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게르만족의 역사

kongbak 2013. 3. 3. 13:03

고대 게르만족의 역사

 

 

게르만족이라고 하면 흔히 독일인에 한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실제로 "Germany"도 "저머니"로 읽지만 "게르마니"로 읽을 수도 있다. 현대사회에서 게르만족을 대표하는 것이 독일인들이지만 독일인은 게르만족의 일부분이다. 지금의 유럽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대 게르만족의 후예라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다. 하지만 게르만족은 우리에게 독일인들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으로 들린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매우 넓은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게르만은 인도-유럽어족(語族) 중 게르만어(語)를 사용하는 민족의 총칭이다. 게르만족은 수많은 부족과 민족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문화적으로로도 서로 달랐다. 오늘날의 스웨덴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앵글로색슨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등이 이에 속하지만, 4세기에 일어난 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 이전의 원시 게르만 민족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인류학상으로는 북방인종에 속하며, 남방인종에 비하여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눈이 특징이다. 원주지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남부에서 유틀란트반도와 북독일에 걸치는 지역이었으나, BC 2세기~BC 1세기에 이동을 개시하여 동남쪽으로는 멀리 흑해(黑海) 연안에, 서남쪽으로는 라인강(江) 유역까지 퍼져 나가서 북(北)게르만(덴마크인, ·노르만인 등)·서(西)게르만(앵글인, ·아라만인, ·색슨인, ·프랑크인 등)·동(東)게르만(동고트인, ·서고트인, ·반달인, ·부르군트인 등)의 세 그룹으로 갈라졌다.

시대별 게르만족

1. 카이사르(Caesar) 시대
카이사르(BC 100~BC44) 시대에 게르만족은 라인 강 서쪽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까지 이르렀다. 게르만족이 로마인과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것은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이 갈리아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BC 2세기였는데 이들은 BC 102-101년에 로마의 마리우스에 의해 섬멸되었다. 피테아스시대부터 로마의 여행자들은 북부 유럽에 있는 튜튼족의 나라들을 방문했지만, 로마인들이 게르만족과 켈트족을 명확히 구별할 줄 알게 된 것은 BC 1세기에 들어서고도 한참 뒤인 카이사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카이사르는 라인 강 서쪽을 침범한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의 국경 안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게르만 문화를 기술한 문헌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갈리아전기, Commentarii de Bello Gallico>를 남겼다. BC 9년에 로마인들은 제국의 동쪽 국경을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넓혔으나, AD 9년에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게르만족이 아르미니우스의 영도로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 국경은 다시 라인 강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을 지배한 기간 및 로마인과 게르만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AD 1세기에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

2. 타키투스(Tacitus) 시대
타키투스(AD56~AD120)가 AD 98년에 역사책 <게르마니아 Germania>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쯤 게르만족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수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민족지(民族誌)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저술 중의 하나이다. 후세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성과는 타키투스가 제공하는 정보에 많은 점을 덧붙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학은 오히려 타키투스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주제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로마 제국에 복속하는 게르만인들은 종종 자신을 '게르마니'(Germani)라고 부른 반면, 라인 강 너머에 사는 자유로운 게르만인들은 11세기에 '디우티스크'(diutisc, '민족의'를 뜻하는 현대 라틴어이며, 독일어 'deutsch'의 어원임)라는 형용사가 널리 쓰이기 시작할 때까지 자기 집단을 지칭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르마니'라는 낱말의 뜻과 그 낱말이 어느 언어에 속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시대에 게르만족의 주요부족들은 다음과 같이 분포해 있었다. 카티족은 오늘날의 헤센 지방, 프리시족은 라인 강과 엠스 강 사이의 강기슭, 카우키족은 베저 강 어귀, 그 남쪽에는 아르미니우스의 부족인 케루스키족이 살았다. 슈바벤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수에비족은 메클렌부르크, 브란덴부르크, 작센, 튀빙겐 지역에 살았다. 하펠 강과 슈프레 강 주변에 사는 셈노네스족은 수에비족의 일파이며, 셈노네스족의 북서쪽에 살았던 랑고바르드족(롬바르드족)도 역시 수에비족이었다. 네르투스 여신을 숭배한 7개 부족 가운데 앙글리족(앵글족)은 슐레스비히 동부의 앙겔른 반도에 모여 살았다.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 지역에서는 헤르문두리족이 레겐부르크 근처에서 북쪽의 프랑켄을 거쳐 튀빙겐 지방까지 퍼져 있었다. 일찍이 마인 강 유역에 살았던 마르코만니족은 BC 10년부터 10년 동안 보헤미아(그 이전까지는 켈트족의 한 부족인 보이족이 차지하고 있었음)로 이주했고, 그 동쪽 모라비아에는 콰디족이 살고 있었다. 도나우 강 하류에는 바스타르나이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게르만족의 일파로 여겨진다. 고트족과 게피다이족 및 반달족은 발트 해 남쪽 연안에 살고 있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이오네스족과 시토네스족은 스웨덴에 살았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부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시대 이후에 중요해진 작센족(색슨족)과 부르군트족을 비롯한 몇몇 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타키투스

