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 (16) 화내는 부처님 ]

kongbak 2007. 1. 8. 14:07
[ (16) 화내는 부처님 ]
원한은 감정처리 미숙에서 시작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서 중에 '원한'이 있다. 보통 원과 한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원한'으로 쓴다. 그러나 원(怨)과 한(恨)은 다르다. 한은 진화의 에너지가 되지만 원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가령, 조선시대 홍길동이 서자로서 신분 차별 없는 이상세계를 꿈꾸었다면 한이 되지만, 자신을 모멸한 상대방과 사회 탓을 하고 복수하는데 뜻을 두었다면 원이 된다. 원은 '감정처리 미숙'에서 비롯된다.

 수년전 개봉한 국내 영화 '바람난 가족'의 도입부는 이렇다. 검사인 남자주인공이 암매장된 시체 발굴 현장을 둘러본다. 치정에 얽힌 사건임을 확인하더니 한마디 내뱉는다.

 "이렇게 원한이 쌓이도록 (가족으로) 살아갈 필요가 뭐 있어…."

 남녀의 본질은 사랑(자유 연애)이다. 그러나 결혼과 가족제도가 개입하면서 마치 남녀 간 사랑을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와 같은 식으로 재산권 비슷한 소유권으로 착각하게 된다. 사랑의 소유개념과 자유연애관이 엇갈리면서 질투가 일어나고 죽고 죽이는 참상이 벌어진다. 일반 영화에서는 이런 치정 사건을 약자(피해자)의 입장에서 법적 정의에 의존한 소송이나 비정상적 보복으로 한풀이하는 줄거리로 카타르시스를 유도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당사자들 간의 흔쾌한 감정처리가 필요했다는 독특한 시각을 선보인다.

 이 시대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사랑, 돈, 화(분노)일 것이다. 기존의 종교, 도덕, 철학에서 모두 금기, 금욕 사항이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저승 사람이나 신청한 이승 사람 모두 이런 문제로 원한이 응어리져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사랑하고, 돈을 벌며, 화를 내야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영혼들. 근엄하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이 이 시대의 원을 양산한 건 아닐까. 사랑하는 부처님, 돈 버는 부처님, 화내는 부처님이 이 시대에 절실한 이유다.

 얼마 전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공연이 끝나고 스태프가 관객들 앞에서 차길진 법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에게 혼쭐나고 있었다. '무성의한 공연'이 표면상 문제였다. 스태프 중에는 차법사의 친아들도 끼어 있었다. 격노한 모습이 여과 없이 공개되었다. 다음 날에는 출연자들이 참담하게 깨졌다. 차법사가 출연자들에게 물었다.

 "공연이 잘 되었느냐?"

 "잘되지 못했지만 교통사고로 목과 허리를 다친 출연자의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출연자에게 공연 직전까지 노래가 엉망이라고 직언해주는 사람이 왜 하나도 없었는가."

 "……."

 "자기를 솔직히 평해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평소 처신을 잘못했던 것이고, 주위 사람들은 평소 쌓은 미움을 '상대방의 장점만 본다'는 명분 아래 '혼자 잘 해봐라'하고 방치한 게 아닌가. 서로들 평상심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야 말로 '용서로 복수'를 키운 것 아닌가. 자비라는 가식이 무성의한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그래도 관객들이 보는데서 스태프들을 혼낼게 아니라 조용히 불러서 체면을 세워주면서 개선을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너와 나를 속이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발생한 감정을 참거나 삭이는 것은 화장실 안가고 참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좋은 모양새'를 따지다보니 생긴 일임을 아직도 모르느냐며 거두절미. 이내 물 컵이 튀고 불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쳐도 허공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차법사의 감정처리 지론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자비와 사랑을 혼동하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자비로 포장할 때 자기도 모르게 큰 죄를 쌓아둘 수 있다. 잠재의식 속에 감정 응어리가 맺힌 자비는 솔직한 꾸짖음보다 못하다. 우주에 사랑은 있어도 자비는 없다. 적당히 감정을 숨기면 뒤에서 원(怨)이 쌓이기 마련이다."

 한차례 눈물을 쏙 뺀 사람들은 이날 뒤끝에 이렇게 말했다.

 "드러내놓고 혼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작가/김영수(paanmiso@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