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구려 건국의 숨은 공로자 부분노

kongbak 2011. 4. 28. 14:55

부분노는 추모왕와 유리명왕 시기의 무장이다. 그는 출신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고구려 개국 시에 참여했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 건국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명왕편에 등장하며, 신하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다. 추모왕은 비류국 송양과의 대결에서 활쏘기 시합에서는 앞서지만, 나라 일이 새롭기 때문에 아직 고각의 위의(威儀)가 없다면서 한탄을 헸다.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할 때에, 왕의 예로서 맞이하고 보낼 수가 없으니, 비류국의 고구려를 업신여길까봐 걱정을 했던 것이다. 이때에 부분노는 나아가서 이르기를 자신이 대왕님을 위하여 비류국의 고각을 취하여 오겠다고 자청한다. 추모왕이 타국의 장물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고 하자, 부분노는 대답하기를“이것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어찌하여 가지지 못하겠습니까. 대체로 대왕님이 부여에서 곤경하실 적에 어느 누가 이곳에 오시리라고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님이 만 번 죽을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 나와 요좌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시어 이루신 일이오니 무슨 일인들 이루지 아니하겠습니까?”하고는 자신을 비롯한 3인이 비류국에서 가서 고각을 훔쳐 가지고 왔다.

비류국 왕이 사자를 보내어 항의하지만, 추모왕은 고각의 색칠을 컴컴하게 해 오래된 것 같이 해놓았더니, 송양왕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이 일은 부분노가 고구려의 중요한 신하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부분노는 부여국 출신으로 추모왕이 고생하던 시절을 옆에서 보던 측근 신하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름에서 노(奴)라는 글자를 쓴 것으로 볼 때 그의 신분은 미천하여 오이, 마리, 협부와는 다른 대접을 받아 개국공신 명단에서는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류국의 고각을 훔쳐오는 도둑질을 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신분이 낮았을 때 익힌 재주를 활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부분노는 기원전 32년인 추모왕 6년에 오이와 함께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삼는데 공을 세운다. 이때 원정군의 대장은 마땅히 오이였을 것이고, 부분노는 선봉장이라고 하겠다. 그는 기원전 9년 유리명왕 11년에는 더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은 선비 공략이었다. 유리명왕은 선비가 그들의 거주지의 험함을 믿고 고구려와 화친하지 아니하려고 하며, 이로우면 나가 노략질을 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어 고구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으니, 누구든지 능히 이를 꺾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때 부분노가 나서서 “선비는 험고한 나라요, 그들은 용맹하고도 어리석어 힘으로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분노가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이 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유리명왕은 이 의견에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 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부분노는 고구려 최초의 식읍을 받을 뻔 한 인물로 기록된다. 그는 초기 고구려의 최고 명장으로 지혜와 담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이 50무렵에 선비를 복속시킨 공을 세우고는 더 이상의 흔적이 없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 유리명왕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 東明聖王, 瑠璃明王 』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鄒牟}> , 一云<衆解{衆牟}> ]. --- 王見<沸流水>中, 有菓{菜} 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 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동명성왕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太白山}> 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동명성왕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치게 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瑠璃明王>

○王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유리명왕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이 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출처 : 승훈이 아빠의 역사 이야기
글쓴이 : 이영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