3. 게르만족의 대이동(Völkerwanderung) 시대
375년 동게르만의 고트족(族)이 아시아에서 침입해온 훈족의 압박을 받아 이동을 개시함으로써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 전개되어, 게르만왕국이 각지에 세워졌다.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 남프랑스의 론강 유역의 부르군트왕국, 북프랑스의 프랑크왕국, 영국의 앵글로색슨왕국 등이 그것인데, 원주지인 발트해(海) 연안에 남아 있던 북게르만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3왕국을 세웠다. 북게르만의 일부는 8세기부터 노르만인(人)으로서 유럽 각지를 침략하여 또 한 차례의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게르만왕국

1. 북아프리카의 반달족(Vandal)
게르만족에 속하는 루기족(族)을 중심으로 한 혼성부족으로 429-534년 북아프리카에 왕국을 세우고 활동했으며 455년에는 로마를 약탈했다. 신성모독이나 파괴를 뜻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은 그들의 이름에서 나왔다. 1세기 무렵 오데르강(江) 상류에 거주하였으며, 3세기 후반 도나우강(江) 중하류로 이동하였다. 4세기경 이후에는 로마의 주권하에 판노니아에 정주하였고, 409년 민족대이동기 때 왕 고데기젤이 부족을 거느리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침략, 이동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에스파냐를 침략한 서고트족의 압력으로, 429년 왕 가이세릭이 전부족을 모아 아프리카를 침입하여 로마 총독 보니파키우스를 살해하고 아프리카 정복을 완성한 뒤,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다. 가이세릭은 다시 지중해에 진출하여 제해권을 장악, 로마시를 약탈하는 등 맹위를 떨쳤다. 뒤를 이은 군다문트 ·트라사문트는 평화정책을 취하였고, 5대왕 힐데릭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극단적인 친(親)로마 정책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의 반감이 폭발하여 왕위를 사촌 겔리메르에게 빼앗겼다.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달 왕국 내의 세력 대립을 이용, 534년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보내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2. 에스파냐의 서고트족(Visigoth)
민족 대이동 시대에 활약한 게르만의 한 부족으로 고트파의 분파. 원래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거주하였으나, 남하하여 타키투스 시대에는 비스툴라 하구(河口) 지역에, 2세기 중엽부터 3세기에는 다뉴브 북안과 흑해(黑海) 북안에 정주하였다. 이 중에서 다뉴브 북안에 정주한 것이 서고트족으로 3세기 중엽 이래 자주 로마령 내에 침입하기도 하고 소아시아까지 약탈행위를 하였으나 4세기 후반에는 동고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370년 무렵 훈족의 서진으로 동고트는 그 지배하에 복속하고 서고트의 대부분은 프리티게른에 인솔되어 376년 로마령인 모에시아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이 민족 대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주 후 로마의 압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378년의 아드리아노플전투에서 비잔틴제국 황제 발렌스(재위 364-378)를 패사시켰으나, 다음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의 화친정책에 따라 로마의 동맹자로서 트라키아 지방에 정주하였다. 황제의 사후 다시 로마와 적대하였다. 알라리크(370-410)를 왕으로 선출하여 그리스 각지를 황폐하게 한 후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다. 알라리크의 사후에는 의제(義弟)인 아타울프가 왕위를 이었고 412년 남(南)갈리아를 정복하였다. 또한 에스파냐 북부에 침입하여 왈리아왕 시대에는 로마로부터 정식으로 아키타니아 지방을 양도받아 여기에 서고트왕국을 세우고 남갈리아에서 에스파냐의 대부분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훈족의 왕 아틸라의 갈리아 침입 때에 국왕 테오도리크는 아틸라를 격파하였고 또한 유리크왕은 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서고트법전 Lex visigothorum>을 편찬하였다. 507년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왕 클로비스(재위 481-511)에게 패퇴되어 아키타니아 ·남갈리아를 잃었으나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왕국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동고트의 국왕 테오도리크의 사후 서고트왕국은 다시 고립되어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남부 에스파냐를 빼앗겼고 국내에서도 귀족층의 봉건화가 진행되었다. 레오비길드왕(재위 568-586)은 국내 귀족층을 억압하고 남부 에스파냐를 탈환하여 왕국의 번영을 회복하였다. 다음 왕 레카레드는 아리우스파(派)의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고트인이 로마 주민과 융합할 것을 진행시켰으나 711년 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서고트왕국은 멸망하였다.

