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선비족은

kongbak 2007. 5. 16. 20:05

[이덕일 사랑](198)

 고구려 출신 북위 황후


발행일 : 2007.02.13 / 여론/독자 A34 면 기고자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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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족(鮮卑族) 탁발씨(拓拔氏)의 발상지인 흥안령 산맥 동북쪽 아리하(阿里河)에 다녀왔다. 고구려와 북위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위서(魏書) 고구려전’은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헌문제(獻文帝: 재위 466~471)의 후궁으로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공주를 보내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장수왕이 공주는 이미 출가했다며 조카딸을 대신 보내겠다고 하자 북위는 안락왕(安樂王) 진(眞)을 국경까지 보내 예물을 전한다.

그러나 장수왕은 조카딸도 보내지 말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카가 죽었다고 거절했다. 북위는 포기하지 않고, “그렇다면 종친의 딸을 가려 뽑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후원이 반드시 필요했던 상황의 표현인데, ‘위서’는 이때 마침 헌문제가 죽어 중지됐다고 전한다. ‘위서’를 보고 쓴 ‘삼국사기’ 장수왕조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다.

그런데 헌문제의 뒤를 이은 효문제(孝文帝: 471~499)의 부인 문소황후(文昭皇后) 고(高)씨가 고구려 출신이란 점에서 ‘헌문제가 죽어 중지됐다’는 내용은 사료 은폐의 혐의가 짙다. ‘위서’ 문소황후 열전은 그를 ‘사도공(司徒公) 고조(高肇)의 동생’이라고 전하면서, 다른 대목에서는 고조를 ‘발해(渤海) 수인( 人)’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고대 사료는 고구려라고 써야 할 대목을 발해(渤海)라고 쓰는 것이 일종의 법칙이다.

문소황후 소생이 선무제(宣武帝: 500~515)가 되는데, ‘위서’는 선무제가 “즉위 직후 (고구려의) 삼촌들을 그리워해서 불렀다”고 전한다. 위나라는 493년 낙양으로 천도해 중원을 모두 석권한 상태였으니 고구려 여인의 아들이 낙양 황궁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중국 사료들이 중화사관으로 감춰 놓은 수수께끼들을 풀면 이렇게 감춰졌던 민족사의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선비족과 고구려는 한족(漢族)들이 볼 때 같은 동호(東胡) 계열이다. 열린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광활한 대륙이 보인다.
선비족은 | 우리민족의 자취
2007.02.16 11:29


[이덕일 사랑](199)

 선비족(鮮卑族)과 고구려


발행일 : 2007.02.15 / 여론/독자 A30 면 기고자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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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설원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200km쯤 가면 내몽고 접경 눈강(嫩江)시가 나온다. 여기에서 북서쪽으로 비슷한 거리를 북상하면 악륜춘족자치기(鄂倫春族自治旗)에 닿는다. 아리하(阿里河)로도 불리는 도시이다. 아리하 서북쪽 산 중턱에는 선비족 탁발씨(拓跋氏)의 발상지인 알선(?仙) 동굴(洞窟)이 있다. 1000 명 이상이 들어가는 커다란 동굴이다.

‘위서(魏書)’ 오락후(烏洛侯) 열전에 따르면 북위의 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 재위 424~452) 때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있던 오락후국에서 사신을 보내 이 동굴이 탁발씨의 발상지라고 알렸다. 태무제는 즉각 중서시랑(中書侍郞) 이창(李敞)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알선동굴 벽면에는 “천자 신(臣) 탁발도(拓跋燾)는…”이라며 지상의 천자 태무제가 황천의 신(皇天之神)에게 제사 지낸 내용이 나온다. 북위 멸망 후 1500여 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알선 동굴은 1980년 7월 중국 현지 연구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순암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조선명호(朝鮮名號)’조에서 ‘동방(東方)은 곧 백두산의 기슭이고 백두산은 선비산으로부터 뻗어내렸다’라고 흥안령산맥과 백두산을 이어서 설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신대왕 4년(168)조에는 ‘한나라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침범해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은 항복하고 현도군에 복종할 것을 청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같은 해인 ‘후한서(後漢書)’ 효령제(孝靈帝) 건녕(建寧) 원년(元年:168) 12월조에는 ‘선비와 예맥이 유주와 병주 2주를 공격했다(鮮卑及濊貊寇幽幷二州)’고 썼다. 유주(幽州)는 현재의 북경 부근이고 병주는 그 서쪽이다. ‘한서(漢書)’나 ‘후한서(後漢書)’는 고구려와 예맥을 같은 세력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신대왕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곧이어 선비와 함께 한나라를 보복 공격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와 선비는 이렇듯 공동 군사작전을 펼칠 정도로 강한 동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이덕일 사랑] 문소황후(文昭皇后)
  •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2.16 18:48
    •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북위(北魏)의 중흥군주 효문제(孝文帝:재위 471~499)의 황후는 고구려 출신 고씨이다. ‘위서(魏書)’ 문소황후(文昭皇后) 고씨 열전에 따르면 그녀가 어릴 때 집안에 서 있는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뜨겁게 비췄다. 이를 피해 동서로 옮겼으나 햇빛은 따라와 비췄다. 같은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부친 고양(高?)은 요동(遼東) 사람 민종(閔宗)에게 그 뜻을 물었다. 요동 사람이란 고구려 출신이란 뜻이다. 그는 “이는 기이한 징조로서 말할 수 없이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무릇 해라는 것은 임금(君人)의 덕이요, 제왕의 상징이다. 햇빛이 여인의 몸에 비치면 반드시 은명(恩命)이 미친다”라고 덧붙였다.

      ‘삼국사기’ 동명성왕 조에서 부여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방안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췄다. 몸을 이끌어 피하니 햇빛이 또 따라가 비췄다”라고 전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렇게 낳은 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칭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태양을 숭배했음을 말해준다. 이런 전통이 북위로 이주한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 계승돼 내려온 것이다. 양달과 응달이나 고조선 수도 아사달 등은 모두 햇빛과 관련된우리말이다.

      햇빛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 세종 선무제(宣武帝:재위 500~515)이고, 둘째가 광평왕(廣平王),딸이 장락공주(長樂公主)이다. 문소황후는 효문제 20년(496) 북행궁(北行宮)에서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는 도중 돌연사한다. 태자 생모에 대한 선비족 탁발씨들의 견제가 심했다는 점에서 의문사로 볼 수 있다. 그녀의 재궁(梓宮:임금·황후의 시신을 모신 관)은 낙양 서쪽에 마련됐다. 세종은 즉위 후 모친을 문소황태후로 추존하고 손자 효명제(孝明帝)는 효문제의 장릉(長陵) 가까운 곳으로 천장(遷葬)했다. 이것이 영릉(寧陵)이다. ‘중국 후비 능묘(后妃 陵墓)’에 따르면 능 높이 23m, 둘레 170m나 되는 거대한 규모다. 1946년 도굴범이 능을 파헤치다가 묘지(墓誌)가 나와 황후릉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설날에 제사 올리는 후손들이 있다면 황후의 혼령이 기뻐할 것이다.
  • 출처 : 선비족은
    글쓴이 : 아사달메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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