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人

[스크랩] 필리핀독재자 마르코스와 2차대전 보물이야기...잼네욤..^^

kongbak 2012. 11. 4. 12:12

1968년 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아시아에서 부자로 불리게 됐으며, 10년 후에는 개인재산이 50억 달러가 초과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처럼 큰 부를 형성했는지에 대해 일일이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런 갑부 그룹의 외국의 몇 명 동료 멤버는 양심적인 자금 또는 법인, 가족의 빈틈없는 경영에 의해 세대를 지나 그들의 부를 축적했거나 석유,전자.해운업 등 주경제 활동분야의 지배. 부동산 투기. 범죄적 협박공갈과 전쟁의 부당한 이득 행위 속에 정당하고 명백한 지혜로 그들의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확실히 거기에는 명백한 출처가 있다. 저널리스트들 중에는 약간의 마르코스 재산에 대해 수입허가의 부정한 결재, 무수한 암거래, 담배 전매권과 Harry Stonehill과 동업, 여러 가지 국제적 거래, 일본과 중국의 Tycoon과의 거래, 다국적 Kickbacks, 중국갱조직과 일본 야쿠자와의 공갈과 밀수, 미국 Mobsters와의 거래, 필리핀 도박 수익의 최대의 배당 속에 축적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확한 큰 부분은 미국 정부와 관련된 잘못된 원조 자금, 비껴난 전쟁 보상, 부풀은 군용지 임대료, 세계은행과 IMF의 차관 회피, 고위층의 뇌물수수 수단으로 백악관에 의한 비밀 승인에서 왔다. 또 다른 상당히 큰 부분은 강탈한 사업과 재산 그리고 다른 몰수한 재산으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저널리스트는, 산악 부족의 땅을 가로채어 다국적 기업에 땅을 파는 것 등 다른 예를 얼마든지 들추어 낼 수 있다. 그러나 10억이나 20억보다 더 큰 이유를 들추어 내는 것에는 불가능하다.


마르코스에 관해 감질나게 하는 것은 100억 달러나 200억 달러도 아닌데 그것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막대한 금괴의 비밀 축적이다. 거기에는 다이아몬드와 금괴로 가득찬 저장고를 그가 가지고 있다는 되풀이 되는 내용이다 ; 1톤이 넘는 무게의 금불상의 이야기들 ; 런던, 홍콩, 시드니, 다른 곳에서 믿을 수 없는 금괴거래의 소문 알고 있는 필리핀의 금 비축량보다 더 엄청난 양으로 한번에 불법의 10톤의 금괴 비밀 거래 주기적으로, 세계에서 거대한 런던 골드 마켓에서 마르코스의 검은 독수리 거래라 불리워진 비밀 거래의 새로운 소문으로 일렁거렸다.



검은 독수리라는 어원은 히틀러의 제3정부가 무너지기 전 베를린의 독일 은행에서 나찌 골드가 밖으로 빠져 나온 것에서 유래한다. 나치와 미국, 러시아에 의해 훔쳐진 25억불 가치의 금과 화폐는 사라졌고, 약간의 이것이 나중에 골드마켓에 조금씩 돌아왔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거래 또한 검은 독수리라 부르는 것은 전쟁 약탈물의 축과 근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야마시타 골드 약탈물은 은밀하게 매매되었다.


페르디난드는 금괴로 가득찬 한 구덩이 위에서 두 사람의 전 일본군 장교와 다투었던 두 필리피노 인부들의 주장을 듣게 된 이후 전쟁 후 처음으로 그것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퀴리노 대통령의 일로카노 정치기구, 일본 제국군 기록 보관소를 통해 일본의 땅파기와 원천을 조사하던 푸키밋수(일본계 미국인)와 함께 가깝게 일했다.


그 전설은, 열쇠수리공과 Amateur treasure hunter인 로겔리오 로하스가 1톤 무게의 금불상을 찾아 내면서 1970년에 다시 돌아왔다. 로하스는 필리핀 Treasure Hunter협회 전 회장이다. 그는 바기오 근처 벤큇 광산의 버려진 채광의 수갱을 표시하는 한 일본인의 지도를 획득했다고 말했다. 구식의 금속탐지기와 함께 무장한 로하스는 터널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체계적으로 찾는 가운데 여러 달을 보냈다고 말했다. 땅을 파기 시작한지 7개월이 지나 해골들이 널려있는 한 동굴을 발견했다고 했다.



거기에는 동전이나 금괴는 없었고 단지 나무상자 하나만 있었다. 그들이 지렛대를 이용하여 그것을 열었을 때, 야마시타가 바기오로 사령부를 옮길 때 숨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뚜렷한 샴 사람의 얼굴생김새의 하나의 금불상을 발견했다. 그 금불상은 28인치의 키에 2000파운드의 무게였다. 머리부분은 분리 됐다. 몸통 속에는 말레이 반도의 샴이거나 몬인듯한 어떤 지배자의 대관식에 쓰는 보석류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점령기 동안 샴의 어떤 곳에서든가, 태국 귀족계급의 한 사람으로부터 든지 아니면 방콕의 부유한 화교 사업가로부터 든 지 사원에서 왕국에 기부한 것으로부터 약탈 됐을지도 모른다.


그 금불상은 1970년 발견 당시 금만 해도 5백만 달러의 가치로 평가 됐다. 1986년에는 26백만 달러의 가치가 됐다. 그 부분만 되찾은 후 발굴은 Old mine shaft가 함몰(붕괴)가 시작 되었기 때문에 포기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분명한 마크가 새겨진 172장의 진짜 지도들 중의 하나인 군부대 내의 외관상으로는 사각형의 한 깃대 밑에서 금불상을 발견한 진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로하스에 의해 계획한 심사 숙고하여 감춘 이야기의 전부다. 그 지도들은 뷰비트랍을 피하고 어떻게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지 코드로 정확히 지시한 것을 포함해 기록했다. 로하슨는 대통령의 어머니, 조세파를 포함 하여 금불상에 대해 많은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파는 것을 거절했을 때, 조세파의 시동생 피오 마르코스 판사의 영장과 함께 총으로 무장한 10명의 군인들이 어느날 밤 2시에 바기오의 그의 집에 나타났다. 이들은 NBI와 경찰 수사대원으로 금불상을 트럭에 손수레로 옮겨 싣고, 로하스가 또한 발견한 1x2x3인치 크기의 금괴 18개와 보석들을 실었다. 왜 로하스는 더 생각이 깊지 못 했는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마르코스는 대통령의 가족에 의해 도둑 맞을 것 이라고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페르디난드의 여동생 Fortuna Baby Marcos의 남편 마셀리노 발바 즉 대통령의 매제가 그 습격의 지휘자였다.


다음날, 로하스는 피오 마르코스에게 호소했다. 엄격히 그 판사는 그에게 압류 물에 대하여 조용히 할 것과 주의 하도록 그에게 경고 했다. 로하스는 매질을 당하고 심각하게 경고를 받았다.

