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도 빚 나름이며 크기가 있다.
한때 '주윤발'로 대표되는 의협 영화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조폭이나 형사 등 숙명처럼 외롭게 싸우다 장엄한 최후를 맞는 영웅들에게 영화팬들은 매료됐다.
의협물의 최고의 재미는 바로 의로움이다. 그런데 의로움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은 정 때문에 싸우고 중국은 의협심을 지키기 위해, 일본은 사무라이로서 조직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
사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보다 의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이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런 종류의 영화도 의협물이 아닌 인협물이라 했다. '의는 지키지 않아도 좋다, 다만 충성을 맹세한 사람과의 인정은 간직해다오'란 맥락일 것이다.
나라와 시대마다 많은 이들에 의해 거론된 '의'란 무엇일까. 나는 '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차원 높은 마음의 빚'이라고. 춘추전국시대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라는 장수가 어느 날 군영을 순시하다가 발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병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치료해 주었다. 병사는 편지를 써서 어머니께 그날 일을 자랑했다.
"장군님께서 저처럼 천한 병사의 발꿈치 피고름을 빨아주었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편지를 읽은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십니까?"
어머니는 눈물을 찍어내며 하소연했다.
"이 아이의 아버지도 오기장군의 부하였습니다. 어느 날 등창이 나서 고생하고 있는데 오기 장군이 입으로 피고름을 뽑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천한 병사가 귀한 장군의 은혜를 입었으니 목숨 말고 무엇으로 그 빚을 갚겠습니까. 내 아들도 오기 장군에게 큰 빚을 졌으니 틀림없이 전쟁터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 진격할 것입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돈으로 갚을 수 있는 빚이 있고, 없는 빚이 있다. 바로 돈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의다. 갚는 길은 딱 하나, 의로움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어디에 기준을 둘 것인가. 의로움에 있어서 인간적, 도덕적, 우주적 차원의 의리가 각기 다르다. 빚에도 차원이 있다. 인간적으로는 의리를 잘 지키는 것 같은데 도덕적으로는 아닌 것 같고, 인간적이나 도덕적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부처님처럼 의리없는 사람도 없다. 왕세자로 태어났지만 과감히 왕세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셨다. 이 때문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랑하는 부인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소중한 가정도 내팽개쳤다. 세자로서의 왕위를 계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백성도 버렸고 스승도 버렸다. 이런 분을 우리는 존경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인간적, 도덕적 의로움만 지키고 왕세자로서 사셨다면 4대 성인이 되시지 않았을 것이다. 차원 높은 우주의 빚을 갚았기 때문에 그 분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받드는 승려들도, 불자들도, 불교라는 종교도 오늘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더 큰 세계,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간에서 말하는 의로움을 딛고 나아가야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진정한 영웅은 우주에서 고독하다.
큰 배신은 배신이 아니며, 사사로운 의리는 의리가 아니다. 사사로운 이득을 위한 배신은 명백히 배신이다. 빚을 갚기 위해 먼저 인간적인 의리와 우주적 큰 의리를 구분하는 안목이 선행되어야 한다. 과연 우주는 어디에 있을까? 혹시 사람 저마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