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世

[스크랩] 제24계 가도멸괵

kongbak 2012. 1. 15. 23:01

[병법삼십육계] 24계 가도멸괵...

兩大之間 敵脅以從 我假以勢 困 有言不信
두 큰 세력의 사이에 끼어 있어 적이 따를 것을 위협해 온다면 나의 세력을 거짓으로 꾸며 대응하라. 곤괘에 "말이 있으면 믿지 말라"고 했다.

곤困은 澤水困이라 하며, 못을 뜻하는 태台가 물을 뜻하는 감坎 위에 위치한 형상인데, 원래 물이 연못으로 흘러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연못에서 강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형상이니 오히려 연못이 말라 기가 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다르게는 또 연못인 태는 기쁨을 뜻하고, 물인 강은 어려움을 뜻한다. 또한 연못은 약하고 강물은 강하니, 약함으로 강함을 가리고, 어려움에도 그것을 기뻐하며 헤쳐나가는 능동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말이 있으면 믿지 말라는 것도 연못으로 드러내기에는 강물이 더 크고 거세니 지금의 작고 고요한 연못에 현혹되지 말하는 뜻이다.

가도멸괵이 그렇다. 원래 가도멸괵의 출전은 좌전 희공이년에 "진나라 순식이 굴의 말과 수극의 옥으로 우나라로부터 길을 빌어 괵을 멸망시켰다.假道于虞以滅괵"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춘추시대 진晉은 항상 이웃한 우와 괵을 쳐서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약소국인 우와 괵은 서로의 처지를 알고 협력하여 진이 괵을 치면 우가 돕고, 다시 진이 우를 치면 괵이 돕는 등 이와 입술의 관계처럼 서로를 도우며 강대국 진의 위협을 버텨내고 있었다. 진으로서는 상당히 성가신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어느날 진의 대신 순식은 헌공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
그러하므로 우리가 이 두 나라를 공격하려면 먼저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아야 합니다. 우의 임금의 욕심이 끝이 없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의 임금에게 줄 선물로 고른 것이 헌공이 아끼고 아끼는 굴지방에서 난 명마屈産之乘와 수극에서 난 벽옥與垂棘之璧이었다.

당연히 헌공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아끼는 명마와 보옥을 남에게 주기란 무척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쉽게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순식이 다시 헌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달래었다.

"
왕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잠시 우에 부관케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를 멸망시키면 어차피 우리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헌공도 순식의 계책을 따를 결심이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헌공의 명마와 보옥은 우왕에게 선물로 보내지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욕심이 많던 우왕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에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진은 예상했던대로인 우왕의 반응에 만족하며 다음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괵과의 국경에서 일부러 시비거리를 만들어 그것을 명분으로 삼고 군대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고는 괵을 칠 수 있게 길을 빌려달라며 우왕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
괵이 감히 대국인 저희에게 죄를 지었기에 이를 벌하려 하니 부디 왕께서는 길을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약소국인 우라고 아주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대신인 궁자기와 같은 이들은 그러한 진의 요구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고 있었다.

"
우와 괵은 서로 이와 입술과 같아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이脣亡齒寒 괵이 망하면 저희 우 역시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진에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미 받아먹은 것이 있는 우왕은 전혀 그러한 충언에 귀를 기울이려 들지 않았다.

"
약한 친구를 사귀려고 강한 친구에게 죄를 얻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결국 진은 우로부터 길을 빌어 손쉽게 괵을 공격해 멸망시킬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괵에서 얻은 전리품으로써 환심을 사 마음을 놓고 있는 사이 우왕이 헌공을 맞아 사냥을 하는 틈을 타 우의 수도를 쳐서 멸망시킬 수 있었다.

