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시대별, 지역별 문화 현황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이상 안원전 주 - 계속)
(앙소문화 전기 고고학 문화 분포도)

(1번) 홍산문화
북쪽 하북성 발해만에는 동이족 환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산(紅山) 문화가 존재
(2번) 후강(后岡) 1기 문화
동쪽으로 산동반도 바로 위의 후강(后岡) 1기 문화가 존재
(4번) 대문구 문화
동이족 은나라의 유적지로 청구 배달국의 후예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족이 건설한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존재
(6번) 대계(大溪) 문화
남쪽 장강 중류의 동이족의 초나라 지역에는 대계(大溪) 문화 유적지가 존재
(5번)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
양자강 하류의 전통적 동이 제 족의 웅거지에는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가 존재
(3번)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가 있는 섬서성 지역
이들 유적지 중에서 앙소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4번의 대문구 문화”와 “6번의 대계문화 유적지”이다.
(참고 : 장강(양자강) 중하류 지구 신석기 시대 중기 문화 분포도)
장강 상류인 호남성 동정호의 팽두산(彭頭山)과 동이족인 묘족(苗族)과 같은 동이족인 월족(越族)이 밀집해 웅거한 장강 하류의 절강성 상해일대(양저문화)와 샤오싱(소흥)부근의 하모도(河姆渡)에 밀집되어있음을 본다.
장강 유역은 동이 구려족과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 백월족(百越族), 동이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웅거지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문헌 중에 일찍이 원시, 낙후된 미개지 땅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곤 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출현의 고고학적인 발견은 그 출현 연대가 황하유역에 비해 늦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문화발전 수준 역시 결코 북방 동이족의 황하유역보다 낮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000년 내지 3300년 전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형상은 수공업 및 농업이 한결같이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동이족이 웅거한 상고시기의 장강 유역의 정황은 지나 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도 그 요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하모도 유적지를 가면 태양신의 유적지라 칭하는데 이는 역시 태호복희와 태양신으로 추앙되덤 염제 신농의 농경문화 덕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망을 만든 수렵문화의 복희와 농기구를 만든 염제를 두고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1) >
(그림1) 홍산(紅山)문화 중요 유적지 분포도

(그림2) 홍산(紅山)을 멀리서 본 조망도

홍산은 적봉시(赤峰市) 구(區) 북부 근교인 영금하(英金河) 동쪽 해안에 있다.
산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이 자홍색(?紅色:붉은흙 자)을 띠고 있어
홍산(紅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요하(遼河)유역의 제사(祭祀)중심)
1) 유목과 농업이 서로 만나는 홍산(紅山)문화
홍산(紅山)문화는
동북지구의 흥륭와(興隆?) 문화와
조보구(趙寶溝) 문화를 계승 발전해 일어난 원시문화로
지금으로부터 5천년에서 6천년 사이의 문화이다.
앙소(仰韶)문화와 서로 인근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홍산문화는
정미(精美)로운 옥기(玉器) 및 대형 종교건축으로 이름을 드러냈는데,
이는 북방 앙소문화의 강하고 굳센 파트너였다.
요녕(遼寧) 서부 대능하(大凌河) 유적지에서 발굴된 지금으로부터 5 천년전의 종교유적지
- 제단(祭壇),
- 여신묘(女神廟),
- 적석총 등
이들 건축 유적지는 50평방 천M를 점유하고 있으며,
순연산(順沿山)의 산세의 좌향은
남북축의 선으로 배열되어 달려가 질서있는 산세를 조성하고 있으니,
이는 홍산문화 최고등급의 정치중심이다.
홍산문화는 이미 원시씨족취락 단계를 넘어섰으며,
다시 고 일급의 사회조직인 성방식(城邦式) 고국(古國)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조기(早期) 성방식(城邦式)의 원시국가가 이미 북방에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농업발달)
6천년전의 동북 대부분 지구의 기후는
오늘날의 요남(遼南) 혹 기북(冀北)보다 농업생산에 상당히 유리했다.
동북지구의
- 흥륭와(興隆?),
- 신락(新樂),
- 홍산(紅山),
- 부하(富河) 문화 등은 모두 농업을 주로 했다.
홍산(紅山)문화는
농업이 발달하여 생산공구 가운데는 크고
- 단단한 돌호미(石鋤),
- 돌대패(石?)가 있으며,
- 타제(打製)로 만든것과 마제(磨製)로 만든 것도 있으며,
- 또 석도(石刀)가 적지않게 있다.
유목과 어렵이 거듭 중시되어,
유적지 가운데는 돼지, 소, 양의 골격이 적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옥기(玉器)도
돼지머리형 옥장식 및 석족(石鏃), 골족(骨鏃), 창(矛) 등 수렵공구와
사슴, 노루 등의 동물골격이 발굴되었다.
도기 제조기술이 성숙해
협사도(夾砂陶)로 취사그릇을 제조했으니,
대표적인 그릇 형태는 입이 크고 배가 깊은 항아리(大口深腹罐)으로,
몸체에는 갈 “지(之)”자의 문양 장식이 많으며,
그릇 아래는 편직물의 흔적이 있다.
또 북방의 회색(灰色 혹 자색(紫色) 그림으로 제작한 도기가 적지 않게 보인다.
(그림3) 옥부엉이(玉?)와 옥조(玉鳥)

