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전쟁과 학살의 부끄러운 미국의 역사 -제 1장 :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kongbak 2011. 11. 11. 15:54

제 1장 :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1492년 8월 3일 기함 산타 마리아(Santa Maria)호 외에 2 척의 배를 거느리고 인도의 향료를 얻기 위해 스페인의 팔로스(Parlos)항구를 출항하였다. 그는 포르투갈(Portugal), 영국, 그리고 프랑스 국왕들에게 배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자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Queen Isabella)을 설득하여 배 3척과 항해에 필요로 하는 물자와 돈을 지원 받고 대서양을 건너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출항했다. 출항한 지 2개월 10일이 지났으나 인도는커녕 육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망망대해가 계속되자 오랜 항해에 지치고 끝간데 없이 넓은 바다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가득 찬 선원들은 콜럼버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요청하였으나 사명감과 부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콜럼버스가 선원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1492년 10월 12일 오후 선원들이 선상반란을 일으켜 회항하라고 콜럼버스에게 강요하고 있던 중 망을 보고 있던 로드리고라는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고 고함을 쳐서 콜럼버스는 겨우 위태로운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다. 맨 먼저 육지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큰상을 내리겠다고 현상금을 걸었지만 콜럼버스는 전 날밤 자신이 이 대륙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그 현상금을 자기가 가로챘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육지에 상륙하자 땅에 꾸러 엎드려 키스한 후 이 땅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명명하였다.  콜럼버스가 상륙했던 산살바도르는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육지가 인도의 어떤 지방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처음 만난 토착민을 인디오(Indio)라는 세례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는 그후 몇 차례의 항해에서도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하고 카리브해의 몇 개의 섬들을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콜럼버스는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직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하였으나 끝내 신천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동방여행에서 향신료와 많은 황금을 가지고 돌아온 것에 자극 받아 자신도 일확천금을 얻을 생각으로 항해를 기도했던 것이다.


    콜럼버스 일행이 상륙한 곳은 콜럼버스가 생각했던 인도의 동쪽 해안이 아니라 바하마제도(Bahama Islands)의 어느 섬이었다. 그는 이어 아이티(Haiti)와 쿠바(Cuba)를 발견한 후 포르투갈(Portugal)로 돌아왔다. 그는 결코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실제로 미국 즉 다시 말해서 <신대륙> 또는 <신천지>라고 불리는 거대한 땅을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라는 이태리 사람이었다. 그는 1499년 이후 몇 번에 걸쳐 신천지를 항해하여 브라질 연안을 따라 항해하였다. 그는 두 차례의 항해 끝에 남미대륙이 인도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신천지라고 명명했다. 후에 그의 공을 기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땅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America)로 명명했다.  그러나 미국에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미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는 아직도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매년 10월 12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로 기념하고 전국적으로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톤 D.C.의 중앙역 광장에 콜럼버스가 항해했던 산타마리아 호와 함께 거대한 콜럼버스의 조각상이 아직도 세워져 있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은 바로 수천 년 전부터 남북미주를 걸쳐 수많은 문화유적을 남긴 몽고계통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도의 향신료를 얻을 목적으로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 끝에 인도에 도달한 것으로 착각하고 신대륙에서 발견한 원주민들을 가리켜 인디오(Indio )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미국을 점령한 엥글로색손 백인들이 인도인들과 원주민을 구분하기 위해 원주민을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 Indian)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 남북대륙에 사람들이 살게된 것은 1만2천 년 전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칠레남부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목탄을 측정한 결과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선사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몽고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짐승사냥을 위해 시베리아를 지나 시베리아 반도의 연육교(連陸橋)를 건너 알래스카를 경유해 좀더 기후가 온화한 남쪽으로 내려가 북미대륙과 중남미를 거쳐 남미대륙으로 건너가 살게되었던 것 같다.  그 후 빙하가 녹아 바다 수위가 올라가자 연육교는 물속에 잠겨 지금의 베링해협(Berling Strait)이 생겨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갈라놓게 되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미대륙 전지역에 분포하여 살고 있었으며 특히 중남미에는 마야문명(Maya Civilization)과 아즈텍 문명(Aztec Civilization), 그리고 지금의 페루에는 잉카문명(Inca Civilization)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농업, 건축, 수학, 천문학 지식을 가졌던 문화유적을 남겼다.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Bahama Islands)를 발견할 당시 남북미 대륙에는 1,600만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히틀러에 의한 유태민족 대량학살과 스탈린에 의한 자국민 대량학살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원주민 대학살극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신대륙 정복자들은 거의 90퍼센트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진보와 문명의 발전단계,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된 것에 대해서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참회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명복을 빈 적이 없었다. 당시 학살을 자행했던 선조의 후손인 미국인들은 억울하게 죽은 1천만 명의 인디언 원주민들의 원혼을 달래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거국적인 규모의 참회행사를 갖고 그 당시의 참상을 기리 남기기 위해 대형 조형물을 미국의 수도에 세워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릇된 역사왜곡을 시정하고 후세의 미국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한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인들 초기 개국에 따른 개국신화를 조작하거나 어느 정 도의 과장된 역사기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허위나 과장된 기록으로 어느 개인이나 민족 또는 국가와 국가들이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국이 신대륙 탐험에 참여하기 전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유럽 국가들이 먼저 북미 신대륙에 진출해 있었고 프랑스가 영국의 뒤를 이어 북미 대륙개척에 참여하였다.  네덜란드는 1600년대 초기에 해상선단을 구축하여 명실공히 세계에서 제일 가는 해양국가가 되었다.  해상무역의 중심이 된 네덜란드(Netherland)의 암스텔담(Amsterdam)은 유럽에서 가장 돈 많고 번창한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네덜란드는 암스텔담을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 중계기지로 만들고 신대륙을 경영하기 위해 1609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했다. 네덜란드의 하프문(Half Moon) 호가 영국인 선장 헨리 허드슨(Henry Hudson) 선장으로 하여금 후에 허드슨만과 허드슨 강으로 명명된 수역을 탐험하고 깊고 넓은 양항(良港)의 조건을 갖춘 지형을 발견하자 이를 항구로 개발하고 뉴암스텔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크롬웰 (Oliver Cromwell)의 섭정이 끝나 왕위에 복귀한 찰스 II세는 북아메리카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을 노려 그의 동생 요크York 공에게 1664년 4 척의 군함에 1,000 명의 군인을 주어 뉴암스텔담을 빼앗도록 명령했다. 네덜란드는 영국의 공격으로 전쟁에 돌입하였으나 전쟁에서 패배하고 영국은 무력으로 빼앗은 뉴암스텔담을 요크공(公)의 이름을 따 뉴욕(New York)이라고 새로 이름을 지었다.    