14일 후 이 이야기는 마닐라 신문에 실렸고, 이 후 아기오 법정의 다른 판사에 의해 그 불상을 돌려 줄 것을 군인들에게 명령 했다. 군인들은 마닐라 조각가가 바쁘게 일하는 동안 2주간을 지연했고 황동으로 만든 불상을 인도 했다. 그것은 머리는 분리할 수 없었다. 그 황동 불상은 진짜 불상이 바탄의(비치)해변 별장에서 엄중한 보안 속에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 진짜에 대한 질문을 피하고자 말라카냥의 페르디난드의 서재에 보관되었다. 말라카냥궁의 페르디난드의 서재에 있던 불상은 오랫동안 CIA에 있었던 Charles Glazer에 의해 엄밀히 조사되었다. Glazer가 확인한 그것은 황으로 머리는 나사처럼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명확히 샴의 것도 아니었다.



해안 별장에 있는 불상은 후에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초대한, J.S.광산의 엔지니어와 Metallurgist에 의해 금으로 확정 됐고 1m 미만의 높이에 대략 2천 파운드의 무게였다. 머리를 나사처럼 풀어 분리했을 때 한 작은 두꺼운 냄비 크기의 텅 빈 곳이 드러났다. 페르디난드는 솔직히 그에게 야마시타 골드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고 그가 상세히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의 소유가 됐는지는 생각 컨데 조세파로부터 빌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971년 5월 필리핀 상원의 금불상 사건조사 위원회가 열렸다.



페르디난드는 정치적으로 유도한 공격이라며 상스럽게 상원의 질문에 비난하고 개인적 복수로 위협했다. 로하스는 1971년 8월 플라자 미란다 집회에서 텔레비전젼 카메라 앞에서 부다납핑의 진짜 이야기를(진실) 하려고 했을 때 마르코스 하수인에 의해 던져진 폭탄과 수류탄으로 거기에 참석했던 8명의 상원의원 후보자들을 포함하여 96명이 심하게 다치고 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Primitive Mijares는 대통령 경호원이 그에게 로겔리오 로하스가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라는 교육과 수류탄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하스는 다치지 않았으나 진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페르디난드는 압류된 금불상으로 그와 관계 있고 그와 연결한 누구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로겔리오 로하스를 비롯하여 야간 습격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바기오 경찰서장을 포함하여 증인들은 곧 실종되기 시작했다. 로하스는 죄수로서 계엄령의 처음 2년간을 보냈다. 그의 양도위에는 그가 다시 매질을 당한 뒤였다. 페르디난드는 야마시타 골드를 발견하여 축적한 그의 부에 관한 그때 그때의 질문에 대해 종종 대답했다.


 기자들은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결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는 야마시타 골드는 단지 전설이다. 다른 수단으로 마르코스는 금괴와 다이아몬드의 개인적 은닉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것의 부피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Far Eastern Economic Review는 그의 유명한 이미 부피를 알 수 있는 축적물의 금괴에 대하여 주기적으로 언급했다.


그가 일찍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금불상의 발견은 일본군 약탈물이 존재 하는 지역을 재개하는 노력에 영감을 주었다.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군인들과 함께 야마시타 골드를 발굴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먼저 그의 노력은 보니파시오 요새에 집중 되었다. 그는 요새 안의 맥아더 사령부 밑에 일본군에 의해 많은 보물이 숨겨진 것을 믿고 있었다. 맥아더가 머물던 숙소로부터 가로질러 장교회관 다음 구내의 중앙에 둥근 원형의 차도가 있었다. 그것의 중앙에 맥아더 개인적 폭격 대피소의 입구가 있었다. 일본군이 그 지역을 손에 넣었을 때 추가로 터널을 팠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신중하게 폐쇄되었다.



페르디난드는 보물의 주요한 장소로 확신했다. 그는 수년동안 35마일의 터널을 뚫는 동안 2천명의 군인들을 동원했다. 처음 2년간의 작업에서 소문에 의하면 단지 하나의 금괴만 찾을 수 있었다. 이후 어쨌든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1975년 그와 버는 층층이 쌓여 있는 금괴와 어지럽게 모여 있는 금 덩어리의 지하에 특별히 건조된 여러 개의 저장 고를 찾을 수 있었다. 이것들은 따로따로 확인됐는데 그것은 양은 모두 비슷 했다. 장래의 브로커들 또한 말라카냥 근처의 큰 지하 저장 고나 창고 속의 비슷한 양의 축적 물들로 적재된 보물을 보았다.


다음. Treasure task force의 장교들은 영부인의 역사적인 복구 계획의 비밀 속의 산티아고 요새의 굴착을 제안 했다.

발굴을 시작하면서 만난 하나의 문제는 일반적인 보물의 장소로서는 부적당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좌표도 없이,(Missing the trove) 수개월 또는 수년간 계속 하여 한 장소에서 굴착하여야 하는 것은 약간의 문제 였다. 보니파시오 요새의 발굴은 거의 5년에 가까운 기간이 소요 됐다. 산티아고 요새 또한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들이 아주 깊이 숨겼다는 사실에 의해 복잡하게 했고 잘못 방향을 정할 때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데 수 개월이 소요될 것이다.


 마르코스는 시카고에 살고 있는 스웨덴 출신의 심령 연구가 Olof Jonsson을 말라카냥궁에 초청 했고 보물을 찾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대신에 2천 파운드의 폭탄과 다른 깊이에 있는 여러 구의 유골을 찾는 방법으로 수직으로 굴착하는 실마리를 찾았다. 잔슨과 그의 여러 가지 위업을 기로한 여러 가지의 책이 있었다. 그는 숨겨진 보물을 찾았던 뛰어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잔슨은 또한 그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남을 더 이익 되게 하는 심령술로 겸손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참으로 순수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다. 말라카냥에 재미 있는 심령술사는 그들에 때때로 즐거움을 선사 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두 사람은 심령술의 불가사의함에 매료되었고 초자연적인 힘을 믿게 되었다. 잔슨과의 만남 속에 그들은 야마시타 골드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마 잔슨이 도왔을 것이다.


이러한 토론 속에 보물과 함께 연결된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만약 수천톤의 그것을 찾았다고 할 때 합법적인 국제 시장에서 원산지를 드러내지 않고, 세계 금값을 하락 시키지 않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처분할 수 있을까? 페르디난드가 애태우고 있는 것은 가능한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이미 최소한 금괴의 매우 큰 저장고를 하나 발견해 놓고 있었다. 모든 금괴는 확실한 장소의 금광으로부터 나왔다는 분석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 조직의(혼합)지분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금괴가 조직의 분석에 의한 방법으로부터 어디에서 발견됐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게 꾸밀 수가 있을까? 금을 세탁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바타안궁의 지하 금괴 저장고의 방문자들은 국제 표준 금괴 거래에 표준인 런던골드연합에 의해 규정한 무게나 부피의 표준이 아닌 일본과 중국의 마크가 새겨진 이 두 나라의 독특한 다양한 모양과 부피의 금괴의 거대한 부피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분명히 약탈의 한 큰 부분으로 동남 아시아의 화교들로부터 이거나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럴듯하게 일본의 표식이 있는 금괴는 토오쿄오 집으로 가는 도중 마닐라에 내려졌던 보석이나 동전을 녹여 만든 것으로 보였다.


