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

콩 이야기

kongbak 2006. 5. 14. 22:58
콩 이야기

         

 ◎2005년 11 월 10 일 경기 파주에서 열린 한국 콩연구회 주최  ‘장단 콩축제’에서 5 공 때 통일원 장관이었던 허문도씨가 발표한  ‘콩재배의 기원 민족에 대하여’라는 9 쪽짜리 논문은 너무나 알려 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단군조선이 세워지기 이전, 한(韓)민족이 중국 북부에서 농경민족으로 정착했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워즈워드, 바이런 등과 더불어 19 세기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으로 꼽히는 윌리엄브레이크(1757~1827, 시집 ‘순결과 체험’)는 사유의 깊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그 자신이 서울대 농과대를 나왔고, 지금도 서울대 농대(농업생명과학대로 개칭됐으며 현재 관악캠퍼스로 이전중임)가 있는 수원에 살고 있는 허 전 장관은 300 여명에 달하는 한국 콩 연구회원들이 콩의 품종이나 재배 연구에 치우쳐 있는데 놀랐다.


그가 섭렵한 동경대 사회과학대 석ㆍ박사과정과 역사공부에 의하면 "한 알의 콩알에서 한(韓)민족과 동북아에서의 이 민족의 유래를 알수 있는데…"도 콩 연구자들이 그렇게 모르는 척 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 전 장관의 한 알의 콩알을 통한 한민족, 아사달에 대한 역사풀이는 길지 않다. 그의 설명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라 신문왕이 결혼할 때인 서기 683 년에 메주(密醬), 된장(시-豆 + 支)이 폐백 물품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 문무왕이 671 년 당의 장군 설인귀웅진도독부를 설치 하려는 것을 막기위해 보낸 항의문에는 "웅진길이 막혀 염시(鹽시-豆 + 支 )가 바닥났다"는 표현이 있다. 이 염시가 "삶은 콩에 콩 누룩을 섞어 소금물에 담궜다가 발효시켜 말린 것"으로 지금은 '청국장'으로 불리는 것이다.

허 전 장관은 또 염시는 전국장으로 불렸으나 근대 들어 된 소리가 유행하면서 청국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말갈의 후예인 청이 한반도에 영향력이 강해진 것은 이씨 조선 중후반이며, 말갈은 농경민족이 아니기에 된장문화, 콩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한(韓)민족은 콩을 재배하게 되었을까.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이며 공자가편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시경(詩經)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기원전 11 세기에 숙(菽)이라는 콩을 채취 했거나 재배했다.

역시 사서오경의 하나로 노(魯) 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공자동시대인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春秋)에도 "가을 초입에 서리가 내려 콩(菽) 농사를 망쳤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는 일성왕때(139년) "서리가 내려 콩농사를 망쳤다"는 춘추의 문구가 그대로 나온다.

허 전 장관의 관심은 이런 콩이 왜 한(韓)민족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는가를 알아 보는 것이었다. 춘추에 따르면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인 기원전 663 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지금 북경 부근 연(燕)나라를 산융(山戎)이 공격하자, 연은 제에 원조를 청했고 제가 산융을 쳤다.

전한(前漢) 시대 역사가인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史記)에는 "제는 북으로 산융을 정벌하고 고족국 지역까지 갔다가 융숙을 얻어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제 환공의 재상이던 관중(管仲)의 기록에도"겨울파와 융숙을 가져와 온 세상에 퍼뜨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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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융숙(戎菽)은 콩이다. 작은 콩이나 강낭콩이 아닌 대두였다. 한민족은 본래 동이족 등과 함께 서융족으로 불렸으며 섬서성에서 연나라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며 산융으로 함께 가 산융족으로 불리게됐다.

그들이 나라를 세운곳이 지금의 요령성, 아사달로 우리가 부르는 조양(朝陽)이며, 나라 이름은 한(韓)씨 조선이었다. [김성호(농업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씨성으로 본 한ㆍ일 민족기원.]

제 환공이 기원전 623 년에 침공하여 대두종자를 거둬간 산융은 한씨조선이며 이때 제나라의 침공의 한계점이었던 고죽(孤竹)은 당서(唐書) 등에 고구려로 나오는 고죽국이 형성된 곳이다. 다시 말해 한민족은 기원전 9 세기에 이미 중국 동북평원의 초입인 조양에 도달해 콩 농사를 시작한 농경민족이었으며 세계에서 어느 민족보다 먼저 콩농사를 지었다.

