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바람에 '한들한들' 우리 어깨의 힘도 빼야

kongbak 2007. 6. 16. 10:22
바람에 '한들한들' 우리 어깨의 힘도 빼야

요즘 어딜 가나 골프 얘기다. LPGA에서 김미현이 우승하고, 박세리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20대의 젊은 골퍼들이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에게 가끔 박수받을 정도를 치지만, 나도 병아리 시절이 있었다.

 "어깨 힘을 빼세요." 내가 골프를 배울 때 코치로부터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런데 정작 힘을 어떻게 빼는지는 가르쳐주질 않아 야속했다. '혹시 수강 기간을 늘리려는 수법'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어깨를 내리고, 웃는 표정을 짓고, 겸손하게 임하고…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문득 개울가의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위엄 있게 서있던 주위의 소나무, 심지어 전봇대가 쓰러졌다.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위태로웠지만 여리고 여린 버드나무가지는 이 난리 속에도 바람을 즐기듯 전혀 꺾이질 않았다. 힘을 뺀 부드러운 버드나무는 강했다.

 돌이켜보니 역사 속에서도 버드나무는 중요한 전환점에 등장했다.

 왕건이 후고구려의 궁예 부하로 활약하고 있을 때다. 늘 선봉장이었던 왕건은 1천여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금성을 공략하기 위해 강행군에 나섰다. 쉴 새 없이 나주까지 당도한 왕건은 몹시 지쳐 있었다. 근처 수양버들이 치렁치렁한 우물가로 향했다. 마치 자신의 고향 우물가 같았다. 한 처녀가 물을 긷고 있어서 물 한 모금을 청했다. 처녀는 물 한 바가지를 뜨더니 갑자기 우물가의 수양버들 가지를 휘어잡고는 잎을 훑어 물에 띄웠다.

 '신라의 백성이라 자신을 탐탁지 않게 대하는구나.' 섭섭한 마음이 든 왕건이 버들잎을 후후 불어가며 물을 마셨다. 왕건이 입을 닦으며 처녀에게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웠는지 물었다.

 "장군님께서 하도 여유가 없어 보여서 물이라도 천천히 마시며 숨을 돌리시라고 버들잎을 넣었습니다."

 한마디로 '힘을 빼라'는 것이다. 왕건은 지난 29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처녀가 나중에 태조 왕건의 황후가 된 유화부인이었다. 유화(柳花)란 버드나무 꽃이란 뜻이다.

 공교롭게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도 전장으로 향하던 이성계에게 우물가에서 버드나무 잎 3개를 바가지에 띄워 황후가 되었다.

 버드나무는 물의 정화능력이 탁월하고 물 저장능력도 크다. 옛날엔 산모가 산고를 시작하면 버드나무 잎을 씹었다. 근래 버드나무가 아스피린의 원료가 되었으니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어느 마을이건 우물가엔 버드나무가 흔하다. 버드나무는 곧 '고향'이다. 고향의 버드나무 아래서 한숨 돌리고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날을 돌아보노라면 어느 사이엔가 어깨에 잔뜩 고였던 힘이 빠져있다.

 사람이 병들고 늙으면 고향이 절실해진다. 범죄 심리학에 보면 흉악한 범죄자가 쫓겨서 숨어드는 곳이 고향이다. 살다보면 부자가 되고, 높은 직위에 오르고, 명성을 얻어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힘을 빼게 하는 것이 바로 고향이다.

 나는 요즘 골프를 칠 때면 버드나무를 생각한다. 버드나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자. 골프 코치가 아무리 힘 빼는 폼을 가르쳐도 결국 힘을 빼야하는 것은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