「시경(詩經)」<상송(商頌)?현조(玄鳥)>에 설명하기를
“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해 내려가 상(商)을 낳게 하다(天命玄鳥,降而生商)”,
연(燕)이 곧 현조(玄鳥)니,
고대 선주민(先民)인 동이족은 새(鳥)를 사랑해 부락 도등(圖騰:부대 상징깃발)으로 삼았다.
지금의 북경(北京) 옛 칭호는 바로 “연(燕)”이라 칭했으며,
북경 뒷 산맥을 칭해 “연산(燕山)”이라 불렀으니
이는 바로 아주 먼 옛날에 연(燕)의 자족(子族)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이 모두 동이족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
(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
(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안원전 주)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
「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 안원전 주)
(그림 4) 돼지머리형 옥패(猪首形玉?)
돼지는 당시 주요한 가축의 하나로,
사람들은 돼지를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는 배장(陪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옥장식 제조 또한 돼지를 애용해 주제로 삼았다.

(그림 5) 제비형 도기항아리(燕形陶壺)
홍산문화의 도기제조업은 상당히 성숙되어, 공예수준이 높았다.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형상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시끄럽게 짹짹거리며 어미가 먹여줄 것을 기다리는 어린 제비형상이다.
이는 실용적인 협사(夾砂) 홍도(紅陶) 물동이로 이 역시 제기(祭器)다.

<종교적 의의(意義)를 갖는 옥기(玉器)>
홍산(紅山)문화의 옥기는 특별히 그 늦은 시기의 작품이 아주 발달하여,
보통의 취락 유적지조차 정교하고 뛰어난 옥기가 출토된다.
이들 옥기는 구멍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이는 패물장식으로, 동물형상과 장식품 등 두 종류가 흔히 보인다.
홍산(紅山)문화 옥기는 제사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적 의미가 많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돼지,용의 형상, 구운형(勾云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 안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산 정상 중심에 있는 대묘(大墓)의 묘 주인 손에서 옥구(玉龜)가 쥐어진 채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씨족 구성원의 등급분화가 이미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단 수령이 이미 출현하여 옥기(玉器)가 특수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찬 조소예술)
홍산(紅山) 문화 제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동물들과 인물의 진흙 소상(塑像)이 있는데 이들은 채색그림을 그려 넣은
돼지, 용, 큰 새의 잔체(殘體) 등이다.
그 가운데,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제사 유적지 가운데는,
전신 인물 소상(塑像)이 출토되고,
우하량(牛河梁)에서 출토된 가장 큰 인물 소상(塑像)은
실재 사람의 세 배 크기에 근접하는 것으로 추산되어
그 완전한 입상(立像)은 마땅히 4-5M높이에 달한다.
이 인물상은 비록 다수가 손상되어 잔해만 남아 있지만,
건장하고 풍체좋은 허우대, 사지는, 거듭 고박(古朴)하고 조확(粗?), 순후(淳厚)한 미가 있으니,
가히 이는 대륙에서 가장 이른 인체 조형 예술품으로 추산된다.
홍산(紅山)문화의 진흙 소상(塑像)은,
말할 것 없이 인물 또는 동물로 한결같이 그 비례가 적당하여 가장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2) >
(그림 1) 우하량(牛河梁) 대형산대(大型山臺) 및 여신묘(女神廟)
우하량 유적지의 대형산대 및 여신묘는 유적지군의 중심이다.

(묘당(廟堂)에 오른 여신)
홍산(紅山) 문화의 사회는 종교가 발달한 사회로 그 출현규모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종교중심이다.
지금의 요녕(遼寧)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에서 발굴된 여신묘(女神廟)는
제단과 적석총으로 조성된 대형 종교유적지이다.
산 정상에 건축된 여신묘(女神廟)는 아주 다양한 많은 여신들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으며,
아울러 용 머리, 맹금류의 소상(塑像) 및 제사용품이 발굴되었으니,
이는 이미 신묘(神廟)의 공능(功能)을 구비하여,
신권과 왕권이 합일된 병아리 형태가 출현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런 류의 종교발전의 성숙은 통치자 권력의 결합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부계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중의 하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우하량(牛河梁) 주량북산(主梁北山) 언덕 정상에 있으며,
언덕 정상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평대(平臺)가 있다.
이곳의 지세는 높고, 좌북면남하여, 무형중에 신성한 자를 보면 위에 있어 높고 장엄하여 신성한 감각을 준다.
묘(廟) 북쪽 18미터 되는 곳에 인공으로 만든
남북 길이 175미터, 동서 길이 약 159미터의 큰 평대(平臺)가 있는데,
주위에는 돌로 겹쳐 쌓았고,
중간에는 통로와 사당을 서로 통하는 길이 있어,
성대한 종교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물 조상(造像)은 여신묘(女神廟)의 주체로 당시 받들어 공양한 신령이다.
또 루공두(鏤孔豆:루는 철장식, 두는 제기이름) 형의 그릇뚜껑은 채도 루공대기(鏤孔大器) 등 제사요품이 있다.
여신묘(女神廟)에서 출토된 인물 소상(塑像)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
공양을 받은 신이 이미 주와 버금으로 나뉘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림 2) 여신묘(女神廟) 유적지

