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곤(鯤)의 治水와, 우(禹)의 治山治水와 樂山樂水와 Akihiro

kongbak 2009. 12. 22. 16:59
곤(鯤)의 治水와, 우(禹)의 治山治水와 樂山樂水

 

長江(양자강)과 황허(黃河)는 중국대륙을 가로지르는 두 줄기의 젖줄로 수많은 문명이 흥망성쇄했습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등의 다양한 설화와, 우신(禹神)으로 추앙받는 가장 경이로운 치수(治水)의 상징, 우(禹)왕의 전설을 들으며 성장합니다.

 

단군조선 제1대 단군왕검 시절, 중국대륙에 어마어마한 홍수가 발생하자, 그곳을 다스리던 요임금(帝堯陶唐)은 백성들이 천거한 숭백(崇伯)곤(鯤)에게 치수를 명했지만 9년이 지나도록 실패하기만 했습니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임금은 곤에게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유폐시키고 사공벼슬을 하고 있었던 곤의 아들인 우(禹:帝舜有虞)를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扶婁)에게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만나[塗山會盟] 치수에 성공했던 부루의 경험적 기록인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아 13년간의 노력 끝에 치수에 성공합니다. 그런 치수의 공적으로 우[夏后氏 즉 禹]가 순나라를 이어 받아 하(夏)나라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우와 곤은 치수의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곤은 오로지 물길을 막고 메우는 것만 일삼아 물을 들어오던 옛길로부터 강제로 북(北)으로 흐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 우는 바다를 배수장(排水場)으로 삼아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곤은 홍수를 막는데 치중하여 직강화(直江化)하거나 준설하고 제방을 건설하며 물길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토목공사에 치중했으나 번번히 예상치 못한 큰 홍수에 무너지거나 오히려 가뭄을 자초하는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우는 하천을 따라 땅을 구주(九州)로 나눈 뒤 필요한 곳에 제방을 쌓아 구택(九澤)을 만들어 강을 살리고, 구도(九道)를 건설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소(疏)를 만들어 자연스런 물의 흐름을 하천주변의 환경을 이용하여 완화시키고, 물길의 원천인 산과 숲을 다스리는 일에 치중하여 최소한의 제방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여' 홍수와 가뭄을 자연이 조절하도록 하는 치수(治水)는 물론 그 근원이 되는 치산(治山)에도 힘써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은 창고에 쌓이고 백성은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부루의 오행치수법을 바탕으로 우가 치수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잘못을 보완하고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우(禹)가 몸을 돌보지 않고 애태우며 중국 천지를  13년 동안 헤매며 이룩한 그 굽힘 없는  치수 활동은 그대로 그의 인간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는 허벅지 살이 쪽 빠지고 정강이 털도 빠졌으며 등은 낙타처럼 굽어 절룩거리며 걸었다. 후에 이런 걸음을 우보(禹步)라 했다.” 고 기록했습니다.

 

후일 백규(白圭)는 자신의 치수(治水)가 우왕보다 낫다고 맹자에게 자랑하였는데, 그 방법이 곤의 방법과 같았습니다.
맹자는 백규의 잘못된 치수방법을 지적하며 “그대의 말이 지나치오. 우왕의 치수는 물의 성질에 따른 것이오. 우왕은 사해(四海)로써 배수장(排水場)을 삼은 것이지만, 그대는 이웃 나라로써 배수장을 삼았소. 물이 역행(逆行)하는 것을 ‘홍수’라 하는데, 그것은 곧 홍수(洪水)를 말하는 것으로, 어진 사람이 싫어하는 바이오.” 라며 그의 오만한 태도를 책망했습니다.


물을 다스리는 방법은 사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해야지 그것을 억지로 막아서 역행(逆行)시키는 방법으로는 다스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폭우나 홍수 같은 기상(氣象) 이변은 과거 ‘절대 왕권’을 견제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기상 이변은 하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고, 천자도 꼭 따라야 하는 하늘의 메시지였습니다.

서경(書經)의 홍범(洪範)9조에는 “왕이 오만[狂]하여 사리분별을 못하면 오래도록 비가 그치지 않으며, 무질서하면 오래도록 가뭄이 들고, 편안한 것만 누리면 덥기만 하고, 조급하게 처리하면 춥기만 하고, 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바람이 분다.”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치산치수(治山治水)는 정치의 근본 도리이자 덕치의 산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는 산과 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治山治水는 국가 경영의 근간이자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경국의 기본이자 부국의 기초였습니다.
중국의 고대 국가인 하夏.은殷.주周나라는 치산치수로 국가 통치의 큰 터를 이루었으며 진晋나라도 치산치수에 성공하여 강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치산치수에 따른 백성들의 자연과 동화된 즐거운 삶에 대한 표현인 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라는 요산요수(樂山樂水)는 논어의 옹야(雍也)에 나오는 말입니다.
즉 치산치수는 통치자가 행해야할 정책이고, 요산요수는 그 결과에 따른 백성들의 긍정적인 삶의 도리를 의미합니다.