    영국은 국내사정과 세계를 누비던 스페인의 무적함대인 아르마다(Armada)의 위력에 눌려 신대륙 탐험에 뒤늦게 진출했으나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후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북미대륙의 선점자(先占者)들을 물리치고 효과적인 식민정책으로 신대륙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스페인이 쿠바를 비롯하여한 서인도제도를 정복한지 20년이 지난 이후 1534년 프랑스는 카르티에(Cartier)라는 탐험가를 처음으로 신대륙에 세인트 로렌스 만(Bay of St. Lawrence)을 답사하도록 했다. 1541년에는 오늘날 캐나다의 퀘벡(Qubec) 북방 12 마일 지점에 처음으로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가 최초로 설치한 신대륙은 북방지역으로 혹독한 추위로 식민지개척에 실패하자 기후가 따듯한 지역을 찾아 1562년에 장리보가 플로리다에 상륙했으며 그후 1564년에는 로드니엘이 플로리다에 카롤린 요새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식민전쟁에 패배로 카롤린 요새가 함락되자 20여 년 동안 식민지개척을 중단하고 40년 가까이 지속된 위그노 전쟁이라는 종교전쟁에 온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종교전쟁이 진압된 후 프랑스 후작인 라로시가 1584년에 북아메리카를 탐험한 이래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퀘벡 지방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남쪽에는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하구인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어 더 이상 신대륙에 군병력을 증원시키거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부득이 미국정부의 요구대로 미국 중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싼값에 팔아넘기고 신대륙 경영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따라서 프랑스는 캐나다 북서쪽에 위치한 퀘벡주를 개척한 거주민만을 남겨둔 채 신대륙을 떠났다. 그래서 프랑스는 1803년 미시시피강 줄기를 따라 북미 대륙의 중부지역 전부와 남쪽으로는 플로리다 주 전체와 미시시피강의 하류인 뉴올리언스(New Olreans)에 이르는 광활한 평야를 미국에 헐값에 내주고 말았다.  이 거래를 루이지애나 흥정 (Louisiana Purchase)이라고 한다. 이 흥정으로 프랑스는 영원히 신대륙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미국의 제퍼슨 대통령은 당시 5백 만 명도 되지 않는 인구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등을 제외한 신대륙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

출처 : 주한미군은 철수하라!!
글쓴이 : 주미철운동본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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