(그림 3) 여신두상(女神頭像)

크기가 실물에 접근하는 여신의 두상은 받들어 공양하는 주신(主神)의 하나다.
황색점토로 풀, 곡식줄기로 이겨 만든다.
겉 표면은 광택제 활석으로 문지르고 안면부위는 홍색을 입히고,
입술은 붉게 칠하고,
눈은 담청색을 옥편을 넣어 눈동자로 삼는다.
이 두상의 윤곽과 전체는 모두 아름답고 양눈은 형형하고 전아(典雅)하고 고귀함을 보여주어
신비로움이 이를 데 없는 상이다.
(그림 4)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

진흙을 이겨 만든 토우상.
원시의 농업사회에 있어 사람들은 대지를 모친으로 여겼으니,
이는 만물을 번식시키고 오곡의 신을 출산하고 마침내 이를 받들어
농업의 풍년수확을 보우하기를 기원 간구했다.
또한 학자들은 이것이 선주민이 조상 선조를 제사하는 우상이라 보고 있다.
(그림 5) 여신묘(女神廟)복원도

여신묘는 주실(主室)과 단실(單室)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양자 사이는 대략 중축선(中軸線)상에 2.05미터 간격이 있다.
그 중 주실(主室)은 북쪽에 있는데,
반지혈식의 토목으로 엮은 건축으로,
남북 총길이 18.4미터, 동서 6.9미터로 평면으로는 아(亞)자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실, 서실로 말미암아 북실과 남실이 조성되어있다.
실내의 담장벽 한 부분은 붉은 색, 백색의 두 가지 색으로 그린 기하학적 회화 벽면을 하고 있다.
단실은 남쪽에 있는 부속건축으로 횡장 6미터, 최관(最寬) 2.65미터다.
여신묘(女神廟)는 총체작으로 주와 버금이 분명하여 대칭분포를 보여준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3) : 우하량(牛河梁) 유적 적석총 >
(그림 1) 대형묘장 시의도(示意圖)

(그림 2)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적석총 건축군은 북쪽으로 여신묘까지 거리가 900미터로,
5기 규모의 거대한 적석총과 1기의 적석제단이 있으며,
동서 한줄로 배열되어 총길이 160미터, 남북 50미터다.
적석총은 방(方)형과 원(圓)형이 있으며,
제단은 3층 정원(正圓)형으로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일정한 규칙을 두어 일자 배열을 하고, 일도(一道)로 구성해 장려한 경관을 보여준다.
우하량 유적지에 있는 이러한 적석총군은 한 군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하량이 당시 아주 많은 사회집단으로 말미암아 종교활동의 장소로
제사 등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
사진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원형 적석총과 왼쪽의 방(方)형 적석총이 보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을 상징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제단과 묘장(墓葬) )
원방각의 문화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다.
천원지방의 묘장은 동이족의 문화로 홍산문화는 대표적인 동이족의 문화다.
홍산문화에서는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동이족의 상징인 호시, 석촉, 실크, 옥 중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새삼 신기한 것이 아니다.
대륙을 말아먹은 동이족의 상고 문화를 감안하면
대륙 곳곳의 상고문화 유적지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가운데 별도로 눈을 번쩍 깨게 하는 유적지는 섬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한 기다.
이들은 돌로 성채와 담장을 쌓고, 돌로 묘를 쌓았으며, 돌로 정상을 북돋았다.
적석총은 네모형(방형)과 원형 2 종류가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과 합치한다.
이들 금자탑식의 높고 큰 적석총과 제단은 같지 않은 규격의 묘장이 있어 상호 유기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같은 종교성지 곳곳의 장관은 계층분화된 인상과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方形)제단은 문명시대의 서광이 뻗쳐 옴을 보여준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묘장은 규모와 부장품의 수량 등에 따라 대, 중, 소 3 종류로 나뉘어,
당시 사회조직 내에 이미 삼엄한 등급차별이 출현했음을 체현하고 있다.
대형 묘(墓)는
왕왕 적석총의 중앙부위에 자리 잡고 있고, 또 묘실면적은 크고, 부장품은 많고 좋다.
중형묘는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고,
소형 묘 역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대형과 중형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옥기(玉器) 등의 부장품이 있으며,
부장품들의 종류와 배열방식은 농후(濃厚)한 종교색채를 띠고 있다.
소형묘장의 수량은 중다(衆多)한데,
부장품으로는 옥기가 적게 보이고 있으며,
중형묘, 대형묘보다 부장품의 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하나같이 부장품이 없다.
적석총내 대묘의 주인은 사후에 홀로 적석총 중앙에 묻혔으며.
그 생전의 혁혁한 지위와 더불어 서로 저울질했으며,
중형묘의 묘주도 마땅히 당시 사회의 상층성원이었으며,
소형묘에 이르러서는 묘주의 신분이 비교적 복잡하여,
그들은 진귀한 옥저(玉猪), 옥룡(玉龍) 등의 부장품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장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지위가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신분이 한결같이 대형,중형 묘주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금자탑 형식의 등급의 묘장은 진일보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데,
홍산(紅山)문화 후기는 말할 것 없이 종교활동 또는 상장(喪葬)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속에는 계층분화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그림 3) 함께 묻은 풍부한 옥기(玉器) 부장품