Olof Jonsson은 마르코스에게 구변이 좋은 Wisconsin의 수완가 Norman Kirst를 소개 했다. 그는 투자가로서 마르코스가에 그 스스로 참석했다. 페르디난드는 잔슨과 커스에게 그의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인 코스타리카 대통령 Jose Figueroz가 한 이야기를 했다. 네바다에 살고 있는 한 남자에 관한 것으로, 2가지의 흥미 있는 진행을 개발 했던 금광 기술자와 야금술사란 이름의 로버트 컬티스였다. 그가 진행한 하나는 어떠한 주어진 귀금속으로부터 약간 높은 비율의 금을 추출하였고 다른 하나는 금괴를 녹여 원하는 데로 어떤 야금술의 지문과 함께 다시 짜 만들어 그런 금괴의 배합을 개조하였다. 이 컬티스의 도움과 함께 야마시타 골드는 벤큇과 결합하거나 지방의 다른 광산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여지는 새로운 금괴로 만들 수 있었다. 벤큇은 해마다 10만온스 가까운 금을 추출하고 있었으나 마켓에 야마시타 골드를 단계적으로 소개 하기위해 높게 산출되었다. 만약 컬티스가 그의 장비를 마닐라에 가져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벤큇의 후원 속에서 라고 공언 했을 것이다. 마르코스가는 벤큇에 대해 수년간 그리고 1970년대 중반 회사의 간판을 통하여 대부분의 소유권자를 끌어 들였다.


Kirst는 자진하여 Reno의 컬티스와의 접촉을 시도했고 즉시 궁전화로 그렇게 했다. 그는 만약 여러 달 동안 진행되는데 드는 Kirst 와 존슨의 비용을 지불하는데 컬티스가 동의한다면 그에게 그것을 털어놓고 컬티스와 Outline이 진행 되는 네바다에 여러 번의 여행 속에 이것을 한층 더 철저히 했다. 할리우드 방식의 첩보활동과 암호명 속에 몰두한 페르디난드는 Leber(rebel에서 유래) Group이라 불리워진 그 속에 그를 연루 시켰다. 그는 찰리(Charlie)였고 Ver는 지미(Jimmy)였다. Ver장군은 동등한 지휘자였고 이멜다와 코코이는 Kirst에의 정보를 받았으며 그 가정의 명백한 그 스스로의 보호장치를 갖추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Kirst는 컬티스에게 금불상을 포함 하여 금괴와 다른 가치 있는 보물을 수억달러치를 이미 마르코스 대통령이 되찾았다고 말했다.


 컬티스는 처음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들의 계획에 수그러 들었으나 그가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완전히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Treasure Hunter들에 비교하여 로버트 컬티스는 약간의 보이스카웃이였다. 그는 은행가와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미국의 먼 서부쪽의 사막과 산악지역에 살았고 금과 귀금속을 찾는 작은 기업연합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Cibola의 7개의 도시와 엘도라도를 찾는 웅장한 계획이거나 금속탐지기로 약간의 여유에도 찾아 나서는 귀금속과 바위에 몰두하는 공제조합에서 활동했다. Kirst가 말라카냥궁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 했을 때 컬티스는 자금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의 회사 U.S 플라티늄은 그의 계획을 진행하는데 구매한 장비의 가격 때문에 적자에 빠져있었다.


 신중하고 교묘하게 컬티스는 우익의 John Birch Society의 거부회원 들로부터 25만불 을 빌렸고 그것을 갚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 대답하는 것처럼 보였던 일본군의 전쟁 약탈물에 대한 복구의 한 부분은 그의 근심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컬티스는 성실하고 순진한 사람이었고 많은 엔지니어들처럼 가능한 가장 능률적인 방법을 찾아 진행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낭만적인 그는 사업과 경영에서 속기 쉬운 사람이었으나 매우 나쁜 계획의 사람들과 관련되었을 때는 충분히 피하는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이래로 필리핀의 대통령은 미국의 우익 동맹국으로서 컬티스는 이러한 상황의 도덕론에 관해서 심적 부담이 없었다. 엔지니어는 공차 안에서 일해야 한다.


다행이 컬티스는 그의 친구와 직접 만날 때는 물론 모든 전화상의 대화까지 녹음기에 녹음하는데 숙달된 능력에 정확한 기록을 보관하는데 열광하는 메니아였다. 수년 후 그의 이야기는 드러났고 평가하는데 수 주일이 소요된 무수한 시간의 테이프와 수천 페이지의 자료를 제출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완고하게 믿지 않던 국방성, CIA, 백악관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컬티스는 일본에 의해 약탈됐고 이것을 숨기는 것에 관련된 혐오와 이러한 사실이 틀림없는 상황에서 이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금에 관하여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부닥친 실제의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찾으며 그것을 땅 밖으로 이동시키는가 였다.



그것을 찾았을 때 거기에는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특징적인 것은 페르디난드는 컬티스의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지불하는 계획은 없었다. 컬티스는 네바다로부터 마닐라에 금을 처리하는 장비를 선적해 왔을 때도 자신이 그 비용을 부담 했다. 그것은 새로운 금괴로 금을 처리하는 장비를 설치하는 것으로 해안별장에서나 군용지 둘 중 하나가 가능했다. Leber Group의 동업자로서, 물론, 컬티스는 그 약탈물의 배당과 함께 보답을 받았다. 또는 그렇게 그것은 그에게 제공되었다.


컬티스는 1975년 3월과 7월 사이에 필리핀을 두 번 방문했다. 먼저 Olof Jonsson과 노만 Kirst는 1975년 3월 함께 마닐라에 도착 했고 페르디난드의 심부름꾼 Amelito Mutuc가 지휘하는Leber Group의 다른 멤버들에 의해 서로 만났다. Mutuc은 마까파갈 대통령의 사무국장 이었으나 하리 스톤힐에 의해 해고 됐다. 그는 페르디난드의 GOFER가 되었고 Primitive Mijares에 뇌물을 전달 했다. 컬티스는 보물을 숨기는데 증인(목격자)으로 확인된 폴지가와 벤 발모레스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컬티스와 잔슨은 최소 24곳 이상을 돌아 보았고 가장 중요한 장소로 마닐라의 보니파시오 요새와 산티아고 요새를 꼽았다.


