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八公山과 中岳人

kongbak 2009. 12. 3. 16:46

팔공산은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안개가 비산(飛散)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뱃(海)사람 둘이 떠났고, 산(山)사람도 떠난다. 가운뎃(中)사람이 오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의 가운뎃산, 중악(中岳)이었다. (본문중에서)

 

뱃사람 둘은 김영삼 김대중을 말하고 산사람이란 부산사람 노무현이 떠난다는 말같다.

 

1.팔공산 갓바위불은 치료전문?

대입 치성의 명소로 매스컴 타는 관봉석조여래좌상의 정체는 병 고치는 약사여래


▲ 관봉석조여래좌상과 소원비는 사람들
대구와 경북 군위(軍威)·영천(永川) 일대를 아우르는 팔공산(八公山·1193m).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매스컴을 타는 ‘스타 마운틴’이다. ‘팔공산’ 하면 자녀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팔공산 갓바위 아래서 치성하는 학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신문 지면의 사진과 방송 카메라가 연례행사처럼 스케치해온 영향이다.


덕분에 팔공산의 상징처럼 돼버린 갓바위. 정식 이름은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431호)이다. ‘갓바위’라는 속칭 그대로 평평하고 납작한 돌을 갓처럼 머리에 쓰고 있는 불상이다. 이 갓바위 부처에게 간절히 빌면 소원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갓바위 불상의 정체는 약사여래(藥師如來)다. ‘수능 족집게’라기보다는 ‘신의(神醫)’에 더 가깝다. 온갖 병을 치료하는 부처다. 약사여래상에 손을 대거나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병이 낫는 수가 있다. 갓바위에서 기도하는 학부모들은 너나 없이 웅얼웅얼 ‘나무약사여래불’을 주문처럼 왼다. 의사더러 대입합격을 청탁하는 격이다.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갓바위 부처는 ‘나무’가 아니라 ‘숲’이기 때문이다. 갓바위불은 구원불(久遠佛), 정확히는 아축불(阿佛)이다. 동방의 극락세계를 주재한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우리나라 불교의 ‘메이저 리거’였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과 더불어 한국인이 추앙하는 4대 인기 부처다. 구병(救病)과 구명(救命)에 주력하는 틈틈이 부전공, 즉 입시 쪽으로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수험생도 갓바위에서 염원만 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 일정 부분 가능하다. 염(念)의 힘은 실재한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은 갓바위에도 적용된다. 기도의 성공사례가 전무하다면 갓바위가 입시 기도의 명소가 될 까닭이 없다.

 

팔공산의 옛 이름은 공산(公山)이다. 어원을 따지자면 ‘곰뫼’, 한자로 웅산(熊山)이다. ‘곰나루’라는 뜻의 웅진(熊津)을 공주(公州)로 바꾼 자음접변의 동화과정을 거쳤다.

 

‘공산’ 앞에 ‘팔(八)’이 붙은 이유를 설명하는 설(說)은 여럿이다. 먼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제자 8인이 공산에서 득도한 이래 팔공산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공산으로 들어온 원효의 수도승 여덟 명 가운데 셋은 삼성암, 다섯은 오도암에서 득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팔간자(八簡子)’설이 있다. 신라 왕자 출신인 심지대사(心地大師)가 팔간자를 공산 동사(棟寺)에 봉안한 것을 계기로 공산이 팔공산으로 개명됐다는 전설이다. 이 팔간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에게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8개 고을’설은 공산이 여덟 개 마을에 걸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8개 동네에 걸친 공공(公共)의 산이라서 팔공산이라는 말이다.


이상 세 가지 설 중 진위가 확인된 것은 8개 고을 설이다. 조선 초 이후 공산은 해안, 하양, 신녕, 팔거, 부계 등 5개 고을에 앉아 있었다. 여덟 고을이 아니다. 원효의 제자 8명설과 팔간자설을 증언할 당대의 고승은 아쉽게도 초혼에 응답이 없다. 이같은 영계(靈界)의 침묵을 부인(否認)으로 받아들인다.