우하량(牛河梁) 홍산(紅山)문화 유적지 중심
대묘(大墓) 남성 묘주인은 50 수 세. 옥기 7건을 따라 묻었다.
머리 부위에 두 줄기 큰 옥벽(玉璧) 이 놓여 있고,
또 옥환(玉環)과 옥패(玉?)가 놓여있다.
양 손에 쥔 옥 거북은 묘주인이 종교 영수(領袖)의 신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림 4) 옥저용(玉猪龍)

홍산(紅山)문화의 선주민은 오직 옥기(玉器)만을 함께 묻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玉)만을 묻은 매장의 전통은 바로 홍산(紅山)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저용(玉猪龍)을 매장한 주인공은 마땅히 신분이 비교적 높은 인물이다.
(계 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4)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
(홍산문화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 - 성자산(城子山))
(그림 1)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곧
각좌현(?左縣) 대성자(大城子) 동남의 대릉하(大凌河) 서안의 한 산구(山丘) 고지상에 있는데
사방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그림 2) 옥거북(玉?),옥촉(玉?), 갈고리구름형 옥패(勾云形玉?)

(요하(遼河)유역의 제사 중심)
종교의 전파
홍산(紅山)문화 만기(晩期)에 종교 유적지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별도로 중소형의 제사유적지들이 있어,
규모는 우하량(牛河梁)만은 하지 못하나
단, 상호간에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제단이 유사한 제사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원방각의 동이족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단 부근에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지 특유의 유물은 제사용 진흙 채도 통형기(筒亨器) 등
특수한 도기(陶器)와 동물류 그릇, 옥벽(玉璧) 등이다.
최근 발굴된 이런 종류의 유적지는 적게는 3군데 있으며,
그 가운데 동산취(東山嘴)는 중형 유적지에 속하며,
성자산(城子山)과 호두구(胡頭溝)는 소형 유적지에 속한다.
(지모신사(地母神社)-동산취(東山嘴))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하천에 임한 대지(臺地) 상에 건립되어,
건축은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주체로 하여 건축한 단상기지(壇狀基址)로
주위에는 겹쳐 쌓은 석괴(石塊)가 있다.
이곳에는
서로 같지 않은 시기의 유적지 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장소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돼지뼈와 사슴뼈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제사에 희생동물로 바쳐진 것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주로 채도 통형기(筒形器)와 채도 쌍복분(雙腹盆) 등 제사에 사용된 특수도자기이며,
또 쌍룡수(雙龍首) 황형(璜形:璜은 瑞玉,벽옥을 두 쪽 낸 것) 옥장식과
녹송석(綠松石)을 사용해 만든 부엉이(?)가 있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흙을 개어 만든 사람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중에 소형은 머리가 없고 발이 짧은 나체 임신부(孕婦) 입상(立像)이며,
대형인물은 흙덩어리만 약간 남아 받침에 단정히 앉은 반퇴단좌상(盤腿端坐狀)이다.
이들 소상(塑像)은 마땅히 유적지 제사의 주요대상인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성자산(城子山)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능원시(凌源市) 능북향(凌北鄕) 삼관전자(三官甸子)의
서산파(西山坡) 위에 있다.
동북으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와 약 8천미터다.
홍산(紅山)문화 선주민은
일찍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딴 곳으로 가 묘지가 되었다.
현재 유적지 서남에는
한 기의 원각방(圓角方:원각방은 동이족 고유의 특징, 천부경 참조) 형의 방 터가 있으며,
부근에는 1개 2M로 보이는 사각형(方形)의 석퇴(石堆:언덕)가 있는데,
석장(石牆:돌담장)과 더불어 서로 연관이 있다.
석퇴(石堆:언덕)와 멀지 않은 곳에 일단의 쇄석대(碎石帶)가 있으며,
위에는 파쇄된 밑바닥 없는 통형기(筒形器)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성자산(城子山)의 홍산(紅山)문화 묘장(墓葬)은 공히 3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토광(土壙:흙구덩이) 석곽묘(石槨墓)로,
그 중에서 한 기의 묘갱의 혈(穴)은 비교적 크며,
부장품은
갈고리 구름형 옥장식, 말발굽형 옥고(玉?:그릇 둘레의 테), 옥조(玉鳥), 옥월(玉鉞:도끼)과
죽절상(竹節狀) 옥장식 안에 9건의 옥기(玉器)가 있으니,
묘주(墓主)의 신분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이상 안원전 주 - 계속)
(앙소문화 전기 고고학 문화 분포도)

