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學산책

[스크랩] 식물의 생존경쟁

kongbak 2010. 6. 24. 07:54

알레로파시

비목(碑木)에 수액이 흐르고 석불(石佛)에 피가 흐른다는 봄이 어김없이 왔다. 올해도 봄에 들면서 여느 해처럼 공연히 마음이 설레고, 딴엔 발길이 바빠졌다. 뒤꼍의 텃밭을 일궈 남새라도 좀 뜯어 먹자는 시시하고 쩨쩨한 심보이겠으나, 실은 깡 촌놈의 피를 못 속여서, 뭔가 심어 키우는 재배본능이 발동한 탓이다. 밭의 속흙을 갈아엎어 놓고 한 발짝 물러나 흙살을 살펴본다. 촉촉하게 물기 밴 보들보들한 토색(土色)에 눈이 홀린다. 그런데 마른 흙에선 향긋한 흙냄새가 풍긴다. 세균(주로 방선균)들이 거름을 분해하면서 풋풋한 냉이냄새∙인삼냄새 비슷한 냄새물질인 지오스민(geosmin, earth smell)을 낸다. 알고 보니 토양세균이 풍기는 냄새가 바로 곧 흙냄새다.

 

 

식물이 해로운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다른 식물의 활동을 억제하는 현상, 알레로파시

밭에 심은 채소들이 띄엄띄엄 나 있으면 바랭이나 비름 따위의 잡초가 쳐들어오지만, 배게 난 열무나 들깨밭에는 엄두도 못 낸다. 그리고 촘촘하게 심어놓은 열무를 마냥 그대로 두면 튼실한 놈이 부실한 것들을 서슴없이 짓눌러버리고 몇 놈만 득세하여 성세를 누린다. 먹이와 공간(food and space)을 더 차지하려고 약육강식, 생존경쟁이 불길 같다. 동물들도 하나같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많은 먹이(meat)를 얻어서, 여러 짝(mate)과 짝짓기를 하여 많은 자손과 더 좋은 씨받기를 꾀하고자 그렇게 죽기 살기로 으르렁댄다. 풀이나 나무라고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식물들이 뿌리나 잎줄기에서 나름대로 해로운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이웃하는 다른 식물(같은 종이나 다른 종 모두)의 생장이나 발생(발아), 번식을 억제하는 생물현상을 알레로파시(allelopathy)라 하며, 우리말로는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한다. 그리스 어로 'alle'는 ‘서로/상호(mutual)’, ‘pathy'는 ‘해로운(harm)’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 같은 보통 고등식물 말고도 조류(algae)∙세균∙곰팡이들이 내놓는 화학물질을 타감물질(他感物質, allelochemicals)이라 하며, 그것의 본바탕은 에틸렌(ethylene)∙알칼로이드(alkaloid)∙불포화 락톤(unsaturated lactone)∙페놀(phenol) 및 그 유도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식물들이 타감물질과 관계없이 단순히 양분이나 물∙햇빛을 놓고 다툴 땐 타감현상이라 하지 않고 ‘자원경쟁’(resource competition)정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datum)들이 분비하는 화학물질인 페니실린(penicillin)이 다른 세균들을 죽이는 것도 타감작용의 한 예이다.

 

 

푸른 곰팡이부터 잔디밭의 클로버까지, 타감물질을 분비하지 않는 식물은 없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 알레로파시를 보자. 소나무 뿌리가 갈로탄닌(gallotannin)이라는 타감물질을 분비하여 거목 아래에 제 새끼 애솔은 물론이고 다른 식물이 거의 못 산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나는 관목(떨기나무)의 일종인 살비아(Salvia leucophylla)는 휘발성 터펜스(volatile terpenes)를, 북미의 검은 호두나무(black walnut)는 주글론(juglone)을, 유칼립투스(eucalyptus,유칼리나무)는 유카립톨(eucalyptol)을 식물체나 낙엽, 뿌리에서 뿜어내어 토양 미생물이나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한 마디로 식물치고 타감물질을 분비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면 된다. 잔디밭 한구석의 토끼풀이 잔디와 끈질기게 싸우면서 삶터를 넓혀가는 것도 클로버가 분비한 타감물질인 화약(火藥) 탓이고….

 

그리고 흔히 많이들 키우는 ‘허브’(herb, ‘푸른 풀’이란 뜻임)나 제라늄(geranium) 같은 풀을 그냥 가만히 두면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지만 센 바람이 불거나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별안간 역한(?) 냄새를 풍긴다. 잽싸게 침입자를 쫓을 요령이다.