 

공산은 조선 유학자들의 사대모화(事大慕華) 탓에 팔공산이 됐다고 믿는다. 중국 안휘성(安徽省)에도 팔공산이 있기 때문이다. 북조 전진(前秦)의 왕 부견(堅)과 남조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가 격전을 치른 곳이 중국의 팔공산이다.

 

우리나라의 (팔)공산에서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왕 견훤(甄萱) 간에 벌어진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무대가 바로 (팔)공산이다. ‘당시 고려 장군 8인이 순사(殉死)했고, 이후 공산이 팔공산이 됐다’는, 산이름의 유래를 추정하는 또 하나의 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역시 지레짐작일 따름이다.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신숭겸(申崇謙), 김낙(金諾) 두 장군의 넋을 달랜 고려 예종(睿宗)의 영가(靈駕)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예종은 “그런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사한 장군들이) 신숭겸, 김낙 외에 전이갑, 전의갑 정도인데, 다 해야 넷뿐 아닌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927년 팔공산에서 후백제에 패한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싸우다 죽은 신숭겸 장군의 영가는 낯빛이 유난히 누렇다. 적장 견훤에 의해 목이 잘린 장군을 애도한 왕건이 황금으로 얼굴을 만들어 안장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주로 강원도 춘천의 묘소에 머물다 가끔씩 팔공산 지묘사로 나들이도 한다. 왕건이 장군의 영혼을 위무하고자 지은 절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파계사에서 500m쯤 가면 나타나는 표충단이 바로 옛 지묘사 자리다. 장군은 견훤군에 대패한 파군(破軍)재, 가까스로 몸을 피한 왕건이 숨어 있던 왕산(王山), 달빛도 처량하던 반야월(半夜月), 견훤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한숨 돌린 안심(安心) 등 팔공산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회한에 젖는다. 장군은 “2001년 TV 드라마 ‘태조 왕건’을 잘 봤다”고 했다. 특히 극중 장군 역을 연기한 탤런트 김형일씨가 장군 후손들의 봄제사(春享祀)에 아헌관(亞獻官)으로 참석, 두 번째 술잔을 올린 것을 아주 고마워했다.

▲ 갓바위에서 본 눈덮인 팔공산

팔공산 산신(山神)의 호칭은 천왕(天王)이다. 여느 산신에 비해 격이 높다. 북쪽의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 동쪽의 주왕산(周王山)과 가지산(迦智山), 서쪽의 속리산(俗離山)과 덕유산(德裕山), 남쪽의 여항산(艅航山)과 신어산(神魚山)이 각각 팔공산을 호위하고 있는 형국만 봐도 팔공산신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이들 동서남북의 명산 중심점에 팔공산이 솟아 있다.

 

신라를 수호한 5대산 중의 하나

신라를 수호한 다섯 산(五岳)의 한가운데도 팔공산이다. 토함산(吐含山)이 동악, 계룡산(鷄龍山)이 서악, 지리산(智異山)이 남악, 태백산이 북악, 그리고 팔공산은 중악(中岳)으로 버티고 있었다. 일찌감치 신라가 공인한 영산(靈山)인 셈이다.

 

전쟁통도 아닌 현 시점의 팔공산은, 그러나 상처투성이다. ‘팔공산 산신이 노해서 지하철 방화사건, 도시가스 폭발사건 등 대구에서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 난무한다. 순환도로와 골프장으로 만신창이가 된 팔공산 신령이 인간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이 팔공산의 정기를 쏙 빼갔다”는 불평불만마저 나돌 지경이다.