 시로부터 30마일 거리의 테레사 바리오 ; 인트라무로스의 오랜 성벽도시의 산오거스틴교회(성직자의 승낙과 함께 제단 교회당 지하실 깊이 간수한 약탈물이 있는) 부유한 돈파코 올티가스에 속하는 지역; 산 세바스찬교회, 크리스트드킹처치, 철로 변과 다른 여러 장소들. 빈번히 그들은 벌 장군과 영부인의 경비 책임자로 벌의 스탭의 멤버인 콜로넬 라치카와 만났다.


컬티스는 말라카냥궁에 머물렀다. 그는 페르디난드와 그의 개인 방에서 많은 대화를 했다. 처음에 컬티스는 보물이 존재하는데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압도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 확신하지는 않았다. 페르디난드는 발모레스와 지가로부터 보물의 배치를 세부적으로 묘사한 비밀의 일본군 지도 원본을 획득했다. 그것은 138곳의 육지와 34곳의 바다속으로 전부 172군데 였다. 각 장소의 일본의 기술적 표기에는 많은 레벨에서 터널이 있음을 알리는 마크를 포함하여 뷰비트랍을 어떻게 피하는지 어떻게 그들이 진열해 숨겨 놓았는지 정확히 표기 했다. 대부분의 지도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들에 의해 숨겨져, 지가와 발모레스의 손에 아직 있었다. 사람의 두개골 팔, 손이 묻혀 있는 층에서 발굴하는 바른 진행 순서를 표기해 놓았다.


 컬티스에게 공통적으로 천년 동안 사용해온 것이 아닌 일본의 지방 사투리로 지도를 새기는 명령에 대해 설명했다. 컬티스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명령으로 필리핀의 기술자들, 지질학자들, 건축가, 지도 제작자들의 팀에 의해 설계한 몇몇의 소유자 불명의 매장물의 현대 공학 설계를 심사 숙고 했다. (arorhouf all rough edges) 그는 마르코스와 버와 함께 바탄의 마리벨스의 해안 별장에 동반했다. 거기에서 벌 장군은 지하실의 저장고에 그를 데리고 갔다. 나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금괴를 보았다. 고 말했다. 컬티스는 하나의 저장고만 쳐도 6천만 달러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견적했다. 버장군은 그에게 이것은 단지 한 장소로부터 약간의 금괴라고 말했고 인접한 저장고에는 상당한 양의 금괴들이 더 있었다. 또한 마리벨스에서 컬티스는 페르디난드의 책상 옆에 놓여진 금불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를 할 수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그에게 보물을 매매하는 런던과 쯔리히의 마켓 신문기사의 범위에서 이야기 했다.

컬티스는 레노의 그의 공장에서 2개의 작은 용광로를 떼어내 금을 재가공하는 다른 장비와 함께 마닐라에 가져오는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벤큇 금광에 장비를 공급하는 형식으로 진행 됐다.

마르코스와 컬티스는 먼저 한곳의 바닷속과 그 곳의 육지 장소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바닷속은 일본 순양함 나치호가 난파된 곳이었다. 육상은 테레사와 돈 파코 올티가스의 소유지였다.



그 자신의 확신을 위해 컬티스는 장소와, 지도 증인들의 신빙성을 확인하길 원했고 지가와 발모레스와 이야기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75년 컬티스가 지가를 만났을 때 그는 57세였다. 그는 마닐라에 살고 있었고 삼푸와 치약을 만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의 한 회사인 필리핀 정제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발모레스는 나이가 많았고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컬티스는 순양함 나치호의 침몰을 포함하여 금을 숨기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장군의 통역자와 하우스보이로 어떻게 일하게 됐으며 또한 보물지도를 훔치게 된 것에 대해 그들의 설명을 들었다.


Leber Group의 필리피노들은 일본의 고위 지휘부를 위해 간첩, 정찰, 통역의 일을 하며 필리핀을 배신하며 다시 그들의 도면을 훔치며 배신한 일본과 필리핀의 2중국적의 발모레스와 지가를 변절자로 경멸했다. 그들은 일본이 언젠가 다시 찾기 위해 너무나 복잡한 각 장소를 만들었기 때문에 결코 그들 스스로 발굴 작업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정확한 지역을 찾고 뷰비트랍을 우회하는 노련한 기술과 많은 자금과 발굴 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가와 발모레스는 현재 마르코스에 속박되어 있었다. 마르코스 역시 지가와 발모레스가 필요했다. 그들은 지도들을 가지고 있고, 보물을 숨기는데 목격자로서 그 지역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 두 남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들을 넘겨준 컬티스의 호의적인 성격에 매우 안심했다. 이후 발모레스는 마르코스와 벌 또한 실패했던 곳으로 30년 동안 숨겨진 그 진실을 불쑥 컬티스에게 말했다. 순양함 나치호를 찾는 것에 페르디난드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보물의 정확한 위치를 단번에 가리는 올프 잔슨의 도움 속에 잠수부와 해군 초계 어뢰정에 기대 했다. 예방책으로 페르디난드는 필리핀 바다 속의 어떠한 future salvage operation을 위해서는 그의 개인적인 승인을 받아야 하는 대통령령을 발했다. 1975년 4월 잔슨, 컬티스, 커스트, 발모레스, 그리고 지가는 벌의 경호원과 함께 초계 어뢰정을 탔다.


이후 초자연적 힘에 의해 주장된 일본 지도의 난파선이 있다는 곳에 닻을 내려 수시간 동안 수백야드나 떨어져 벌의 다이브들이 세밀한 탐사를 한 이후, 다시, 다이브들을 급송 했고 잔슨의 정확한 장소를 선택한 관계로 수분 내에 고함을 치며 표면으로 떠 올랐다. 뱃머리의 닻이 내려진 부분과 순양함의 꼬리 부분에는 부표가 띄워졌다. 그들이 마닐라에 돌아 왔을 때 벌은 의기양양 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들이 다시 돌아 왔을 때 그 부표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조류가 그 줄을 끊었던 모양이다. 다시 찾기에는 너무 늦게 돌아 왔던 관계로 3일째 되는 날 잔슨은 다시 순양함을 찾았다. 새로운 부표가 단단히 설치 됐고 벌장군은 침입자에 대비하여 정찰선을 남겨두기로 약속했다. 계획은 더 많은 다이브와 장비를 가지고 3일 내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 왔을 때 새 부표 또한 없어 졌다. 컬티스가 벌에게 그의 보호 예방의 실패에 대해 물었을 때 벌의 사람들은 그들을 제거 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 속에 벌은 항해중인 대통령의 요트를 호위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정찰선이 떠나야 했다고 우겼다.

컬티스와 그의 동료들은 난파선 나치호와 함께 마르코스와 벌에 의해 어떤 종류의 게임에 놀아 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테레사 의 육지장소에 그들의 노력을 이동했다.


