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통계학의 발생지로 독일과 영국을 지목하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독일의 大學派 통계학과 영국의 政治算述派 통계학의 관점의 차이는 이들 국가가 추구하는 철학적 인식론에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통계학을 바라보는 눈을 결정짓는 철학은 모든 과학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과학과 철학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사고하고 인식한 점을 대략 살펴봄으로써 통계학에서의 통계적 사고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여기서 통계적 사고란 자연과 사회적 현상을 관찰하고 관찰된 것에 대한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자연과 사회의 현상을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이러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한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지식의 위기"나 "지식의 혼동"에서 그 당시 옳다고 믿었던 생각을 정리하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었다. 늘 새로운 방법론은 제시하려 했던 그들의 지식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오늘날 통계적 사고를 낳게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후세에 옳고 그름을 판정받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1. 과학적 사고 과학적 사고의 바탕에는 철학이 있다. 엄밀히 따져 과학과 철학은 구분이 된다.
과학은 언제나 대상이 되는 사물 자체의 성질, 법칙을 찾으나 철학은 항상 인간이 중심이 되어 그 것들의 본질과 의미를 제공한다. 과학은 주어진 사물을 그대로 설명 기술하며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여 주면 된다. 철학은 그 사물을 이해하며 그 내용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어진 사물과 사실들을 오히려 수단, 재료로 하여 스스로의 견해와 해석을 내려야 한다.
2. 그러나 과학이 제공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한번 더 자기의 것으로 높이 자각하는데 철학이 쓰였다. 따라서 과학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학문을 세우고 철학은 자각의 학문을 세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대상인 사물에 대한 변화를 예측하고 방향를 제시하는 학문이 필요하다. 이것이 통계학이라 생각된다.
3. 과거의 과학과 철학은 그들의 역할을 통해 볼 때 필연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었다. 조금 더 부연한다면 철학의 역사 속에 과학이 설명되어졌다. 고대철학은 B.C. 600년경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적 문제는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 즉, 세계의 생성에 관심을 두면서 시작되었다. 최초로 신화적인 세계관을 벗어난 탈레스(Thales)의 물,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의 무한자, 피타고라스의 수, 헤라클레이토스(Herak- leitos) 의 불이 대표적이다.
4. 이 시기 이후 자연이 세계전체의 근원이라는 자연철학은 페르시아 지배에 항거한 그리스의 아테네는 당시 그리스 최강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와 동맹하여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쳤다. 더군다나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 중심의 새로운 사회 질서와 함께 유능한 시민이 되려면 인간 중심의 자신감 있는 사고의 정립을 주창하였다.
5. 이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게 돌리는 소피스트(Sophist) 철학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지혜, 진리 보다는 인간의 영리함을 가르쳤고 개인주의가 팽배하였다 한다. 키케로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놓았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회와 철학을 비판한 소크라테스(BC 466-366)는 도덕적 인격의 완성을 역설하였고 오히려 기득권의 입김으로 청소년들에게 엉뚱한 것을 가르치고 돈을 받았다고 하여 급기야 사형된다. 그러면서도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자녀(3남)를 잘 지도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자녀가 재물에 마음을 쓰고 존경받을 처지가 못되면서 무엇이나 되는 듯이 생각하는 것을 꾸짖어 달라는 그는 끝까지 인간의 人性論을 주창하였다. 그가 가르친 플라톤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내가 알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는 가장 현명하였고 정의로왔고 가장 훌륭하였다.
6. 고대 철학을 체계화 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테네 출신의 플라톤(BC 427-347)과 마케도니아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이다. 이들 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모두 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침에 열중하였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인들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하는 수모에 반감이 폭발하여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두번씩이나 철학에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아테네를 떠나기도 하였다.
7. 고대철학인 그리스철학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연장선에서 완전한 의미의 신이 존재하였는데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선상에서 절대신의 존재를 믿는 중세철학이 AD 300-1400 사이에 일어난다. 이 시기에 문제는
신이 원죄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신인으로 예수를 인간세계에 보냈다는 것이다. 이성의 힘으로 어떻게 승인할 것인가
였다.
절대적인 존재가 우주의 중신에 지구가 있다는 우주관이 자리를 잡고 그 밖에 신의 세계가 있다는 종교적 자연관이 유행했다.
종교적 자연관은 지상계-천상계-신의 세계, 자연철학-형이상학-신학으로 구분하는 인식론으로 사회적으로 인간-교회-신, 평민-귀족-왕, 장인-길드-고객으로 구분하는 구조를 갖게하였다. 이런 구조에 저항한 지식인으로 루터(1483-1546)가 있고 그의 생각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런 분업화된 사회적 구조는 정치, 경제, 행정의 발달을 가져왔고 15세기 항해의 발달과 더불어 고대부터 사용해 오던 부정확한 달력인 쥴리우스력(Julian Calendar)의 개혁이 있었다.