3. 이탈리아의 동고트족(Ostrogoth)
게르만인에 속하는 고트족의 한 분파. 1세기 무렵 비스와강(江) 하류지방에 거주하였으나, 2-3세기에 흑해 북서 해안에 정주한 일군(一群)이 동고트족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자주 로마령(領) 내에 침입하였으며, 4세기 후반 헤르만릭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서고트 이하 많은 부족을 정복하여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370년경 동방에서 이동하여 온 훈족에게 정복되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453년 아틸라의 사망으로 훈제국이 멸망하자 독립하여 파노니아(지금의 헝가리) 지방에 이동 정착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아마라가(家)의 왕권이 확립되었다. 488년 이 왕가 출신의 테오도리쿠스대왕은 부족민을 거느리고 다키아 ·모이시아 ·판노니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오도아케르를 격파하고 493년까지 전(全)이탈리아를 지배하에 넣었으며,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동고트왕국을 세웠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섭취하기 위해 카시오도루스, 보에티우스 등을 등용하여 로마계(系) 주민의 융화를 꾀하는, 이른바 ‘로마적이고도 게르만적인 국가’의 전형적인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는 서고트 왕국을 원조하기도 하면서 한때 게르만계 제부족국가(諸部族國家)의 패권을 잡았으나 만년에는 이 부족의 아리우스파 신앙과 로마계 주민의 가톨릭 신앙의 대립이 심각하여 교황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그의 사후 테오다하드 이후의 왕위 상속을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자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이것을 계기로 간섭전쟁을 일으켰다(535). 동고트 왕국은 토틸라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555년 동로마제국에게 멸망당하였다.