(1번) 홍산문화
북쪽 하북성 발해만에는 동이족 환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산(紅山) 문화가 존재
(2번) 후강(后岡) 1기 문화
동쪽으로 산동반도 바로 위의 후강(后岡) 1기 문화가 존재
(4번) 대문구 문화
동이족 은나라의 유적지로 청구 배달국의 후예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족이 건설한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존재
(6번) 대계(大溪) 문화
남쪽 장강 중류의 동이족의 초나라 지역에는 대계(大溪) 문화 유적지가 존재
(5번)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
양자강 하류의 전통적 동이 제 족의 웅거지에는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가 존재
(3번)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가 있는 섬서성 지역
이들 유적지 중에서 앙소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4번의 대문구 문화”와 “6번의 대계문화 유적지”이다.
(참고 : 장강(양자강) 중하류 지구 신석기 시대 중기 문화 분포도)
장강 상류인 호남성 동정호의 팽두산(彭頭山)과 동이족인 묘족(苗族)과 같은 동이족인 월족(越族)이 밀집해 웅거한 장강 하류의 절강성 상해일대(양저문화)와 샤오싱(소흥)부근의 하모도(河姆渡)에 밀집되어있음을 본다.
장강 유역은 동이 구려족과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 백월족(百越族), 동이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웅거지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문헌 중에 일찍이 원시, 낙후된 미개지 땅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곤 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출현의 고고학적인 발견은 그 출현 연대가 황하유역에 비해 늦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문화발전 수준 역시 결코 북방 동이족의 황하유역보다 낮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000년 내지 3300년 전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형상은 수공업 및 농업이 한결같이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동이족이 웅거한 상고시기의 장강 유역의 정황은 지나 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도 그 요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하모도 유적지를 가면 태양신의 유적지라 칭하는데 이는 역시 태호복희와 태양신으로 추앙되덤 염제 신농의 농경문화 덕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망을 만든 수렵문화의 복희와 농기구를 만든 염제를 두고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1) >
(그림1) 홍산(紅山)문화 중요 유적지 분포도

(그림2) 홍산(紅山)을 멀리서 본 조망도

홍산은 적봉시(赤峰市) 구(區) 북부 근교인 영금하(英金河) 동쪽 해안에 있다.
산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이 자홍색(?紅色:붉은흙 자)을 띠고 있어
홍산(紅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요하(遼河)유역의 제사(祭祀)중심)
1) 유목과 농업이 서로 만나는 홍산(紅山)문화
홍산(紅山)문화는
동북지구의 흥륭와(興隆?) 문화와
조보구(趙寶溝) 문화를 계승 발전해 일어난 원시문화로
지금으로부터 5천년에서 6천년 사이의 문화이다.
앙소(仰韶)문화와 서로 인근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홍산문화는
정미(精美)로운 옥기(玉器) 및 대형 종교건축으로 이름을 드러냈는데,
이는 북방 앙소문화의 강하고 굳센 파트너였다.
요녕(遼寧) 서부 대능하(大凌河) 유적지에서 발굴된 지금으로부터 5 천년전의 종교유적지
- 제단(祭壇),
- 여신묘(女神廟),
- 적석총 등
이들 건축 유적지는 50평방 천M를 점유하고 있으며,
순연산(順沿山)의 산세의 좌향은
남북축의 선으로 배열되어 달려가 질서있는 산세를 조성하고 있으니,
이는 홍산문화 최고등급의 정치중심이다.
홍산문화는 이미 원시씨족취락 단계를 넘어섰으며,
다시 고 일급의 사회조직인 성방식(城邦式) 고국(古國)을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조기(早期) 성방식(城邦式)의 원시국가가 이미 북방에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농업발달)
6천년전의 동북 대부분 지구의 기후는
오늘날의 요남(遼南) 혹 기북(冀北)보다 농업생산에 상당히 유리했다.
동북지구의
- 흥륭와(興隆?),
- 신락(新樂),
- 홍산(紅山),
- 부하(富河) 문화 등은 모두 농업을 주로 했다.
홍산(紅山)문화는
농업이 발달하여 생산공구 가운데는 크고
- 단단한 돌호미(石鋤),
- 돌대패(石?)가 있으며,
- 타제(打製)로 만든것과 마제(磨製)로 만든 것도 있으며,
- 또 석도(石刀)가 적지않게 있다.
유목과 어렵이 거듭 중시되어,
유적지 가운데는 돼지, 소, 양의 골격이 적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옥기(玉器)도
돼지머리형 옥장식 및 석족(石鏃), 골족(骨鏃), 창(矛) 등 수렵공구와
사슴, 노루 등의 동물골격이 발굴되었다.
도기 제조기술이 성숙해
협사도(夾砂陶)로 취사그릇을 제조했으니,
대표적인 그릇 형태는 입이 크고 배가 깊은 항아리(大口深腹罐)으로,
몸체에는 갈 “지(之)”자의 문양 장식이 많으며,
그릇 아래는 편직물의 흔적이 있다.
또 북방의 회색(灰色 혹 자색(紫色) 그림으로 제작한 도기가 적지 않게 보인다.
(그림3) 옥부엉이(玉?)와 옥조(玉鳥)