이를 위해서 천문관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지금까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배격하는 신 플라톤주의(Neo-Platonism)가 등장한다.
신플라톤주의 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이어 받아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알마제스트:Almagest"에서 지구의 주위를 태양, 달등 여러 행성들이 회전한다는 사실을 발굴하여 소화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1510년에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알았고 자신이 죽던 해인 1543년에야 "천체의 궤도들의 회전에 관해서(De revolutionibus Orbitum Coelestium)"라는 제목으로 지구에 주어졌던 천문학적 기능을 태양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천문학적 계산을 위해 관측자료등 숫자와 수학을 중시하였다. 이 주의의 신봉자인 코페르니쿠스(그가 신플라톤주의자라는 증거는 없지만 태양에 대한 그리고 수학적 명료함에 대한 그의 견해로 보아)를 거쳐 그의 체계를 수용한 케플러(Joha- nnes Kepler, 1571-1630)나 갈릴레오 (Galileo Galilei, 1564-1642)도 신플라톤주의자였다. 이들은 근대 자연과학의 부흥을 도왔고 근세철학의 한자리에 서있게 된다.
8. 15-17 세기에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분리로 시작되어 인간 중심의 근대 자연과학의 부흥이 있었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주의, 수학, 연금술, 마술 등 어떤 지식을 믿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하는 지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지식의 위기: inteliiectual crisis" 에 빠진 시기이다. 이런 시대를 극복하려는 영국의 경험론의 선구자 베이컨과 대륙의 합리론의 시조인 데카르트의 등장은 철학의 한 획을 긋는다.
15-16 세기는 근세철학의 제 1기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중심의 문예부흥과 루터의 종교개혁, 1492 년 콜롬부스의 지리상의 발견 등 세계의 보편 필연성의 통찰을 유일의 힘으로 장래를 예측하여 행동하려는 근세적 자아의 확립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근대자연과학의 부흥기로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오-뉴턴으로 이어지는 천문학과 우주구조에 관한 관심과 갈릴레오-데카르트-호겐스-뉴턴으로 이어지는 고전역학의 완성,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지식, 하아비의 피의 순환을 밝힌 생리학, 데카르트-페르마-뉴턴-라이프니츠의 수학이 학문적으로 정리된 시기이다.
특히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는 비록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들이 회전한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에서 태양이 중심이 되는 대전환을 가져왔지만 당시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직관적인 문제로
만약에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의 빠른 운동을 한다면 왜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가 하는 문제도 있었고, 왜 지구위에서 던져 올린 물체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는 동안 지구가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제자리에 떨어지는가 하는 문제도 생겨났다.
그의 생각은 행성운동을 완전히 케플러의 1609 의 법칙(행성의 속도는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선이 같은 시간동안 휩쓰는 면적이 항상 같다)에 의해서 보완되었고 특히 갈릴레오의 1909 의 망원경은 금성의 차고 기우는 것을 관찰하여 그 이전까지 실제 행해지지 않 은 논리의 전개를 위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배제하게 되었다. 즉, 과학이 진실을 얻기 위해 실생활과 초연한 채 책을 읽고 사고하고 명상에 잠기는데서 벗어나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에 변형을 일으키는 방법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부피와 압력의 문제를 다룬 보일(Boyle, 1621-1691)과 천체운행, 빛의 파동설을 다룬 후크(Hooke, 1635-1703)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1530-1580 년경에 유럽사회의 풍조는
실용적 기술적인 작업에 사용되는 공정들이 자연에 관한 지식의 발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지식이 사회,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공정과 조작을 무시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였다. 이는 과학에서 실용주의 강조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일색의 중세학문에서 벗어나 많은 학설과 이론이 쏟아져 나온 고대 철학의 황금기가 다시 도래한 느낌이었다. 어떤지식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지적권위가 존재하지않는 "지식의 위기"를 맞이한다.
9. 특히 17세기는 15-16 세기에 유럽에 퍼진 우주를 신비적인 마술적인 힘으로 짜여진 네트웍으로 보고 자유로운 인간이 이 힘들과 작용하여 자연세계의 현상들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고 믿었던 "헤르메티씨즘과 신플라톤"의 사조는 소멸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뉴턴의 생각인 행성과 태양사이의 인력의 존재성을 밝혔고 제 1법칙인 관성의 법칙과 제 2법칙인 운동의 변화는 가해진 힘에 비례하여 그 힘이 가해진 직선의 방향으로 나타난다는 가설을 세웠고 제 3의 법칙으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수학적 추론에 의해 얻어낼 수 있었던 점이 뉴턴 역학의 성공을 결정적으로 이끌었다.
10. 18 세기는 계몽주의 철학이 미신무지의 민중을 계몽하여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전통의 구속을 벗어나게 하려는 몸부림이 있었던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