4. 남프랑스의 부르군트족(Brugundians)
고대 게르만 민족 중 동(東)게르만계의 한 부족이다. 원래는 발트해 연안 포메른 동부에 살았으나, 1세기경 비스툴라강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게피다이족을 막아내지 못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로마제국 경계에서 정주하고 살았다. 로마제국의 용병으로 이름을 떨치며 맹방부족으로 살다가, 로마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400년경에는 라인강 서안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413년, 군디카르의 지휘하에 보름스를 수도로 제1차 부르군트왕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436년 아틸라의 지도하에 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훈족 용병군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다. 중세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군디카르의 손자 군데리크는 패잔한 부르군트인을 이끌고 론강 상류 남안 사부아 지방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론강 중류 및 손강 하곡 지방에 진출하여 443년 제네바를 수도로 제2차 부르군트왕국을 재건하였다. 군데리크가 죽은 뒤 왕국은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제네바·리용·빈을 각각 수도로 하는 세 왕국으로 분할되어 통치되었으나, 491년 둘째 아들 군도바드(재위 474-516)가 왕국을 재통일하고 빈을 수도로 삼았다. 또 그는 아들 지기스문트를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의 딸과 결혼시켜 동고트왕국과의 제휴를 꾀하였으며, 501년 <부르군트법전>을 편찬시키고 재통일을 완성하였다. 510년에는 서고트족으로부터 프로방스 지방을 빼앗는 등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군도바드는 만년에 프로방스를 테오도리쿠스에게 빼앗기고, 나라 안에서는 아리우스파의 부르군트족과 가톨릭파의 원주민들 간의 종교적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520년 지기스문트(재위 516-523)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단행하였으나 부르군트족과 원주민과의 대립은 풀리지 않았다. 523년 이후 프랑크군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군디마르(재위 523-534)는 프랑크군을 반격하여 일차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크 분방왕(分邦王) 크로데마르가 패사하였다. 그러나 534년 클로타르 1세 등의 프랑크제왕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군디마르는 전사하고 왕국은 프랑크왕국에 합병되었다. 지금의 프랑스 동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은 이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5. 북프랑스의 프랑크족(Frank)
지금의 북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 지역에서 다수를 점했었고, 중세초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스도교 국가를 건립했다. 프랑스(프랑키아)라는 국명도 이 부족명에서 유래했다. 고대 게르만인 중에서 서(西)게르만계의 프랑크족이 세운 왕국(481-843). 부족국가에서 발전하여 점차 다른 게르만 제부족을 정복 통합하고, 피레네산맥에서 엘베강에 이르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포함한 대제국이 되었으며, 민족대이동 후의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통일을 실현하였다. 프랑크왕국은 서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통일국가로서 그리스도교 문화 및 중세 여러 제도의 모체(母體)가 됨과 동시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제국가(諸國家)가 그 분열 ·붕괴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다. 프랑크라는 명칭은 ‘자유’ ‘용기’를 뜻하며, 이 명칭이 사료(史料)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3세기 중엽이다. 타키투스 시대에는 부족명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형성 과정은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아마도 라인강 중류 ·하류 동안(東岸)의 여러 부족을 위시하여 많은 소부족의 혼성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4세기 초엽 이래 라인강 하구에서 북(北)브라반트에 거주하는 살리족, 쾰른을 중심으로 한 라인강 유역의 리부아리족, 지금의 헤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상(上)프랑크족의 3대 부족이 형성되었다. 그 중 살리족은 5세기 초엽 더욱 서진(西進)하여 셸데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이 무렵 데스파르굼이라는 작은 지방의 소왕(小王)으로서 대두하여온 것이 메로빙거왕가이다. 이 가문에서 나온 클로비스왕은 살리족을 통일하고, 이어 리부아리족과 상프랑크족을 병합하여 5세기 말에 프랑크왕국을 수립하였다. 프랑크왕국의 역사는 그 지배왕조에 의해서, 전반의 메로빙거왕조 시대와 후반의 카롤링거왕조 시대로 나뉜다. 카롤링거왕조는 메로빙거왕조와 똑같이 분할상속에 의해 분열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 1세(敬虔王)의 사후에 왕국은 3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843년의 베르덩조약에 따라 장남 로타르의 중부제국(로트링겐 ·부르군트 ·북이탈리아), 차남 샤를 2세의 서프랑크왕국, 3남 루트비히의 동프랑크왕국이 성립하였다. 이 가운데 중부제국은 로타르의 사후 다시 3분할되고, 얼마 안가서 각각 혈통이 끊겨 단절되었으나, 동프랑크에서는 911년까지, 서프랑크에서는 987년까지 카롤링거왕조의 왕통이 계속되었는데, 동프랑크는 콘라트 1세를 거쳐 작센왕조의 독일왕국으로 발전하고, 서프랑크는 카페왕조의 프랑스왕국으로 발전하였다.