물론 진은 강자다. 우와 괵은 약자다. 그러나 우와 괵이 서로 힘을 합치고 있는 동안에는 진은 결코 그 둘에 비해 강자가 아니다. 그런 때 짐짓 한 쪽을 유혹하여 자기편으로 삼고 다른 하나를 멸망시킨 뒤 남은 하나를 공격하면 우와 괵은 다시 약자로 돌아가고 진은 다시 강자가 되어 그들을 마음껏 유린할 수 있다.

곤괘가 뜻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강을 뜻하는 감은 당시 진이 처해 있던 어려운 처지를 뜻한다. 못을 뜻하는 태는 그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짐짓 당당한 태도로써 우를 유혹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어려움이 기쁨이 되고 있으니 상황은 뒤바뀌고 능동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그러한 진의 태도를 주의하라는 것일 테고. 물론 진 자신도 그러한 상황에 겉으로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 고민할 것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 상대적으로 중원의 쟁패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면서 상앙의 변법으로 국정을 크게 일신한 진은 어느새 다른 여섯 나라를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에 소진이 나타나 제, , , , , 연의 여섯 나라가 종으로 연합하여 진의 동진에 대항하자는 합종을 주장하니,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된 소진에 의해 진의 팽창은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었다.

진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매우 성가신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군사를 휘몰아가면 진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제와 초 둘 뿐이었다. 그러나 여섯 나라가 힘을 합치면 가장 약한 한조차 함부로 대하기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함곡관에 갇혀 군사적 야심을 억누르기를 15, 진으로서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 때 마침 소진과 동문수학한 이로 합종에 대항하여 연횡을 주장하던 장의가 나타났다.

어차피 합종이란 오월동주에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이미 소진이 살아 있을 때도 제와 위가 조를 공격하고, 다시 연의 문후가 죽고 국상을 당한 틈을 타 제가 연을 공격해 10개 성을 빼앗는 등 내부적으로 균열이 가고 있었다. 장의는 그것을 이용했다. , , , , 한의 다섯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위는 쉽게 설득했지만 강대국인 제와 초가 문제였다. 특히 진과도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초가 가장 핵심이었다.

진이 제를 공격하려 하자 제와 초가 동맹을 맺고 막으려는 것을 본 장의는 그 길로 초의 회왕을 찾아갔다.

"
선생께서는 중원으로부터 떨어진 이런 궁벽한 곳으로 어떤 가르침을 주려 오셨습니까?"
"
왕께 이익을 주려 왔습니다."
"
어떤 이익입니까?"
"
만일 왕께서 저의 말을 들으시어 제와의 동맹을 깨뜨리신다면 진으로부터 상어의 땅 600리를 바치도록 할 것이며 진의 여자로써 시첩을 삼도록 할 것입니다."

상어의 땅 600리면 결코 작은 땅이 아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초회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리 하마 바로 허락하게 되었다. 물론 초에도 아주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진진이라는 대신이 장의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결국 상어의 땅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장차 초가 고립될 것임을 경고했지만 회왕은 듣지 않았다. 듣지 않는 것은 물론 제와의 동맹을 깨고 관문을 닫고는 오히려 장의에게 초의 재상의 인수와 재물까지 내려 땅을 받아오도록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진진의 예상처럼 장의는 처음부터 초에 땅을 양도할 생각이 없었다. 초회왕의 배웅을 받으며 진으로 돌아온 즉시 짐짓 술에 취한 척 수레에서 떨지고는 병을 칭하며 조정에 출사치 않으니, 장의가 주도하기로 한 상어의 땅 양도는 계속해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여기서 한 번 쯤은 의심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라간의 약속인데 3개월이나 끈다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600리나 되는 땅을 공짜로 얻을 생각에 판단이 마비된 초회왕은 장의를 의심하기보다는 자신의 성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그대로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성의를 보인다며 제왕을 모욕하는 편지를 보내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분노한 제왕은 사신을 보내어 진에 허리를 굽히며 친교를 맺었다. 초에 적대하기 위해서였다. 장의가 의도한 바대로였다.

