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차길진의 영혼은 살아있다] 정조, 누가 독살했나?

kongbak 2007. 12. 19. 09:29
차길진의 영혼은 살아있다] 정조, 누가 독살했나?
2005-02-07 10:40

     
 나는 삿포로 눈축제를 주관하는 기시다상 부부의 초청으로 삿포로에 왔다. 지금 삿포로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삿포로. 나는 눈축제가 열리고 있는 공원을 거닐며 대형 얼음조형물을 구경하다 문득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수원 화성 건축조형물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개혁의지와 꿈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당쟁으로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조선 최고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뒤, 이를 중심으로 한양을 대치할 신도시 건설계획을 세운다. 그 시작이 바로 화성축조였다. 그러나 정조는 화성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지를 드높이지 못한 채 49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정조의 붕어이후 계속된 독살의혹. 그것은 현재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 진경시대를 전공한 학자가 내게 정조의 독살 의혹에 대해 거론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너무 위대한 왕이셨기에 말하기 전 두려움이 앞섰던 것. 그러다 얼마 전 정조의 구명시식을 청한 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염사를 통해 본 정조대왕의 독살의혹을 밝히고 말았다.
 정조는 평생 북벌을 외쳤던 효종과 많은 점이 닮아있었다. 활쏘기로 체력을 단련했을 뿐 아니라 인재등용방식까지 닮았었다. 당시 효종은 아버지인 인조를 옹립했던 낙당의 김자점 일파를 역모로 처단하고 초야에 묻혀있던 옛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을 대거 기용한다.
 그리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구체화시켜나갔지만 당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을 쉽게 깨진 못했다. 효종은 붕어 직전, 아끼는 신료들과 함께 다가오는 봄을 노래하는 자리에서 북벌을 완수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2달 후, 평소 앓아오던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수전증에 걸린 어의가 침을 잘못 놓는 바람에 의료사고로 숨진다.
 정조대왕의 죽음도 이와 비슷했다. 내가 염사한 결과 정조는 화성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북벌을 꿈꿨고 이를 위해 서얼출신으로 밀려있던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기용한다. 알려진 대로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이장한 까닭은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을 동경한 사도세자가 이 터를 둘러보고 다시금 북벌을 가슴 속에 새겼기 때문이다. 정조 역시 아버지의 꿈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대왕은 청·일 양국에 끊임없이 스파이를 보내 군사기밀을 입수했다. 그는 특히 도화서 화원들을 아꼈는데 이들은 첩보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도화서 화원들의 솜씨가 얼마나 정교했는지는 기록화의 정수인 '화성능행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김홍도가 일본에 잠입한 스파이였다는 설까지 있겠는가.
 그러나 정조는 북벌계획을 실행하기 직전 눈을 감는다. 부스럼이 심해져 돌아가셨다고 하나 정확한 사인은 탕약의 독극물이었다. 정조의 암살을 모의하던 세력은 부스럼치료를 위해 지속적으로 드시는 탕약에 미량의 독극물을 첨가했으며 병세악화로 면역력이 떨어지자 급속히 독이 퍼져 붕어하신 것이다.
 물론 근시안적으로 봤을 때 당쟁으로 독살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조의 독살엔 보다 큰 세력이 있었다. 바로 청황실이다. 당시 정조는 북벌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을 부국강병의 국가로 키우는데 온힘을 기울였고 실력 있는 학자들을 청으로 보내 공부시켰다.
 처음엔 이를 눈여겨보지 않던 청황실도 조선선비들의 첩보활동과 정조가 병적으로 수집하는 청국서적을 통해 정조의 심중을 간파한 뒤, 이대로 나가다간 언젠가 청을 위협할 국가로 성장하리라 예상하고 가장 테크니컬한 암살을 명령했던 것.
 나는 삿포로 한켠에 자리한 수원화성 건축조형물을 바라보며 만약 정조대왕의 꿈이 이루어졌다면 현재 한국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상상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