6. 영국의 앵글로색슨족(Anglo-Saxon)
5세기에 독일 북서부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온 게르만인의 한 파. 원래는 잉글랜드의 색슨인을 대륙의 색슨인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노르만이 영국을 정복하기 전의 영국인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의 영국 국민의 중심을 이루는 민족이며, 앵글인 ·색슨인 ·유트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적으로는 북방계(北方系)에 속하여 장신(長身)·백색 ·금발 ·푸른눈에 좁고 높은 코 등의 육체적 특징이 있으나 민족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 게르만(튜턴)족의 한 파이다. 이 민족의 이주기(移住期)인 5-6세기에 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문자를 갖지 못하였고 또 신뢰할 만한 문헌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며 겨우 약간의 고고학적 자료가 있는 데 불과하다. 베다(674?-735)의 <영국 교회사>(8세기)에 의하면 스코트인 ·픽트인 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는 영국 남동부 켄트 지방의 브리튼인의 수장(首長)은 앵글인(유트人)의 도움으로 그 침입에 대응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영토를 빼앗겼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1세기 반 동안이나 이주가 행해졌는데, 그것은 인구증가로 인하여 비옥한 브리튼의 저지(低地) 지역에 이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주는 민족 전체의 이주로서 종래와 같은 해적적(海賊的) 침략이 아니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아마 군사적 지도하에 민족적 집단이 침입하여 성공하면 고향에서 처자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그 결과 로마의 지배하에서 로마화되어 가던 브리튼은 그 이주와 동시에 로마 문화의 영향이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 앵글로색슨의 제족(諸族)은 섬의 동부 저지지역에 들어가자 잇달아 작은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 소국(小國)은 종족국가(種族國家)로서 이주 ·정복을 통하여 그 전력이 증대한 종족의 군사지도자가 왕으로 된 국가이다. 소국들은 상호간에, 또 서부로 몰아낸 켈트인(웨일스人:외국인의 뜻)과 항쟁을 계속하여 7왕국시대를 전개하였다. 6세기 말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전래하여 성장중에 있던 왕권과 손을 잡았다. 이윽고 웨식스 왕국이 강력해지면서 9세기 전반에 액버트에 의한 전(全)잉글랜드의 정복, 후반에는 앨프레드 대왕이 잉글랜드 통일에 거의 성공하였다. 그러나 9세기부터 시작된 노르만인(데인人)의 침략 결과로 1016-42년 데인인의 왕 카누트(크누트)와 그 후계자에 의한 지배로 말미암아 앵글로색슨왕조는 무너졌다.

7.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노르만족(Norman)
게르만족 중에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원주지로 하는 일파. 북방인이라는 뜻이며, 바이킹이라고도 하며 어원은 북쪽 사람이라는 뜻의 Nortmanni. 인종적으로는 북유럽인종에 속하며 장두(長頭), 장신(長身), 백색피부, 금발, 파란 눈 등을 특징으로 한다. 게르만의 이동 때는 원주지에서 농경 ·어업 ·목축 또는 해상약탈을 해왔으나, 8세기경 본국이 통일된 왕권을 형성함에 따라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은 소수장(小首長)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본래 항해술에 능하고 모험심이 강한 것을 바탕으로, 세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덴마크계(系)는 프랑크 ·잉글랜드로 향하여, 그 수장 롤로가 912년 샤를 3세로부터 센강(江) 하류의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封土)로 받아 노르망디공국을 세웠으며, 1066년에는 노르망디공(公) 기욤(윌리엄 1세)이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에 노르만왕조를 열었다. 노르웨이계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에 도착, 그 일부는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계는 러시아에 상륙, 수장 류리크 밑에서 862년 노브고로트공국(公國)을 건설하고, 그 일부는 지중해의 시칠리아에서 왕국을 세웠다. 이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정착하게 되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중세 유럽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회체제