「시경(詩經)」<상송(商頌)?현조(玄鳥)>에 설명하기를
“하늘이 현조(玄鳥)를 명해 내려가 상(商)을 낳게 하다(天命玄鳥,降而生商)”,
연(燕)이 곧 현조(玄鳥)니,
고대 선주민(先民)인 동이족은 새(鳥)를 사랑해 부락 도등(圖騰:부대 상징깃발)으로 삼았다.
지금의 북경(北京) 옛 칭호는 바로 “연(燕)”이라 칭했으며,
북경 뒷 산맥을 칭해 “연산(燕山)”이라 불렀으니
이는 바로 아주 먼 옛날에 연(燕)의 자족(子族)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으니
이 모두 동이족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 )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
(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저강( 羌)계는 장(藏)족을 이루고 있는 제 1의 기원민족이자 근간민족인데
(신농씨 직계후예임은 앞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은나라 때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으며,
춘추시대의 서융(西戎) 대도(大都)가 곧 이 부족이다.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안원전 주)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황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
「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 안원전 주)
(그림 4) 돼지머리형 옥패(猪首形玉?)
돼지는 당시 주요한 가축의 하나로,
사람들은 돼지를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는 배장(陪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옥장식 제조 또한 돼지를 애용해 주제로 삼았다.

(그림 5) 제비형 도기항아리(燕形陶壺)
홍산문화의 도기제조업은 상당히 성숙되어, 공예수준이 높았다.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형상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시끄럽게 짹짹거리며 어미가 먹여줄 것을 기다리는 어린 제비형상이다.
이는 실용적인 협사(夾砂) 홍도(紅陶) 물동이로 이 역시 제기(祭器)다.

<종교적 의의(意義)를 갖는 옥기(玉器)>
홍산(紅山)문화의 옥기는 특별히 그 늦은 시기의 작품이 아주 발달하여,
보통의 취락 유적지조차 정교하고 뛰어난 옥기가 출토된다.
이들 옥기는 구멍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이는 패물장식으로, 동물형상과 장식품 등 두 종류가 흔히 보인다.
홍산(紅山)문화 옥기는 제사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적 의미가 많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돼지,용의 형상, 구운형(勾云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 안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산 정상 중심에 있는 대묘(大墓)의 묘 주인 손에서 옥구(玉龜)가 쥐어진 채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씨족 구성원의 등급분화가 이미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단 수령이 이미 출현하여 옥기(玉器)가 특수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찬 조소예술)
홍산(紅山) 문화 제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동물들과 인물의 진흙 소상(塑像)이 있는데 이들은 채색그림을 그려 넣은
돼지, 용, 큰 새의 잔체(殘體) 등이다.
그 가운데,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제사 유적지 가운데는,
전신 인물 소상(塑像)이 출토되고,
우하량(牛河梁)에서 출토된 가장 큰 인물 소상(塑像)은
실재 사람의 세 배 크기에 근접하는 것으로 추산되어
그 완전한 입상(立像)은 마땅히 4-5M높이에 달한다.
이 인물상은 비록 다수가 손상되어 잔해만 남아 있지만,
건장하고 풍체좋은 허우대, 사지는, 거듭 고박(古朴)하고 조확(粗?), 순후(淳厚)한 미가 있으니,
가히 이는 대륙에서 가장 이른 인체 조형 예술품으로 추산된다.
홍산(紅山)문화의 진흙 소상(塑像)은,
말할 것 없이 인물 또는 동물로 한결같이 그 비례가 적당하여 가장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2) >
(그림 1) 우하량(牛河梁) 대형산대(大型山臺) 및 여신묘(女神廟)
우하량 유적지의 대형산대 및 여신묘는 유적지군의 중심이다.

(묘당(廟堂)에 오른 여신)
홍산(紅山) 문화의 사회는 종교가 발달한 사회로 그 출현규모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종교중심이다.
지금의 요녕(遼寧)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에서 발굴된 여신묘(女神廟)는
제단과 적석총으로 조성된 대형 종교유적지이다.
산 정상에 건축된 여신묘(女神廟)는 아주 다양한 많은 여신들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으며,
아울러 용 머리, 맹금류의 소상(塑像) 및 제사용품이 발굴되었으니,
이는 이미 신묘(神廟)의 공능(功能)을 구비하여,
신권과 왕권이 합일된 병아리 형태가 출현되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런 류의 종교발전의 성숙은 통치자 권력의 결합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부계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중의 하나이다.
여신묘(女神廟)는 우하량(牛河梁) 주량북산(主梁北山) 언덕 정상에 있으며,
언덕 정상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평대(平臺)가 있다.
이곳의 지세는 높고, 좌북면남하여, 무형중에 신성한 자를 보면 위에 있어 높고 장엄하여 신성한 감각을 준다.
묘(廟) 북쪽 18미터 되는 곳에 인공으로 만든
남북 길이 175미터, 동서 길이 약 159미터의 큰 평대(平臺)가 있는데,
주위에는 돌로 겹쳐 쌓았고,
중간에는 통로와 사당을 서로 통하는 길이 있어,
성대한 종교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물 조상(造像)은 여신묘(女神廟)의 주체로 당시 받들어 공양한 신령이다.
또 루공두(鏤孔豆:루는 철장식, 두는 제기이름) 형의 그릇뚜껑은 채도 루공대기(鏤孔大器) 등 제사요품이 있다.
여신묘(女神廟)에서 출토된 인물 소상(塑像)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
공양을 받은 신이 이미 주와 버금으로 나뉘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림 2) 여신묘(女神廟) 유적지