일본지도에는 테레사 는 보물이 777십억 엔이 적재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었다.(1944년 금액) 그리고 777은 페르디난드의 럭키 넘버였다. 그 일을 위해 벌이 개인적으로 선택한 에드워드 에스코발 박사가 지휘한 에이지(Ahgay)건설 회사에 의해 굴착 되었다. 그 장소의 경비는 벌의 사람에 의해 공급되었다.

일본 지도들과 초자연적인 힘의 울프 잔슨 으로부터의 도움으로 그들은 어디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해야 할지 테레사 의 정확한 장소가 명료해 졌고 선정 됐다. 굴착은 주택 근처의 평평하게 보이는 곳에서 5월 중순에 시작 됐다. 건설회사의 20명의 작업자들에게는 단지 흙 테스트에 관련한 일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보물과 만나기 전에 벌의 사람들로 바뀌어 졌다.


 굴착은 24시간 꼬박 됐고 하루 평균 3피트를 팠다. 6월 8일 그들은 콘크리트 터널 위에 도착했다. 콘크리트를 관통했을 때 작업자들은 약간 입원할 정도로 두통과 혐오스러움으로 고통을 받았다. 발모레스와 지가는 터널 속에 생매장된 전쟁포로 들의 유해로부터 가스라고 말했다. 팔 뼈와 손 뼈는 몰락을 통해 진기한 모형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그들은 탄 숯의 층과 대나무의 층을 발견 했고 나무판자가 교체된 층을 발견했다. 그 다음 추가의 뼈와 트럭의 흙받이, 그리고 금속의 다른 조각. 그들이 더 한층 파기 전 본 대장은 사라 졌고 중무장한 군인들로 가득채워진 트럭과 함께 다시 돌아 왔다. 이 군인들은 이멜다에 충성스러운 것이 입증됐다. 그들은 그 장소에 경계를 섰다. 명령이 벌에게 도착했을 때 그의 경비대는 안으로 이동했고 이멜다의 군인들이 갑자기 방문하여 그들의 무기를 내려 놓기를 강요했다. 부부간의 싸움.


굴착은 다시 시작했다. 컬티스는 갱 속으로 내려갔고 2개의 금속 오브잭을 살폈다. 하나는 분명한 트럭의 흙받이였고 다른 것은 보물을 지키는 여러 가지의 1000파운드 폭탄들 중의 하나의 부분이었다. 이 소식은 말라카냥에 전해 졌다. 1975년 7월 6일 현재 굴착은 갑자기 페르디난드의 명령으로 정지했다.

프리모티브 미자레스는 미국의회 앞에서 증언 했다.


: 워싱턴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과 레스 화이튼은 야마시타 골드를 찾고 있는 마르코스 태통령에 대해 되풀이 하여 미잘레스가 진술하는 부분을 기고 했다. 이것은 페르디난드를 놀라게 했고 비록 트럭의 발견으로 흥분한 벌이기는 하나 페르디난드는 레벌 그룹속의 누설에 관해 더 걱정했다. 그는 벌에게 모든 일반인 작업자에게 물을 것을 명령했다. 모두는 치명적일수 있는 누설에 주의 했다.


그날 밤 울프 잔슨은 컬티스에게 자신은 즉시 마닐라를 떠날 것이라고 말했고 컬티스도 그렇게 하기를 충고 했다. 심령술사는 모두가 죽음의 위험에 있음을 통찰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잔슨은 먼저 비행기로 빠져 나갔다. 컬티스는 벌을 만나고 마닐라에 선적하는데 큰 비용을 치른 그의 용광로와 진행 장비의 정리를 결론짓는데 충분히 오랫동안 머물렀다. 가로막는 선적에 너무 늦었다. 그는 바기오에 일주일의 휴가에 초대 되었으나 잔슨의 경고 후 불안하게 느꼈다. 그는 레노의 긴급한 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했고 7월 10일 비행기에 탔다. 노만 커스트는 마르코스 대통령과의 거래를 상기하고 남아 머물렀다. 그는 컬티스를 불신 하는 계획된 정보와 편지를 그가 꾸밀 때까지 실질적으로 매장한내용으로 만들 때 까지 다음 10일을 보냈다. 이 아이디어는 컬티스가 만약 Leber Group을 들쳐내 폭로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도록 그를 중상 비방 했다.


컬티스는 그동안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마닐라를 떠날 때 그는 지가와 발모레스의 보물지도들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디난드가 지도를 찾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컬티스가 안심하고 마닐라로 돌아오길 중재인을 통해 되풀이 해 시도했다. 그런 속에 컬티스는 다른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그를 배반하고 그의 장비로부터 나온 돈을 사취했으며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전체 벤쳐의 모두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다시 한번 컬티스는 John Birch Society의 부자 채권자에 접근했고 그들에게 야마시타 골드의 분배의 비밀을 알렸다. 그리고 $125,000빌려 정리했다. 그는 현재 $375,000의 빛이 됐다.



그는 John Birch Society의 국가 자문위원회의 회원인 Jay Agnew 천만장자와의 거래에 힘입었다. Agnew는 워싱턴에 목재회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딘은 거기에 변호사였다. 컬티스는 그들과 John Birch Society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에게 빌려준 것 때문에 상당히 의미심장해 하는 20억불로 기대되는 앞으로의 금에 대한 그의 배당에 대해 세탁하는 지원을 요구했다. 그가 상술한 그들은 카나다의 로얄은행의 지점에 그 돈을 넣을 수 있는 낫사우의 바하마스에 그들이 설립한 연방포장 회사라 불렸던 해외회사를 통하여 세탁할 것을 말했다. 그리고 JBS의 선배회원에 의해 조정되는 여러 개의 계좌를 사용하여 주 5일에 걸쳐 다시 찾고 운반할 수 있는 JBS의 자금 전문가의 한 사람에 의해 조정되는 하나의 계좌를 신용할 수 있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켈로와나의 로얄은행 지점에 단번에 거액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컬티스는 이 방식으로 카나다 은행을 통하여 미국으로 거대한 금액을 성공적으로 밀입국 시킨 것을 자랑한 JBS에 그것을 요구했다.


컬티스가 말한 Agnews에 추가로 관련된 사람은 조오지아 하원의원 Larry P.Mcdonald. 미보수파의 대통령 후보자였던 전 캘리포니아 하원의 John Schmitz, 3번의 의원선거에 좌절한 워싱턴 야키마의 Floyd Paxton, 그리고 슈퍼마켓의 냉동식품 포장과 제과점, 통산물을 밀봉하는데 사용하는 작은 플라스틱 클립으로 세계적인 퀵록 법인을 만든 그의 아들로 야키마의 Jerry Paxton, 플로이드 팍톤은 그의 부로 인해 JBS의 자금 전문가와 집행위원회의 멤버로 있었다. 컬티스가 상술한 팍톤은 퀵록법인의 캘로와나 공장에 속하는 한 계좌 있는 로얄은행 캘로와나 지점에서 그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컬티스가 상술한 다른 참여자는 증권 거래위원회에 의해 조사된 한 귀금속 회사인 Great American Silver Corporation을 이끌며 Bircher인 아틀란타의 제리 아담스였다.