 

사람들은 그 냄새가 좋다고 하지만 실은 ‘스컹크’가 내뿜는 악취 나는 화학물질과 다르지 않다. 감자 싹에 들어 있는 솔라닌(solanine)의 독성이나 마늘의 항균성(抗菌性) 물질인 알리신(allicin)도 말할 것 없이 모두 제 몸을 보호하는 물질이다. 어느 식물치고 자기방어 물질을 내지 않는 것이 없다.

 

 

식물도 동물처럼 병원균에 대한 방어 과정을 가지고 있다

또 병원균에 대한 식물의 방어 과정도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 병원균이 식물의 세포벽에 납작 달라붙어 유전물질(DNA)이나 효소를 쑤셔 끼워 넣는 날이면, ‘빛의 속도’로 체관을 통해 비상(非常) 신호물질을 온 세포에 흘려보낸다. 상처부위는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물질을 유도하여 세포벽 단백질의 용해를 막으면서 갑자기 세포벽에 딱딱한 리그닌(lignin)물질을 층층이 쌓고, 파이토알렉신(phytoalexine)과 같은 항생물질까지 생성한다. 제 깐 놈의 식물이 뭘 안다고? 믿거나 말거나, 식물은 이 지구에 우리보다 훨씬 먼저 온 어엿한 맏형임을 잊지 마라.

 


식물은 화학물질로 말을 한다. 알다시피 나방이 애벌레인 송충이는 솔잎을, 배추흰나비 유충인 배추벌레는 배춧잎을 갉아먹으며 빌붙어 산다. 그런데 벌레들이 달려드는 날에는 발칵 뒤집히고 난리가 난다. 나무와 풀은 얼간이처럼 손 놓고 뜯기고만 있지 않다는 것. 서둘러 소나무나 배추의 상처 부위에서 테르펜(terpene)이나 세키테르펜(sequiterpene) 같은 휘발성 화학물질(phytontid)을 훅! 훅! 풍긴다. 그러면 흑! 흑! 이게 무슨 향긴가 하고 말벌들이 신호물질의 냄새를 맡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그뿐만 아니라 말벌은 유충의 침과 똥에서 나는 카이로몬(kairomone)이라는 향내를 맡고 유충을 낚아채기도 한다.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 드는 천적을 어서 잡아가 달라고 말벌에게 ‘문자’를 보내는 그것들이 신기하지 않는가. 식물계는 정녕 신비 덩어리다!

 

이야기는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남미에 자생하는 콩과식물 일종에는 노상 진딧물이 와서 산다. 그런데 느닷없이 메뚜기 떼가 달려들어 부아를 돋우면 개미에게 ‘어서 와’하고 연거푸 메시지를 휙! 휙! 날린다.

 

개미는 진딧물의 분비물을 먹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보고 식물 쪽으로 달려온다. 억센 개미들이 들끓으면 메뚜기가 도망간다는 것을 콩 식물은 알고 있더라! 그뿐만 아니라 천적이 달려들면 이내 이파리의 맛을 떨어뜨리거나 움츠려 시들어버리는 내숭 떠는 놈 등등,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별의별 수단을 다 부린다. 만만찮은 창조물이다!

 


향신료로 사용하는 고추나 후추의 성분은 원래 해충을 막기 위한 성분이었다

그렇다면 매운맛을 내는 고추의 캡사이신(capsaicine)이나 후추의 피페린(piperine)같은 향료란 무엇인가? 원래는 식물들이 이런 대사부산물을 세포의 액포(vacuole)에 묵혀두어서, 다른 해충이나 병균의 침공을 막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양념을 음식에 섞어서 양분을 얻을뿐더러 음식의 부패를 예방하는 방부제로 쓴다. 그래서 동남아∙대만이나 중국의 더운 아랫지방 일수록 요리에 여러 씨앗가루나 풀을 넣기 일쑤라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체머리를 흔든다. 우리나라만 해도 남쪽지방 음식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짜고(소금도 일종의 양념으로 세균을 죽인다.) 매운데다 냄새 나는 방아풀의 잎이나 산초나무, 초피(제피)나무 열매가루를 물김치나 겉절이, 순대에 막 넣는다.

  

 

 

 

권오길 / 강원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생물의 죽살이], [꿈꾸는 달팽이], [인체 기행] 등이 있다. 한국 간행물 윤리상 저작상(2002), 대학민국 과학 문화상(2008) 등을 수상했다.
출처 : 마음경영
글쓴이 : 김성봉1005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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