(그림 3) 여신두상(女神頭像)

크기가 실물에 접근하는 여신의 두상은 받들어 공양하는 주신(主神)의 하나다.
황색점토로 풀, 곡식줄기로 이겨 만든다.
겉 표면은 광택제 활석으로 문지르고 안면부위는 홍색을 입히고,
입술은 붉게 칠하고,
눈은 담청색을 옥편을 넣어 눈동자로 삼는다.
이 두상의 윤곽과 전체는 모두 아름답고 양눈은 형형하고 전아(典雅)하고 고귀함을 보여주어
신비로움이 이를 데 없는 상이다.
(그림 4) 도소잉부상(陶塑孕婦像)

진흙을 이겨 만든 토우상.
원시의 농업사회에 있어 사람들은 대지를 모친으로 여겼으니,
이는 만물을 번식시키고 오곡의 신을 출산하고 마침내 이를 받들어
농업의 풍년수확을 보우하기를 기원 간구했다.
또한 학자들은 이것이 선주민이 조상 선조를 제사하는 우상이라 보고 있다.
(그림 5) 여신묘(女神廟)복원도

여신묘는 주실(主室)과 단실(單室)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양자 사이는 대략 중축선(中軸線)상에 2.05미터 간격이 있다.
그 중 주실(主室)은 북쪽에 있는데,
반지혈식의 토목으로 엮은 건축으로,
남북 총길이 18.4미터, 동서 6.9미터로 평면으로는 아(亞)자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실, 서실로 말미암아 북실과 남실이 조성되어있다.
실내의 담장벽 한 부분은 붉은 색, 백색의 두 가지 색으로 그린 기하학적 회화 벽면을 하고 있다.
단실은 남쪽에 있는 부속건축으로 횡장 6미터, 최관(最寬) 2.65미터다.
여신묘(女神廟)는 총체작으로 주와 버금이 분명하여 대칭분포를 보여준다.
(계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3) : 우하량(牛河梁) 유적 적석총 >
(그림 1) 대형묘장 시의도(示意圖)

(그림 2)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적석총 건축군은 북쪽으로 여신묘까지 거리가 900미터로,
5기 규모의 거대한 적석총과 1기의 적석제단이 있으며,
동서 한줄로 배열되어 총길이 160미터, 남북 50미터다.
적석총은 방(方)형과 원(圓)형이 있으며,
제단은 3층 정원(正圓)형으로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일정한 규칙을 두어 일자 배열을 하고, 일도(一道)로 구성해 장려한 경관을 보여준다.
우하량 유적지에 있는 이러한 적석총군은 한 군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하량이 당시 아주 많은 사회집단으로 말미암아 종교활동의 장소로
제사 등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
사진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원형 적석총과 왼쪽의 방(方)형 적석총이 보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을 상징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제단과 묘장(墓葬) )
원방각의 문화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다.
천원지방의 묘장은 동이족의 문화로 홍산문화는 대표적인 동이족의 문화다.
홍산문화에서는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동이족의 상징인 호시, 석촉, 실크, 옥 중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새삼 신기한 것이 아니다.
대륙을 말아먹은 동이족의 상고 문화를 감안하면
대륙 곳곳의 상고문화 유적지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가운데 별도로 눈을 번쩍 깨게 하는 유적지는 섬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한 기다.
이들은 돌로 성채와 담장을 쌓고, 돌로 묘를 쌓았으며, 돌로 정상을 북돋았다.
적석총은 네모형(방형)과 원형 2 종류가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과 합치한다.
이들 금자탑식의 높고 큰 적석총과 제단은 같지 않은 규격의 묘장이 있어 상호 유기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같은 종교성지 곳곳의 장관은 계층분화된 인상과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方形)제단은 문명시대의 서광이 뻗쳐 옴을 보여준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묘장은 규모와 부장품의 수량 등에 따라 대, 중, 소 3 종류로 나뉘어,
당시 사회조직 내에 이미 삼엄한 등급차별이 출현했음을 체현하고 있다.
대형 묘(墓)는
왕왕 적석총의 중앙부위에 자리 잡고 있고, 또 묘실면적은 크고, 부장품은 많고 좋다.
중형묘는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고,
소형 묘 역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대형과 중형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옥기(玉器) 등의 부장품이 있으며,
부장품들의 종류와 배열방식은 농후(濃厚)한 종교색채를 띠고 있다.
소형묘장의 수량은 중다(衆多)한데,
부장품으로는 옥기가 적게 보이고 있으며,
중형묘, 대형묘보다 부장품의 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하나같이 부장품이 없다.
적석총내 대묘의 주인은 사후에 홀로 적석총 중앙에 묻혔으며.
그 생전의 혁혁한 지위와 더불어 서로 저울질했으며,
중형묘의 묘주도 마땅히 당시 사회의 상층성원이었으며,
소형묘에 이르러서는 묘주의 신분이 비교적 복잡하여,
그들은 진귀한 옥저(玉猪), 옥룡(玉龍) 등의 부장품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장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지위가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신분이 한결같이 대형,중형 묘주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금자탑 형식의 등급의 묘장은 진일보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데,
홍산(紅山)문화 후기는 말할 것 없이 종교활동 또는 상장(喪葬)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속에는 계층분화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그림 3) 함께 묻은 풍부한 옥기(玉器) 부장품