그래선지 일본 된장인 미소는 미소라고 읽지만 표기는 고려장(醬)으로 하고 있다. '미소'가 '장'이란 이름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사찰이나 군대의 식량인 '낙도' 역시 '전국장'인 청국장이 변형된 것이다. 그 제조 방법이 우리 청국장을 만드는 것과 똑같다. 일본의 미소 문화는 결국 한반도에서 흘러간 것이다.

허 전 장관은 반박하고 있다. 일본이 비록 새로운 '국민역사'를 만들며 일본의 문명과 문화가 야오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 세기. 규슈에서 벼농사를 시작한 한 시대)를 짧게 잡고 죠몬시대(새끼무늬 토기가 발견된 시기)를 1 만년으로 잡아 한반도 유입설을 부인하려 하지만 콩의 역사는 한반도 유입설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미국이 세계 콩의 60 % 가량을 생산하고 있다. 18 세기 이후에 일어난 현상이다.

아사달 민족인 한민족의 콩 재배는 인류의 콩 재배 역사와 맞먹는다. 비록 늦었지만 우리는 한 알의 콩알에서 세계문명 발전에 기여한 우리 선조 한민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주간한국]


청 국 장

예부터 전시(戰時)에는 띄우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리는 메주대신 단시일 내에 완성되는 청국장을 만들어 먹었다.  이러한 이유인지 청국장이란 이름은 전시에 만들어 먹는 장이라는 뜻의 전국장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고,  청나라에서 넘어온 것이라 하여 청국장(淸國醬)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청국장은 콩을 삶아 절구에 찧고, 이를 질그릇에 담고 짚으로 싸서 따듯한 곳에 두면,  콩 자체에 있는 납두균<낫도균>을 번식시켜 발효시킨다.  이 때 반드시 볏짚으로 덮어 발효시켜야 제맛이 나고 끈적끈적한 점액질인 실(絲)이 많아진다.  청국장이 다 뜨면 숟가락으로 떠보아 실이 길게 늘어질수록 잘 뜬것이다.  콩이 적당히 잘 뜨면 소금, 마늘, 고춧가루, 생강 등을 넣고 절구에 찧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사용한다.

청국장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와 점성물질은 콩이 납두균에 의하여 소화분해되며 생기는 것이다.

청국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신라 신문왕이 왕비를 맞을 때 폐백 품목으로 '시'라는 이름의 청국장이 나온다는 기록이 있고,  발해의 문헌에도 '청색시'라는 청국장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청국장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담은 것은 1760 년 유중림에 의해서 보강된  '중보산림경제' 이다.  이 문헌에 따르면  "햇콩 한말을 가려 삶은 후 가마니 등에 쟁이고,  온돌에서 3 일간 띄워 끈적끈적한 실(絲)이 생기면 따로 콩 다섯 되를 볶아 껍질을 벗겨 이를 소금물에 혼합하여 절구에 찧는데, 때때로 간을 보며 소금을 가감한다. 너무 찌면 다시 꺼내어 오이, 동아, 무 등을 사이사이에 넣고 입구를 봉하여 독을 묻고 일주일이 지나면 먹어도 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도 청국장과 비슷한 발효식품인  '나토' 가 있어 이를 계란노른자,  겨자와 함께 버무려 먹는데,  서울에서도 신촌의 '간사이', 대학로의 '겐뻬이' 등의 일본식당에서 나토를 맛볼 수 있다.

최근엔 청국장을 발효시키는 고초균이 장내 부패균의 활동을 억제하여 부패균이 만드는 발암물질이나 암모니아, 아민, 인돌 등 발암촉진물질을 감소시킨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을 분해하고 간장의 해독작용을 촉진시킨다는 보고도 있었다.

청국장이 새로운 건강식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청국장은 우리의 전통음식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인의 기호식품은 아니다. 지독한 냄새 때문이다. 그러나 청국장은 처음엔 코를 막고 먹던 사람들도 여러번 먹다보면 자꾸 찾을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