 

역사 이래 팔공산은 외침을 막는 천혜의 요새로 통해왔다. 왕건과 견훤의 군사들이 팔공산에 깃들더니, 조선시대에는 의병들이 팔공산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의병과 권용수 장군의 의병부대원들이다. 광복 후 출몰한 빨치산과 1950년의 6·25전쟁도 팔공산신의 부담을 더 했다. 후퇴하던 국군과 UN군이 반격 태세로 돌아선 곳이 팔공산의 다부동(多富洞)이기 때문이다. 낙동강(洛東江)에 배수진과도 같은 방어선을 친 우리 편이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했다. 공산군은 몰살당했다. 그때 그 시산혈해(屍山血海)도 팔공산이 거뒀다. 팔공산 천왕만큼 원혼 돌보기에 바쁜 산신도 없다.


 

2.원효와 지눌을 낳은 불교 명산

신라 때부터 불고의 안방 역할, 절과 암자만 55곳...
허리자른 순환도로가 기운 꺽어

 


▲ 통일약사여래대불
팔공산(八公山·1193m)은 불산(佛山)이다. 품고 있는 절과 암자만 55곳이다. 여기에 갓바위 부처 등 조각상, 바위에 새긴 불상까지 보탠다면 산 전체가 불토(佛土)다. 주봉인 비로봉을 좌우에서 옹립하고 있는 동봉과 서봉이 팔공산 자체를 삼존불(三尊佛)로 형상화한 상태이기도 하다.

 

불교의 융성기인 신라시대 이래 팔공산은 불교의 명산으로서 흔들림없는 위치를 고수해오고 있다. 신라는 경주 석굴암보다 팔공산 석굴암(국보 108호 삼존석불)을 먼저 만들 정도로 팔공산을 애지중지했다. 신라의 ‘팔공산 사랑’이 낳은 고승이 바로 원효(元曉)다.

 

불국사 석굴, 오도암, 삼성암 등지에서 10여년간 수도한 원효는 ‘해골바가지 물’로 유명한 승려다. ‘오밤중에 목이 말라 들이켠 바가지 물이 나중에 알고보니 두개골에 괸 시체 썩은 물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전할 때 아주 요긴하게 원용되는 에피소드다. 원효는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사이에 당대의 천재 설총(薛聰)을 낳은 파격 승려이기도 하다. 아버지인 원효의 속성(俗姓)이 ‘설(薛)’이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의 왕자는 열다섯 살 때 출가했다. 심지(心知)왕사다. 출신 성분 덕에 팔공산 동쪽에 천성사, 북쪽에 중암암과 묘봉암, 서쪽에 파계사, 남쪽에 동화사를 세우는 파워를 과시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중암암(中巖庵)은 매우 특이한 절이다. 바위에 뚫린 구멍이 절의 출입문 구실을 하므로 ‘돌구멍 절’로 통한다.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4㎞ 가량 들어가면 나타난다. ‘정월 초하룻날 볼 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 돼서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과장이 웃음을 자아내는, 깊디 깊은 해우소(화장실)로도 유명한 곳이다.


고려로 접어들어서도 팔공산은 여전히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산이었다. 팔만대장경의 초본 격인 초조(初雕) 대장경을 봉안했던 절이 부인사(符仁寺)다. 부인사에 속한 암자만 39개였다. 승려의 수는 2000명이 넘었다. 승려들끼리 거래하는 승(僧)시장이 섰을 정도다. 또 동화사(桐華寺) 주지는 고려의 대표 승려였다. 고려 전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동화사 주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은해사(銀海寺)를 인종태실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삼았다.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원찰(願刹)로 보호했다. 왕실이나 귀족이 자신의 부귀공명이나 극락왕생을 빌려고 세운 절이 원찰이다. 불교를 탄압한 조선왕조지만 팔공산의 영기(靈氣)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팔공산 동화사 봉서루

조선의 팔공산에서는 지눌(知訥)이 나왔다. 지눌은 당시 불교계 자정(自淨) 결의문인 권수정혜결사문(權修定慧決社文)을 팔공산에서 발표했다. 불교 조계종(曹溪宗)의 본산이 팔공산인 셈이다. 1992년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동화사 통일기원대전 현판을 직접 썼다.