1. 정치
원시 게르만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Germania>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戰記)>이다. 이에 의하면 당시의 게르만인은 키비타스라 부르는 정치적 소단위로 분열되었고, 진정한 의미로서의 국가형성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게르만족의 족장들 가운데 개인적 전제정치를 확립했던 이는 마로보두스 1명뿐이다. 그는 BC 9년경에 마르코만니족을 그들의 고향 마인 강 유역에서 이끌고 나와 보헤미아에 정착시켰다. 그는 보헤미아를 근거지로 엘베 강과 비수아 강 사이에 살고 있는 다른 게르만족을 상당수 정복했다. 셈노네스족·롬바르드족·루기족도 그에게 복속되었다. 그러나 케루스키족은 마로보두스 왕의 몇몇 부하들과 함께 AD 17년에 왕을 공격하여 폐위시킨 다음, 로마 제국으로 쫓아냈다. 그밖에 이 시기에 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한 족장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두 실패했다. 키비타스에는 세습적인 왕에게 지배되는 것과, 선거로 뽑힌 군장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있었는데, 중대한 문제는 전(全)자유민으로 구성되는 민회(民會)에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원시민주제(原始民主制)의 유습(遺習)이 짙게 남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귀족과 노예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졌음은 사실이다. 경제생활은 정착농경(定着農耕)의 단계에까지 와 있었으나, 농업방법이 매우 유치하여 몇 년마다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이 시대의 게르만인에게 토지사유제가 성립했었느냐의 문제는 19세기 이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최근의 연구는 토지사유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고대의 게르만사회는 평등한 자유민으로 구성되었으나, 청동기(靑銅器)시대 초기부터는 계급제가 발생하고 기원 전후에는 자유민 ·예민(隸民)·노예의 세 신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게르만 세계에 군주제도가 완전히 확립된 것은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영토 안에 부족연합체로 정착한 뒤였고 이탈리아의 동고트족, 갈리아와 스페인의 서고트족,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달족의 지도자들이 게르만족 최초의 왕이었다. 이 시기의 다른 게르만족 족장들 가운데 아타나리크나 알라리크 같은 유명한 족장들은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살았거나 부족연합체를 이루지 않고 국경수비조약(foedus)으로 보호되고 있는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들은 타키투스가 묘사한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권한을 거의 갖지 못했던 것 같다. 게르만족은 신분제 사회였다. 게르만 공동체에는 3가지 신분이 있었는데 자유인, 반자유인, 노예였다. 노예는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반자유인은 개인적으로는 자유스러웠지만 자유인의 기본재산이나 가정으로 재산으로 묶여 있었다. 자유인들은 귀족층 상류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르만족의 종교적, 문화적, 세계관은 이 종족이 기독교화됨에 따라 대부분 사라졌다. 게르만적인 문화는 이단, 세속시되어 원시적이라고치부되거나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게르만적인 요소를 잊어 버리게 유도를 했다. 한 때 사람들은 게르만적인 요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기독교가 확산됨에 따라서 문화전반에 침투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지배하게 되었다.