 

청계천 (淸溪川)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며 한양을 도읍으로 삼았는데, 그 한 가운데를 북악산 인왕산 낙타산 남산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내를 형성하며 동서로 흐르는 청계천이 있었습니다
이 청계천은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하천이었지만 토사가 쌓이는 바람에 한여름 홍수가 나면 물이 범람하여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반대로 갈수기에는 건천이 되버려 백성들의 생활오수나 쓰레기등이 흐르고 쌓이는 골치덩어리 하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청계천을 두고 조정이나 한양성 백성들은 차라리 메워 버리자고 하였으나 "한양은 李씨가 도읍할 땅"이라는 도참설에 의하여 터를 잡은 곳이라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한양의 생기를 운반하는 "한양의 명당수" 청계천을 없앨수 없다 하여 홍수에도 무사히 건너 다닐수 있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다리인 "광교"를 놓았습니다.

 

세종때 이 청계천을 정기적으로 준설을 하여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막았으며 수표교를 만들고, 청계천 한가운에는 물의 수심을 재는 "수표"를 세워 물의 양을 측정하여 홍수나 가뭄을 대비하였습니다.

 

영조때, 농정의 극심한 피폐로 전국의 백성들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는데, 심할때는 하루에만 3천명의 백성이 유입이 되는 날도 있었습니다
먹고살기위해 무작정 몰려든 백성들은 주로 청계천변에 숙식했는데 걸인이나 다름없이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이들을 조정이 무료로 구제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자, 영조는 이들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대대적인 청계천 정비사업으로 이 사업에 고용된 백성들의 숫자가 20만여명이었습니다.

이 청계천 확장과 준설은 당시 조선의 사정으로서는 대 역사였던 것이며, 인력보다 장비만 투입되는 현대 토목공사와 달리 고용효과가 커 빈민도 구제하고 국가의 주요 시설물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이른바 일거양득의  "뉴딜정책"이었던 셈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청계천은 또 다시 방치되어 걸인들과 빈민들의 공간이 되어 쌓인 토사와 이들이 마구 내다버린 쓰레기나 흘러드는 오폐수로 오염되자 일제는 이들을 강제로 쫒고 정비하여 청계천은 간신히 맑은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청계천은 완전히 썩은 하천이 되었습니다, 오갈데 없는 전쟁빈민들이 청계천에 판잣집을 지었고, 이들의 생활오폐수와  배설물이 그대로 흘러들어 악취를 풍겼습니다.
자유당 정권 말, 허정 서울시장은 더러운 청계천을 아예 보이지 않게 덮어 그 위로 도로를 만들거나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임시방편을 구상합니다.
그러나 재정 부족으로 조금씩 조금씩 공사를 진행할수 밖에 없었고,  5.16으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것을 이어받아 70년대 초 마장동 구간을 복개함으로서 마무리를 했으며, 이어 청계천 지류인 중학천.청운천.오장천.성북천 등도 모두 복개를 해 버립니다.
복개가 된 하천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울시내의 여과되지 않은 공장과 생활 오폐수나 쓰레기들과 심지어는 미혼모가 낳은 애를 유기하는 글자 그대로 하수구가 되어, 고스란히 한강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참여정부시절 2mb는 일개 시장이 참석하지 못하는 국무회의장에 입구에 나타나 참석하는 관계장관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버스중앙차로제와 청계천 복원안을 관철하기 위해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었으나 그와 관련된 당시 건교장관과 경찰청장은 난색을 표하여 늘 참석도 못해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끈덕진 2mb를 참석토록 허한 노대통령의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라는 제안에 건교장관과 경찰청장은 이를 검토했고 노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해 “찬반 양론이 있었지만 추진이 결정된 만큼 사업 성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것”이라며 “고건 총리가 관계장관회의 등을 통해 긴밀히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으로부터 청계고가도로 철거 작업에 따른 대책 등을 보고받고 “복원사업 시행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인 만큼 모두가 협조해 국민 고통을 줄이면서 최고의 결과가 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이 사업의 성공 자체가 하나의 문화재가 될 것이고 서울시민의 자존심은 물론 우리 국민의 수준을 한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우리 교통문화가 대중교통체계로 바뀔 수 있도록 국민 모두의 동참을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통카드 부정과 부시장의 부정부패와 교통혼잡과 청계상인들과의 충돌이라는 부작용과 졸속포장공사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버스중앙차로제와 청계천은 복원되고, 고스란히 그 결과는 2mb의 성과물로 국민들이 인식하게 됩니다.
2mb는 서울시장 퇴임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비판과 반대가 쏟아진 국무회의에서 '청계천 복원사업'은 서울시 안대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며 "다른 많은 사안에서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2mb의 청계천 복구는 지류를 살리고 자연적인 청계천이라는 원안과 달리 바닥과 문화재를 공구리로 덮어버리고 인위적으로 시민혈세를 흘려버리는 인테리어 포장공사로 바뀌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작은 개천의 경험과 착시이미지를 이용하여 중국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한 크기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의 내륙에 국민의 뜻을 역행하여 곤의 치수로 화를 자초하고 있습니다.[출처 : http://cafe.daum.net/ma-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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