컬티스가 상술한 그는, 세탁음모는 JBS를 이끌어가는 하원의원 맥도날드와 공산주의자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고발했던 JBS의 설립자이며 캔디 공장중인 백만장자인 로버트 웰치와 명백해 졌다고 말한다.


컬티스에 따르면, 팍통과 아그뉴는 매우 만만한 사람들이었고, 어떻게 미국으로 쉽게 밀반입해 들어오는지(일본의 전쟁약탈의 그의 20억불의 배당)에 대해 설명했다.- 어떤 세금을 내거나 어떠한 법의 위반도 하지않고 컬티스가 상술한 JBS는 먼저 200억불의 금괴를 발견한 마르코스 대통령을 위해 세탁하는데 그들이 보증을 했던 벌 장군의 알고 있었다. 200억불 외에 JBS는 석유와 바꾸는 조건으로 아랍산유국에 금으로 제공하는 한 계획을 제안했다. 페르디난드는 일본에 석유를 팔 수 있었고 깨끗한 돈을 받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벌에 제공하는 그런 JBS의 풍부함 속에 벌은 의견을 달리하는 필리피노의 살인, 고문, 투옥을, 직접 지휘하고 마르코스는 해외계좌에 숙달된 수억달러를 인출하는 다수의 개인과, 사립 은행들 미국정부와 동시에 진행 됐으며 아시아를 통한 사적인 개인과 종교단체, 정부, 은행들로부터 훔친 것으로 질문하는 것에 단지 마음만 털어놓지 않는 것으로 단지 충분히 흥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에 따르면 그들의 소켓으로 그의 10대 아들의 눈알을 뽑아 낸 것에 의해 미국 국회에 증언하는 Primitive Mijares를 납치하는 준비를 했었다.


JBS의 소송 때문에 그는 절벽 위에 선 듯 했고 컬티스는 상원정보 위원회를 이끄는 Paul Laxalt네바다 상원의원의 사무실에 그의 증거물(300시간이 넘는 전화 대화 기록 테이프와 2천 페이지의 자료)과 그의 이야기를 하기를 1977년 12월에 결정했다. 이 자료는, 나중에 라스베가스의 시정 사무담당관이 된 렉솔의 부관 로버트 애셜리 홀에게 보냈다. 홀은 새해의 주말을 그 자료를 조사하는데 전부 보냈고 상원정보 위원회에 넘겨준 그 증거물을 추천하는 메모를 렉솔에게 썼다. 그 위원회는 그것을 조사했고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어떻든 컬티스 자료의 복사본들은 주요한 우익 활동가들에게 조용히 통과 됐다.


절망 속에서 컬티스는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뉴스의 저자와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 라스베가스선의 편집장 브라이언 그린스펀과 접촉했다. 그들은 그때에 알려진 그것과 같은, 1978년의 그 세부 이야기를 출판했다.


페르디난드는 컬티스를 전에 유죄선고를 받은 정신병자로 묘사하고 장난으로 속이기 위한 것으로 야마시타골드의 전설을 비웃는 것으로 모든 평판에 응답하고 미잘레스를 침묵시킨 것처럼 컬티스를 침묵 시키기 위해 파비안 벌을 급송했다. 1978년 6월 말 파비안 벌과 3명의 미확인 필리핀 대령은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의 암흑가의 인물과 만나기 위해 비밀스럽게 미국에 들어왔고 살인청부계약을 맺었다. 그 3명의 대령은 다수의 살해를 공작한 것으로 믿어진 3인조로 확인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필리피노 망명자에 의해 구별되었다. 이 시간 그들의 타겟 중의 한 사람은 로버트 컬티스 였다.


노만 커스트는 필리피노 친구로부터 살인음모의 존재를 알았고 그와 아직도 친구간인 울프 잔슨에게 통고 했다. 잔슨은 컬티스를 경계 시켰고 컬티스는 즉시 새로운 신원으로 잠행하고 새로운 장소에서 새 일을 찾았다. 그는 그 후 언제나 숨어 지냈다.


그 자신이 완벽하게 유지했던 컬티스의 일 중의 하나는 마닐라에서 그의 소유 위에 오싹하게 하는 발견 물이었다. 지가와 발모레스는 전부 거짓말이다. 보물을 숨기는 책임의 일본군 장군을 위해 봉사하는 필리피노 하우스보이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는 가짜였다. 그들의 확신이 승리한 후 컬티스는 그 두 남자와 가까웠고 발모레스는 명백히 진실을 그에게 말하기를 결정했다. 하우스보이의 존재로부터 멀리 폴과 벤은 또한 필리피노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인이다. 전쟁동안, 홈 아일랜드에 돌아가는 그것의 선적과 전쟁약탈물의 수집하는 책임의 비밀 부서에서 육군이 아닌 해군에서 그들이 봉사했다고 컬티스는 밝혔다.



그들은 해군소장에 못 미치는 지휘관의 계급에 올랐었고 보물의 대부분을 숨긴 해군이 지령하는 실제의 장교였다. 그들이 컬티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은 2명의 일본군 해군제독을 위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마닐라 거기서만 해도 그들은 마닐라의 독살자로 악명 높은 해군소장 이와부치 산지의 참모였다. 그러나 고위층 위에 그들은 모든 아시아의 약탈물을 수집하고 마닐라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는 범죄상의 지도자 코다마 요시오 해군 소장을 위해, 궁극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소형 잠수한 2대를 갖고 있는 이와부치 해군 소장에 의해 실행된 마닐라만을 떠나기 전에 그 잠수함에 의해 순양함 나치호를 가라앉힌 것을 포함하여 1943년과 1944년에 발모레스와 지가가 약탈물을 숨기게 된 것은 코다마의 명령이었다.


해군 지휘관들은 발모레스와 지가 또한 손 댈 수 없었고 사선을 넘어서 모든 힘을 갖고 있던 코다마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그들은 약탈물을 숨기는데 자유로웠고 보안과 Drute force에 필요한 모든 해군과 전쟁 포로에 의한 노동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숨긴 이것은 야마시타 골드가 아니다 이것은 코다마 골드이다. 그들은 수천의 포로들을 익사 시키거나 목을 베고 생매장한 어쩔 수 없는(무력한) 방관자들이 아니다. 발모레스에게 그 기억은 괴로웠을 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코다마는 맥아더가 루손에 진격한 그때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발모레스와 지가는 함정에 빠졌다. 그들은 비록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각 장소의 비밀지도 들을 훔쳐 정글로 들어 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맥아더의 진격과 야마시타의 항복 사이에는 많은 달이 지났다. 많은 일본군 장교들은 그 기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은 화려했던 트수지 대령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남아의 코다마의 약탈을 도운 이 후, 트수지는 다음 3년 동안 동남아와 중국을 방랑하며 수도승으로 변장하여 연합군의 생포로부터 벗어났다. 전범재판이 끝난 후 수가모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친구 코다마와 다시 명예를 회복하면서 트수지는 일본으로 돌아 왔고 그의 모험담을 한 권의 책을 썼다. 이 후 우익의 부활을 배경으로 한 코다마의 파워 속에 국회의원에 당선 됐다.


