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 (24) 새로운 덕담, 건부화(健富和) ]

kongbak 2007. 2. 21. 16:41
[ (24) 새로운 덕담, 건부화(健富和) ]
함께 살아가는 '화목의 시대'

신년 세배를 받은 어른들은 후손들을 위해 덕담을 한다. 주로 부귀영화(富貴榮華)에 대한 내용이 많다. 이제 덕담도 시대에 맞게 손질되어야할 것 같다. 귀(貴)란 벼슬을 뜻한다. 하지만 높은 자리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낭떠러지로 내모는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고위 공직자의 어머니가 있었다. 손가락엔 누런 금반지를 끼고 비단 옷을 걸쳤지만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연은 이랬다.

 부모는 행상이며 폐지 줍기며 닥치는 대로 날품을 팔았다. 남들이 버린 옷을 손질해 입어서 옷 한 벌 산적 없고, 겨울엔 손이 터지고 볼 살이 갈라져도 총명한 자식만 생각하면 물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이런 부모를 보면서 자식은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했다. 자식도 먹고사는 걱정 대신 오직 고시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부모님의 정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대망의 고위공직자가 되었다. 달동네에 축하 현수막이 걸리고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평소 거지 취급하던 아랫동네 권세가들과 사장님들도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머리를 조아렸다.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닦아내며 앞으로 누릴 부귀영화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있었다. 너도 나도 이 집안을 '입신양명'의 귀감으로 입에 올렸다.

 수십 년이 흘러, 어머니 얼굴이 다시 초췌해졌다. 자식이 이름을 날리고 승진을 거듭했고 집의 평수도 늘려갔지만 손자들이 하나 같이 신체나 정신 장애를 겪고 있었다. 손자들 재롱에 하루해가 짧아야하는데 대소변 받고 간병해야하는 긴 하루를 보냈다. 처음에는 목에 힘주고 마을을 드나들었지만 이제는 이웃들 눈초리를 피해 다녀야 했다. 차라리 고되었던 지난날이 더 맘 편했다. 구명시식에서 밝혀진 원인은 다름 아닌 '벼슬' 때문이었다. 한 영가가 나타나 격노했다.

 "네 자식들이 저런 꼴이 되니 부모로서 기분이 어떠냐. 나는 공직자인 네 아들 때문에 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비참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을 망쳤다. 아직도 그 위세가 그렇게 대단하더냐. 이제 내 마음을 조금 알겠지."

 아들은 공무를 충실히 수행했지만 인간의 삶이나 마음까지 단죄할 수는 없었다. 아들의 공무집행으로 감옥에 갔다가 가정이 파탄나서 한을 품고 죽은 영가였다.

 귀(貴)의 정점은 대통령이다. 어릴 때는 누구나 한번쯤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른들 앞에서 포부를 밝힌다. 역대 대통령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향하는 말로를 보면서 높은 벼슬을 바라는 덕담이 무색해 진다. 맹목적으로 높은 벼슬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악담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화(榮華)'란 번영을 말한다. 자식이나 사업이 잘 되길 바란다. 번성하는 것은 좋은데 그만 이권의 충돌이 생긴다. 합법적으로 세를 확장한다해도 타인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는 번영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부자(富者)가 삼대를 못 간다고 했다. 수십 대를 잇는 부자 가문의 신조는 끊임없는 세력 확장이 아니라 '화목'이다. 이웃과 사회와 공존하는 역할을 찾는 것이다. 남을 짓밟고 올라간 이는 남에게 짓밟혀 쇠락하게 되어 있다. 공존의 번영이 긴요하다.

 덕담(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어야 한다. 바야흐로 서비스시대. 요즘은 어딜 가든 자기도 모르게 고객님으로 떠받들어진다. 어느 회사든지 사원들에게 고객에 대한 친절과 말씨를 교육한다.

 차길진 법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는 말한다.

 "얼굴이란 '자기 얼이 깃든 굴'이란 뜻이다. 말이란 '마음의 알맹이', 삶이란 '사람'을 줄인 말이다. 아무리 성형을 하고 피부를 가꾸어도 자기 얼을 가꾸지 못하면 허사다. 말의 성찬이 아무리 기름져 흘러도 마음이 실리지 못하면 껍질에 불과하다. 거창한 사상을 펼쳐도 사람을 빼고는 삶을 얘기할 수는 없다. 이제 덕담에서 귀는 빠지고 건강이 들어가고, 번영은 화목으로 바뀌어서 건부화(健富和)가 제격이다."

작가/김영수(paanmiso@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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