의 근거지가 되는 땅이름에서 취하여진 것으로, 그 씨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성과 관이 같으면 원칙적으로 같은 씨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씨족이 달라도 임금으로부터 성과 본을 받는(사성사관=賜姓賜貫) 경우도 있었고, 다른 씨족의 성과 관을 그대로 따서 쓰는 일도 있어서 반드시 성과 관이 같다고 해서 같은 씨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우리 이름 제도의 변천
오늘날까지의 우리 나라의 이름 제도의 변천은 크게 다섯 기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첫번째 시기가 고유 명사 사용기이고, 두번째 시기가 한문화 시기이며, 세번째 시기가 한문화 완성 시기이다. 그 다음이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 시기이고, 광복 후부터 지금까지의 한글이름 보급 시기이다.
고유 명사 사용기는 부족국가시대부터 신라 중기, 즉, 6세기 말까지 이르는 시기로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고전에 나타나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름들이 순수 우리 토박이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글이 없어 이러한 이름들은 한자로 의역(意譯)되거나 차음(借音)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이름의 한문화 시기는 그 후부터 대략 신라 통일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중국식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름의 한문화 완성 시대가 그 다음에 오는데, 대체로 통일신라 이후가 된다.
우리 한반도에서 여러 부족들이 곳곳에 작은 나라 형태를 이루고 살 무렵, 중국에서는 진(秦)나라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다. 또, 한(漢)나라가 한반도의 북서쪽에 네 군현을 두어 다스리는 등 중국 문화의 자극 및 영향을 받게 되자, 우리 겨레는 언어와 풍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름의 한문화 시도는 이의 하나로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신라보다 백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완성된 것은 신라 통일 이후였다.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자, 당시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던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알맞게 소화하였던 까닭에 이름도 당나라 사람들의 그것을 본따 보급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이름은 중국 민족의 양식을 본땄지만, 고려시대 이후 또 다른 민족의 영향을 받아 그 양식을 모방한 것도 적지 않았다. 즉, 고려 중기 이후로 몽고나 여진식 이름도 있었고, 근세 이후에 와서도 외국식 이름을 모방한 것이 적지 않게 나왔다.
중국 문물이 유입되면서부터 이름에도 중국식을 따르려는 경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 고려 중엽 이후로는 거의 모든 한자식 성과 이름을 갖게 되고 돌림자(항렬)도 이 때쯤 생기게 되었다.
선조를 숭배하는 씨족 관념이 강한 사회에서 씨족 이름인 성(姓), 같은 세대끼리의 동지적 결속을 강화하여 그 동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항렬에 자기 이름까지를, 단 석 자의 틀에 담아 놓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의 이름처럼 조직적인 것이 없다고 외국인들도 말할 정도이다.
3. 창씨개명으로 인한 우리 이름의 수난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이름 문화(?)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철저하게 유린을 당했다.
일본은 2차 대전 중 전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당시 피지배자인 우리 겨레에 대해 물심양면으로 발악적인 압박을 가해 왔다.
황민화(皇民化) 운동을 광적으로 추진하여 우리말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하고, 공사간에 일본어만 상용하라고 강제하였으며, 우리말의 신문-잡지를 폐간시키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런가 하면 징병-징용의 법을 만들어 우리의 청장년을 전쟁으로 내몰아 막대한 인명을 희생시켰다.
민족 말살 정책을 펴 그 완성편격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 우리 고유의 성(姓)까지 그들식으로 바꾸게 했다. 대륙 침략과 미일 전쟁을 전개하면서 발악적인 식민 정치의 마지막 수단으로 이른바 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 서양자(女胥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그 해 11월 10일, 일제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밖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공표했는데, 이의 핵심은 '조선인 호주는 6개월 이내에 새로 씨(氏)를 정해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신고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관련 조항에선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는 본령 시행 전 호주의 성을 씨로 한다'고 돼 있어 형식적으로는 조선인이 성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이행하지 않은 조선인은 행정 기관에서 일을 볼 수 없게 하고, 물자를 배급해 주지 않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 또, 각급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으며, 겉봉에 조선식 이름이 쓰인 우편물이나 화물은 배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행정 조직과 경찰을 총동원해 가정마다 일일이 창씨개명을 종용, 강제적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결국 이같은 험악한 분위기 안에서 전체의 약 40퍼센트에 달하는 320만 호의 조선인이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성도 이렇게 바뀌어 버렸지만, 또 많은 이들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전형이 '영자(英子)', '정자(貞子)'식으로 여자 이름의 끝에 붙는 '자(子)'자였다. 사대부집 여자 이름에는 '희(姬)', '경(卿)', '옥(玉)', '주(珠)'자 등이 보통 쓰였고, 상인 계급에서는 '간난이', '입분이', '언년이', '아지(아기)' 등으로 보통 명사처럼 붙여 왔던 여자 이름들이 하루 아침에 '춘자(春子)', '화자(花子)' 등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일제의 영향으로 여자 이름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이 '아들자(子)'자 외에 '가지지(枝)'자도 있다.
또, 남자 이름으로는 '랑(郞)'자,'웅(雄)'자,'식(植)'자,'일(一)'자 등이 많이 씌었다.
4. 광복 후 우리식 이름의 정착
1945년 8월, 2차대전 일본의 패망에 따라 우리가 광복을 맞고 그 한 달 후부터 미군정이 개시되었다. 그리고, 1946년 10월 23일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법령 제 122호로서 공포되자, 일제 하의 창씨개명으로 변경한 호적부 기재와 본령에 배치되는 모든 법령-훈령 및 통첩은 그 창초일부터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이름은 한번 지어지거나 고쳐지면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으면 여간해 다시 고쳐지지 않게 마련이어서 창씨개명으로 인한 성명의 원상 복구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여자 이름은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기에 '자(子)'자 등이 들어간 이름은 거의 그대로 놓아 두었고, 이미 일제시대에 새로 지어진 이름은 다시 개명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대로 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남자 이름은 그보다는 덜해서 원상으로 돌아온 경우가 많았다.
'아들자(子)'자가 들어간 일본식 여자 이름은 그 세대 여성들 이름을 특징지운 채 아직도 역사의 상흔으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무신경하게도 그 이후에 태어난 2세들에게까지 이 부끄러운 잔재를 물려 주어 일본식 이름을 계속 퍼져가게 하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지금의 여자들 이름에 '영자', '정자', '순자' 등 '자'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름 분야에 일제 잔재가 얼마나 깊이 박여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광복 이후의 가장 주목할 만한 흐름은 1천5백 여 년의 중국 문화에서 벗어나 순수한 우리말로 이름을 지으려는 노력들이 살아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이름 보급 시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정부 수립도 되기 전인 1947년 9월, '금난새'라는 한글이름이 처음 호적에 올랐다. 그리고, 그 뒤로 계속해서 한글이름이 나왔는데, 이것은 대학 국어 운동 단체에서 벌인 '고운 이름 자랑하기'나 민간 단체에서 벌인 보급 운동의 결과였다.
그러나, 아직도 한자 위주의 전통 작명법을 따르려는 집안이 많고, 집안의 항렬-족보 의식 등이 뿌리깊게 남아 있어 한글이름이 주종을 이루기엔 아직도 길이 먼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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