2. 전쟁
'Thing'은 최고의 권력기구로 지방 공동체 자유인의 모임이었다. 모든 자유인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지워졌다. 작센같은 몇 개의 종족은 완전히 민주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종족은 왕이 다스렸다. 민주정치를 하던 부족들은 전쟁을 수행 할 때 장군(Herzog)을 한 명 내세워 그에게 부족에서 모집한 모든 병역의무자들을 맡겼다. 자유민 사회에는 독특한 종사(從事)제도가 존재하여,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시종하고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그의 부양을 받고, 무기를 지급받아 전쟁시에 주인을 위하여 싸웠다. 이 종사제도가 봉건시대의 봉건가신제(封建家臣制)의 시초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석기시대의 무기는 활과 도끼가 주였으나, 켈트인과의 접촉에서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철제투창을 사용하게 되었고, 1세기 무렵에는 철제검도 사용하였다. 로마 제국 초기에 게르만족의 무기는 공격용이든 방어용이든 금속을 별로 쓰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게르만족의 주무기는 긴 창(Lanze)과 도끼(Axt)와 칼(Schwett)이었다. 그러나 칼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투구와 가슴받이도 거의 없었다. 가벼운 나무나 고리버들로 만든 방패가 유일한 방어용 무기였는데, 방패 가장자리에 쇠테를 두르거나 가죽으로 보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르만족이 중무장한 로마군을 향하여 그토록 신속하고 맹렬한 돌진을 감행한 것은 이처럼 적절한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방패와 공격용 창뿐인 게르만족이 장기적인 백병전(白兵戰)에 말려들어 갑옷을 입은 로마군의 칼과 맞설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6세기까지도 게르만족 가운데는 장비를 갖춘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중무장한 기마 궁수대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병력도 없었다. 게르만족의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와 로마제국과의 연계성은 매우 높다. 로마제국 당시 게르만족은 대표적인 야만족으로 분류되었다. 야만(野蠻)을 Barbarism으로 야만인을 Barbarian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의 바바리아(Bavbaria, 독일어로는 바이에른 Bayern)를 상기하면 연관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르만족은 무자비함과 흉폭함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표현되었다. 카이사르(시저)가 지배했을 당시 로마군과의 전투장면을 본다면 도끼를 휘두르며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다가 로마군의 체계적인 방어와 공격에 패배하며 휘퇴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로마인들이 보기에 게르만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발탁될 만큼 힘과 전투력을 가졌으며 그로인하여 로마군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게르만 용병에 의하여 로마제국이 붕괴되고마는 결과 까지 이르게 된다.

3. 문화
카이사르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목축민이었고 양과 소를 사육하여 젖·치즈·고기 등의 식량 대부분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사도 지었는데, 주요농작물은 곡식과 근채작물 및 채소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인을 통하여 포도와 과일재배기술을 습득했다. 그전 까지는 사과재배가 전부였다. 게르만족의 소와 말은 로마인의 기준으로 보면 품질이 좋지 않았다. 밀로 빵을 만들었고 보리로 맥주도 만들었으며, 문자는 없었지만 단순한 음악 ·무용을 즐겼고, 영웅의 무용을 칭송하는 시를 좋아하였다. 게르마니아(고대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의 거주지에 붙인 이름)에서는 카이사르 시대보다 약 4세기 전에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카이사르 시대에도 여전히 금속은 가정용품을 만드는 데 쓰기에는 사치스러운 재료였고 가정용품은 대부분 나무·가죽·진흙으로 만들었다. 게르만족이 사용한 물건 가운데 큰 금속제품은 아직도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무기는 철기였다. 도기는 대부분 손으로 만들었고, 물레를 돌려서 만든 항아리도 비교적 드물었다. 초기에 게르마니아에서 교역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예무역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많은 노예들이 로마인에게 팔려갔다. 물레를 이용하는 도공들(극히 드물었음)과 대장장이, 광부들은 분명 그들이 만들거나 캐낸 물건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게르마니아의 보통 마을에서는 집에서 쓸 물건을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켈트족의 상품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취급하는 외국상인들이 게르마니아에서 활동하면서 포도주와 청동기 같은 상품을 부유한 군인들에게 공급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는 로마 제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이 크게 늘어나 게르만족의 지도자들은 전에는 손에 넣지 못했던 모든 부류의 상품(유리그릇, 붉은 식탁, 로마의 무기, 브로치, 작은 조상, 다양한 장식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로마 제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높은 지위를 상징했으나, 어떻게 그 값을 지불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게르만족의 세계관과 생활상은 북게르만족의 두 편의 전설집인 에다(Edda)에서 전해진다. 신앙은 자연숭배였고 신들을 인격화하여 나타내었다. 당시의 게르만인은 퇴폐적인 로마인과는 대조적으로 신체의 단련과 순결, 엄격한 도의심, 충성과 무용, 소박한 자연성, 넘치는 정열, 생생한 공동체의식 등이 매우 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