초와 제의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이 단절된 사실을 확인한 장의는 그제서야 병을 칭하던 것을 그만두고 초의 사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조롱하듯 사신에게 말했다.

"
내가 진왕에게 봉읍으로 받은 땅이 6리가 있으니 그것을 대왕께 바치려 합니다."

사신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초회왕은 그제야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다. 분노한 회왕은 이성을 잃었다. 역시 진진이 나서서 말렸지만 초왕은 듣지 않았고 군사를 일으켜 진을 치려 했다.

"
진을 치는 것은 땅을 떼어 진에 주는 것만 못합니다. 진에 뇌물을 주고 그들과 힘을 합해 제를 친다면 우리가 땅을 내주고 진으로부터 보상을 얻는 것이니 차라리 초가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초회왕의 반응까지도 장의는 예상하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더구나 어제까지의 동맹이었던 제군과 연합한 진군에 의해 굴개가 이끄는 초군은 8만의 병사를 잃고 대장 굴개가 포로로 잡히는 등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더구나 생각도 못한 패배에 더욱 이성을 잃은 초회왕의 군대를 남전까지 끌어들여 더욱 철저히 격파함으로써 초는 강대국으로써 가지고 있던 힘의 상당부분을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온 진군에 의해 한중을 잃고, 더불어 초가 약화된 틈을 타 위와 한의 연합군이 초를 공격해 오고, 도리어 초의 존립까지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초회왕은 어쩔 수 없이 군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초회왕은 상어의 600리는 커녕 성을 두 개나 내주고서야 겨우 진으로부터 군대를 돌려 위와 한의 연합군을 막아낼 수 있었으니, 얻은 것은 없이 잃은 것만 많은 한심한 지경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한 번 기세가 꺾인 초로써는 이제 더 이상 진에 적대할 수 없었다. 홀로 대항할 수 없으면 동맹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제와는 돌이킬 수 없이 감정이 상해버렸고, 위와 한과는 또한 원한을 맺고 말았다. 결국 초회왕은 죽이려고 불러들인 장의의 언변에 놀아나 도리어 장의를 살려주고 진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고 화친을 맺는 굴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두 나라 중 하나인 초가 굴복해 오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먼저 위와 더불어 초를 공격한 바 있던 한을 찾아갔고, 그 다음에는 이미 진과 연합하여 초와 싸운 바 있던 제를 찾아갔다. 둘 다 초와 원한이 있었기에 진과 초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큰 위협이 되어 쉽게 장의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한이 다시 진과 동맹을 맺었으니 이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조 역시 장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다섯 나라가 진을 섬기기로 했으니 약소국이던 연 또한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진이 죽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진이 겨우 이루어낸 합종은 그렇게 장의에 의해 연횡으로 재편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한 번 크게 세가 꺾인 초는 다시 그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진에 쫓겨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왕성마저 옮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진의 통일을 막을 두 개의 힘 가운데 하나가 이로써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즉 한 마디로 가도멸괵의 요체는 기만이라 할 수 있다. 말이 있으면 믿지 말라는 그대로다. 공세인 입장에서는 뭉쳐 있는 적을 가르고 찢어 고립시킬 수 있어야 하고, 수세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하고.

군사전략의 핵심은 많은 아군으로 적은 적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언제나 마찬가지다. 지휘관이 미쳐있거나 아니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아닌 한에는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기본원칙이다. 아군은 항상 많게, 적은 항상 적게, 그래서 전략이든 전술이든 있는 것이다. 아군은 항상 집중하여 그 힘을 최대로 유지하고, 적은 자르고 찢고 분리하여 최소화하여 고립시키고, 그럼으로써 전장에서 숫적인 우위를 확보하는 것. 첨단무기가 난무하는 현대전에서도 그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질적으로 우위더라도 숫적으로도 우위면 더 좋다.