우하량(牛河梁) 홍산(紅山)문화 유적지 중심
대묘(大墓) 남성 묘주인은 50 수 세. 옥기 7건을 따라 묻었다.
머리 부위에 두 줄기 큰 옥벽(玉璧) 이 놓여 있고,
또 옥환(玉環)과 옥패(玉?)가 놓여있다.
양 손에 쥔 옥 거북은 묘주인이 종교 영수(領袖)의 신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림 4) 옥저용(玉猪龍)

홍산(紅山)문화의 선주민은 오직 옥기(玉器)만을 함께 묻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玉)만을 묻은 매장의 전통은 바로 홍산(紅山)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저용(玉猪龍)을 매장한 주인공은 마땅히 신분이 비교적 높은 인물이다.
(계 속)
(출처) http://www.cheramia.net
< 홍산(紅山)문화 (자료4)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
(홍산문화 :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 - 성자산(城子山))
(그림 1)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곧
각좌현(?左縣) 대성자(大城子) 동남의 대릉하(大凌河) 서안의 한 산구(山丘) 고지상에 있는데
사방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그림 2) 옥거북(玉?),옥촉(玉?), 갈고리구름형 옥패(勾云形玉?)

(요하(遼河)유역의 제사 중심)
종교의 전파
홍산(紅山)문화 만기(晩期)에 종교 유적지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별도로 중소형의 제사유적지들이 있어,
규모는 우하량(牛河梁)만은 하지 못하나
단, 상호간에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제단이 유사한 제사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원방각의 동이족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단 부근에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지 특유의 유물은 제사용 진흙 채도 통형기(筒亨器) 등
특수한 도기(陶器)와 동물류 그릇, 옥벽(玉璧) 등이다.
최근 발굴된 이런 종류의 유적지는 적게는 3군데 있으며,
그 가운데 동산취(東山嘴)는 중형 유적지에 속하며,
성자산(城子山)과 호두구(胡頭溝)는 소형 유적지에 속한다.
(지모신사(地母神社)-동산취(東山嘴))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하천에 임한 대지(臺地) 상에 건립되어,
건축은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주체로 하여 건축한 단상기지(壇狀基址)로
주위에는 겹쳐 쌓은 석괴(石塊)가 있다.
이곳에는
서로 같지 않은 시기의 유적지 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장소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돼지뼈와 사슴뼈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제사에 희생동물로 바쳐진 것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주로 채도 통형기(筒形器)와 채도 쌍복분(雙腹盆) 등 제사에 사용된 특수도자기이며,
또 쌍룡수(雙龍首) 황형(璜形:璜은 瑞玉,벽옥을 두 쪽 낸 것) 옥장식과
녹송석(綠松石)을 사용해 만든 부엉이(?)가 있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흙을 개어 만든 사람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중에 소형은 머리가 없고 발이 짧은 나체 임신부(孕婦) 입상(立像)이며,
대형인물은 흙덩어리만 약간 남아 받침에 단정히 앉은 반퇴단좌상(盤腿端坐狀)이다.
이들 소상(塑像)은 마땅히 유적지 제사의 주요대상인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성자산(城子山)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능원시(凌源市) 능북향(凌北鄕) 삼관전자(三官甸子)의
서산파(西山坡) 위에 있다.
동북으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와 약 8천미터다.
홍산(紅山)문화 선주민은
일찍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딴 곳으로 가 묘지가 되었다.
현재 유적지 서남에는
한 기의 원각방(圓角方:원각방은 동이족 고유의 특징, 천부경 참조) 형의 방 터가 있으며,
부근에는 1개 2M로 보이는 사각형(方形)의 석퇴(石堆:언덕)가 있는데,
석장(石牆:돌담장)과 더불어 서로 연관이 있다.
석퇴(石堆:언덕)와 멀지 않은 곳에 일단의 쇄석대(碎石帶)가 있으며,
위에는 파쇄된 밑바닥 없는 통형기(筒形器)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성자산(城子山)의 홍산(紅山)문화 묘장(墓葬)은 공히 3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토광(土壙:흙구덩이) 석곽묘(石槨墓)로,
그 중에서 한 기의 묘갱의 혈(穴)은 비교적 크며,
부장품은
갈고리 구름형 옥장식, 말발굽형 옥고(玉?:그릇 둘레의 테), 옥조(玉鳥), 옥월(玉鉞:도끼)과
죽절상(竹節狀) 옥장식 안에 9건의 옥기(玉器)가 있으니,
묘주(墓主)의 신분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출처 : (안원전)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놀라운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2
글쓴이 : 고장난브레이크 원글보기
메모 :
'마이바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발 맛사지 방법 (0) | 2006.07.25 |
---|---|
알아두면 좋은 생활의 지혜 (0) | 2006.07.25 |
[스크랩] 경락의 실체 (0) | 2006.07.24 |
[스크랩] 젊은층 치매인구 증가… (0) | 2006.07.24 |
[스크랩] 건강을 지키는 25가지 방법... (0) | 2006.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