발모레스와 지가가 판단한 것은 야마시타 장군을 연루시키지 않고 이와부치 해군제독을 연루 시킨다. 단지 기본적인 성분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기본적인 성분은 잘 알고 있었다. 야마시타는 시를 비워두고 마닐라를 떠나는 명령으로 산악지방 깊숙이 들어갔다. 특별히 야마시타는 심부 그룹 지휘관 요코야마 시주오 장군에게 파식강위의 다리들을 파괴하고 군사시설을 폭파 한 후 시를 비울 것을 명령했다. 마닐라 지역의 해군을 지휘한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은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을 정비하고 독특한 지휘 속에 연합군과 싸울 것을 결정했다. 요코야마 장군이 곧 느낀 것은 이와부치 제독에게 억지로 다른 선택을 강요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와부치의 선택은 야마시타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고, 그의 지휘아래 있는 1만6천의 해병과 해군이 함께 마닐라에 머무르게 됐다. 최초 기갑부대와 37사단이 시를 폐쇄하자 이와부치의 군대는 부둣가의 군 시설과 군수품을 파괴하면서 파식강을 가로질러 철수 했다. 이런 방식은 완전한 보급품과 군 시설을 미국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라는 토오쿄의 해군사령부로부터 하달되어 사전에 이와부치가 준비해 둔 계획이었다.


1945년2월 3일 처음으로 미국의 기갑병이 시에 들어 왔고 다음날 보병이 그 뒤를 따랐을 때 각 지점에서 전투를 결정한(준비한) 일본군의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이와부치는 기관총을 설치한 참호와 함께 바리케이트와 가시 철조망을 설치하고 전략상의 교차 지점에는 땅을 파고 침몰선에서 인양한 배의 대포를 설치 했다. 40피트 두께의 돌 벽 뒤, 인트라무로스의 오랜 성벽도시 속에 이와부치의 강한 부대가 잠복하고 이와부치 자신은 그 중앙에 있었다. 맥아더는 민간인의 희생을 피하고자 공습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의 중화기의 사용 속에 많은 수의 민간인이 희생 되었다. 일본군들은 그들의 진영에서 잡힌 불행한 민간인들을 살해, 강간, 폭행, 불태우는 등 대학살을 자행 했다. 마닐라 전투에서 희생된 필리피노 민간인들은 10만 명이나 되었고 양 진영에서 죽은 군인들의 거의 6배나 되었다.


이와부치가 죽음의 전투부대를 결성한 것은 항복을 거절하는 사무라이 전통속에 자멸하는 행동으로 서양 군사 학자들에 의해 항상 설명되어졌다. 알려진 바로는 미국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마닐라 부두와 아주 중요한 군사시설을 파괴하라는 해군 부대장 오코치 덴시치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 최악의 살상으로 결과를 빚은 자멸적인 막판 대결로 군을 지휘한 이런 스타일로 왜 이와부치가 바꾸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맥아더가 자신의 명성 속에 개선 행진의 무대로 방비가 없는 시를 간단히 뺏을 수 있다는 갈망에 의해 이와부치의 부대는 산악지방으로 철수하는 길이 막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항복하는 것으로부터 싸우는 방향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할지라도 그가 할수 있었던 것으로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되었던 것이 이와부치의 모든 다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와부치는 어디서나 도살자의 스타일로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893년 니이가토 현에서 태어났고 충동적 성격이었으나 에타지마의 해군사관학교의 그의 동료 생도들에게 호감이 가는 젊은이로 인상이 심어졌다. 그는 영리했고 황실의 부관으로 지정될 정도로 집안이 좋았다. 1915년부터 1942년까지 조금 알려진 그의 경력은 결국은 코다마의 동료가 될 수 있었던 왕자의 전체적인 지휘 속에 황실의 부관으로서 비밀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2년 초 봄 이와부치는 전함 키리스마호의 함장으로 급파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전함은 섬의 헨델선 필더를 파괴하는 임무와 함께 해군 대장 야마모토에 의해 급파된 와중 이었다. 그 공격은 기함 히에이 호에 탄 부 해군대장 아베에 의해 이끌어졌고 일본의 비참한 패배가 결정되면서 이와부치와 아베의 전함은 허둥지둥 도망가야 했다. 이상하게도 그 대실수로 아베는 강등 됐고 이와부치는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말의 이런 일상적 임무의 하나의 짧은 상황 이후, 이와부치는 다시 나타났고 맥아더의 루손 진격 전에 마닐라 해군지구의 사령관으로 갑자기 임명되어 1943년부터 1944년 동안 쭉 머물렀다. 이것은 토오쿄에 수송하기 위해 마닐라에서 전략상의 군수물자와 전쟁 약탈물을 이동하는 책임으로 코다마의 다음 번 서열의 해군장성의 한 사람으로 일하는 곳에 되돌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자연스러웠고 이 후 미국이 접근 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마닐라 주위에 마지막으로 보물을 숨기는 것을 지켜 보는 일과 그 장소를 위장하는 비밀 책임속에 그 장소에서 일할 전쟁 포로와 따로이 징집한 사람을 배치하고 약탈물을 숨긴 흔적이 없을 때까지 요구된 마닐라를 방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지원하게 된다. 이것은 두려운 책임이라 할 수 있고 감정이 극에 달해 아주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닌 이와부치의 무시무시한 결정이었다고 설명되어지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와부치는 인트라무로스에 많은 민간인 인질 들을 잡고 있었고 오래된 도시의 밑에는 전쟁 포로들을 동원하여 터널 시스템을 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매우 바쁘게 보였던 4천5백 명의 해병들이 코레히도르 섬에서 터널시스템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코레히도르에서 그들의 방어가 무너졌던 2월 26일 아침 터널 속에 저장했던 수 천톤의 탄약과 폭탄을 일본 저항군들이 폭파시키면서 장관을 연출 했다. 20여명의 미군도 또한 섬을 맹렬하게 진동 시키며 덜석 거리고 큰 바위가 무너지며 매장 되어 죽었다.


지가와 발모레스는 이와부치를 위해 일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를 위해서지 야마시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물을 숨기는 장소로서 묘사 했던 항만과 베이프론트 시청, 성당, 인트라무로스, 보니파시오 요새, 산티아고 요새의 지하 터널시스템의 마지막 굴착 작업을 수행 했다. 그리고 이와부치는 모든 탑승자와 함께 순양함 나치호를 침몰 시키는 것의 하나로 필리핀해에 보유하고 있던 두대의 일본 잠수함을 조정했다. 그리고 지가와 발모레스가 훔친 보물 지도들은 야마시타가 아닌 이와부치 사령부로 부터였다.