물론 가도멸괵은 그런 전술적인 차원에서의 계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매우 정치적인, 정략적인 단위에서의 책략이다. 국가단위에서, 혹은 정치단위에서, 손자가 말한 싸우는 방법 가운데 중지중 적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이다. 뭉치면 흩뜨리고, 흩어진 가운데 아군을 만들고, 그리고 하나를 쓰러뜨리면 그때 가서 나머지 하나도 마음대로 하는. 역사상 항상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던 검증된 책략이었다.

가장 최근에도 87 6월항쟁과 대선에 이은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의 위기에 놓였던 민정당이 역시 민주화의 두 축 가운데 하나였던 김영삼의 민주당을 끌어들여 3당합당을 이룬 것이 바로 그런 예였다. 아마 김영삼이 3당 합당에만 동의하지 않았어도 민주화진영은 단결하여 군사독재의 잔여들을 일찌감치 쓸어버릴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나 김영삼 계열이 모조리 민자당에 흡수됨으로써 오히려 민주화진영이 분열되고 약화되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97년에도 김대중의 정계복귀에 반대하던 민주당을 다시 3김정치의 종식을 명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또 한 번 민주화진영을 분리시키고 약화시키고 있었고. 김대중과 노무현을 거치면서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이 커지고 튼튼해진 것은 그만큼 김대중과 노무현을 떠받치던 민주화진영의 힘이 약화된 결과였다.

원래 노조와 노동자는 공동운명체여야 할 터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노조를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이다. 귀족과 노조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적절하게 조합하여 프로파간다한 결과였다. 노동자 안에 기득권을 만들고, 노조 안에 기득권을 만들고, 정작 노동자와 다른 노조를 대표하여 투쟁을 이끌어야 할 그들을 기득권으로써 다른 노동자, 노조와 분리해 버렸다. 그들 대기업노조가 선도하여 협상을 이끌어냈을 때 다른 노동자 노조에도 파급효과가 있을 것임에도, 그들의 협상과 투쟁을 다른 노동자, 노조와 분리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적대시하고 비난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쌍용자동차사태가 그 대표였다. 결국에 정리해고를 하게 된 것은 경영진의 책임이었다. 설사 정리해고를 하더라도 최대한 고용을 유지하고 정리해고 이후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 역시 경영진과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측은 철저히 그러한 책임을 노조원들에 정리해고를 집중함으로써 노조에 떠넘겨 버렸다. 노조만 버리면 된다. 여기에 비노조 노동자들은 당장의 고용유지를 위해서 사측과 함께 어제까지 동료였던 노조측 노동자들을 적대하게 되었고, 결국 쌍용자동차사태는 노동자와 사용자, 노동자와 정부가 아닌, 노동자와 노동자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노조가 패함으로써 노조는 더욱 노동자로부터 분리되고 사회로부터 고립되게 되었다. 철도노조가 저리 쉽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이 사회에서 노조란 고립된, 외로운 처지에 놓인 존재가 되어 버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이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더 강력한 사용자, 정부와 싸우려 할 때 분리되고 고립되어 버린 노조로써 무엇을 할 수 있을리. 그러나 이로써 이미 한국의 노조는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적이 많으면 분리하고 적이 강하면 약화시키라. 인간이 전쟁이라는 것을 하게 된 이래, 아니 전쟁이라는 것을 하게 된 원인인 정치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래 항상 강조되어 온 기본원리였다. 누구나 추구하지만 그러나 그렇기에 결코 쉽지 않은. 분리하려는 쪽과 분리당하지 않으려는 쪽과. 창과 방패와. 그러한 고민을 담은 것이 병법삼십육계의 제 24계 가도멸괵이다.




그나저나 확실히 웹에서 지원하는 한자란 한계가 있다. 도무지 쓰려 해도 없어서 못쓰는 한자가 이리 많으니. 성가시다.

 

출처 : 네잎 클로버
글쓴이 : 네잎 클로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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