드디어 미군은 마닐라의 이와부치를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너무 느린 전진에 지치게 되자 인트라무로스를 평평하게 하고 Inner시티를 남기고 모두 파괴하기 위해 박격포와 대포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와부치는 농상부의 건물과 입법부 빌딩, 재무국 빌딩에서 마지막까지 지탱하고자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조용했던 3월3일 재무국건물의 파편에 그가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재무국 건물에 있었던 이와부치를 확실히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변장하여 마지막 전투장소의 지하터널을 통하여 슬며시 빠져 나갈수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섬뜩하고 달리 보기엔 핵심이 없는 대학살과 파괴 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부치는 Golden Kite의 일등서열과 부 해군대장의 승진과 함께 제국 해군에 의해 사후에 영예를 받았다. 참으로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가?


그것은 항상 코다마로부터의 명령 아래 지가와 발모레스의 일은 가능할 수 있었고 그래서 코다마는 건설회사 들이나 해상인양 작업으로 가장하여 만든 그룹에 의해 전쟁 후 그 장소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하나의 일본 해양 인양 작업팀은 전쟁 후 필리핀의 앞 바다에서 일을 정확히 달성했다. 일본인의 건설회사들과 산업적 관계의 사람들은 지가와 발모레스가 야마시타 골드의 지역을 보았던 그 지도들이 필리핀 지역에서 전후의 계약을 확보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낮은 입찰로 확보했다. 페르디난드는 많은 장소를 이멜다에게 인계했고 그녀의 베이프론트의 매립, 굴착 그리고 역사적인 복원은 지도상의 주요한 장소였다. Dovie Beams사건 이후 페르디난드는 명백히, 그 보물 장소들을 가정의 평온을 위해 돌아간 그들과 나눠준데 대해 부자연스러웠다.


지도를 훔친 후, 지가와 발모레스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챙겨두었던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사람들을 고용해 발굴하는 모험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코다마가 그들이 인트라무로스에서 생존한 것을 안다면, 그 지도들을 되찾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1950년대 초, 지가와 발모레스는 돈이 다 떨어졌고 바기오 근처 고립된 장소에서 하나 발견 하는 모험이 가치 있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땅을 팔 수 있는 두 사람의 필리피노 일꾼을 고용했고 금괴의 한 무더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너무 흥분 했던 관계로 일꾼들에게 지불하기를 거절했다. 그 일꾼들은 읍에 있는 페르디난드 법률 사무소에 갔고, 어떻게든 그는 발모레스와 지가를 이해하려고 했고 처음으로 야마시타 골드의 큰 부피를 간직하게 됐다.



그의 보호 아래 두 사람의 전 일본군 해군 장교로서 생존한 그들이 무사히 귀국하는 조건으로 대부분의 금을 갖게 되는데 그들과 합의했다. 이와 같이 고무된 마르코스는 야마시타 골드의 전체이야기를 조사하는데 후쿠밋수와 직접 관계하는 것으로 퀴리노 대통령을 설득했다. 결론적으로 얼마나 많은 양이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모레스와 지가는 어쩔 수 없이 일반적인 일을 찾아 수년을 보내게 되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월급으로 생활 했다. 컬티스와 친구가 된 이후, 그들의 모든 나머지 지도들을 그에게 넘겨 주는 것을 결정한 것은 그들 자신을 지키는데 원위치로 된 것이었고 노쇠한 발모레스는 그 동안 억눌렀던 모든 진실을 그에게 불쑥 꺼냈다.


아마 야마시타 골드를 찾는 것은 1950년대 동안 사사카와 그리고 코다마와 친구가 되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이끌었다. 코다마는 명백히, 페르디난드에게 충심으로 지불하면서 정당하게 위장한 일본의 건설 프로젝트와 해양인양 작업 기금을 사용하여 약탈물의 일부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75년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모든 바다의 작업은 그의 개인적 인가를 받아야 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코다마를 무시하고 나치호의 인양작업에 한국의 야쿠자에게 인양허가를 발행 했다. 그는 필리핀 전체의 정확한 산호초 탐사를 내걸고 Machii Hisayuki라는 한국 신디케이트에게 넘겨 주었다. 마치이, 그의 일본인에 닮은 것처럼 공산주의와 시시덕 거리는 그들을 위협하고 바로 해산하는데 그의 동방파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2차 대전이후 한국에서 미국 보복(대응) 정보단체에 봉사했다.



그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다.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의 페리 라인을 관리하게 했다. 두 나라간의 짧은 노선. 마치이는 정부의 보호 아래 도자기와 피카소에 열정적인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필리핀에서도 정부의 보호를 맛 보았다. 명확히 그 나치호는 마치이에 의해 완전히 비워졌는데 그 후 그 침몰선을 인양하는데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6년, 선례가 없는 재난의 66년도 이 후, 코다마는 발작 하고 쇠약해 졌다. 불가피하게도 거기에는 독살의 루머가 있었다. 그는 1984년 1월 달 죽을 때까지 블랙커튼 뒤에서 사건을 조용히 조종하며 8년을 더 살았다.


1975년 야마시타 골드 이야기는 장난으로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선언한 이 후, 페르디난드는 재 충전속에 발굴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 테레사 2 장소도 비워 졌다. 7년이 지나 1982년, 두 사람( 한 사람은 오랜 CIA직원)이 마리벨레스 바탄 해안 별장에 페르디난드의 헬리콥터로 날아갔고 그들은 미식축구장 처럼 넓은 80피트 넓이의 터널속으로 내려가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금괴를 보게 됐다. 그 금괴들은 표준 크기 였으나 AAA라는 마크가 새겨져 있었고 테레사 2 장소로부터 찾아낸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CIA가 페르디난드가 보물을 옮기고 처분하는 것을 돕는데 관련 했기 때문에 1982년에 그 금괴 저장고를 보았다.


아직도 거기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발굴을 기다리는 많은 다른 장소들이 있고 컬티스가 가진 원본 일본 지도는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 손으로 더듬는 것 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그 지도속의 정확한 포인트를 위해 그들은 필리핀에 울프 잔슨을 돌아오도록 설득 하겠지만 잔슨은 그의 최후가 될 수 있을 마닐라의 여행을 알고 있는지라 그의 초 자연적인 힘은 필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출처 : 필리핀 바기오의 모든 것
글쓴이 : 유노바교 원글보기
메모 :

'時事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약비교  (0) 2012.11.30
투표합시다  (0) 2012.11.28
남유럽위기는 과잉복지가 아닌 부정부패  (0) 2012.10.22
[스크랩] 간디의 7가지 죄악  (0) 2012.10.10
시사상식  (0) 2012.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