 

이처럼 신라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팔공산은 불교와 멀어진 적이 없다. 아미타, 미륵, 밀교 등 시대별 불교신앙이 오늘날 팔공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이유다.

 

불교는 왜 팔공산을 편애하는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영가(靈駕)를 초혼했다. 상당히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왕은 다소 싱거우면서도 정치적인 비화를 공개했다. “내 병을 (팔)공산 약사여래가 고쳐준 게 고마워서 팔공산에 공을 들였다. 물론 공산 일대의 토호들이 워낙 드셌던 것도 공산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고 털어놓았다. 절대권력자의 개인적 인연으로 불교를 위하는 한편, 지방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팔공산을 불국(佛國)화했다는 귀띔이다.

 

그렇다고 팔공산이 100% 불교천국만은 아니다. 한티 순교성지 때문이다. ‘큰 재’를 뜻하는 한티는 대구·칠곡·군위 경계의 산간벽지로, 가톨릭 신자들의 피난처였다. 신해사옥(1791), 신유사옥(1801),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기해사옥(1839)을 거치며 천주교는 모진 수난을 겪었다. 와중에 가톨릭 교도는 한티로 모여들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살았다. 그러나 조선왕실은 여러 차례 병사를 풀어 한티를 습격했고 그때마다 순교자가 속출했다. 오늘날 한티성지는 천주교 신자의 피정(避靜) 순례지로 자리잡고 있다. 가톨릭 교도가 일상업무를 피해 일정기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수련하는 것이 피정이다.

 

팔공산은 특정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틀림없는 고승(高僧)인 원효는 동시에 유교와 도교에도 달통한 반인반신(半人半神)이었다. 고향이 경북 경산이라 요즘도 팔공산을 동네 뒷산처럼 오르내리고 있는 원효대사의 영가는 필자를 가소롭게 여긴다. 3년 전, 필자를 소재로 나온 책의 당초 타이틀은 ‘절반의 신(神)’이었다. 출판사가 설문조사까지 벌여 결정한 이름이다. 출간을 앞두고 팔공산에 올랐다가 원효대사와 조우했다. 대사가 비웃었다. ‘어디 감히…’라는 투의 업신여김이었다. 한마디 툭 던지고 사라졌다. “귀신들 하소연 듣느라 귀깨나 따갑겠구만.” 그래서 부랴부랴 책 제목을 ‘귀가 따가운 남자’로 바꿨던 기억이 새롭다.

 

팔공산의 정기(精氣)는 권력자와 저명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팔공산의 영향권에 가장 직접적으로 든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공산초등학교 졸업생이다. 고향인 대구시 동구 신용동 용진 마을은 팔공산 자락에 있다. 용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 지세다. 생가는 이 용의 머리, 머리 가운데서도 중앙에 위치한다. 아주 제대로 자리잡은 집이다. 그러나 그는 팔공산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물론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대구공고 출신인 전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허가한 골프장을 내느라 팔공산의 얼굴을 밀었고, 순환도로를 닦으면서 허리를 잘라버렸다.

 

이 바람에 팔공산의 상서로운 기운이 대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팔공산 훼손은 대구의 물(水)을 말렸다. 물은 부귀(富貴)를 의미한다. 물이 없으면 부자도, 귀한 사람도 나오기 어렵다. 강으로 내려가는 물이 줄어들면 땅이 마른다. 이어 기(氣)는 분산되고 인재(人災)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울러 대구는 고층빌딩을 거부해야 옳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지역(盆地)인 대구는 음(陰)이다. 팔공산의 양기(陽氣)와 조화를 이루려면 5층 이상은 무리다.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대구의 생기(生氣)를 야금야금 빼앗아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구설이 끊이지 않았던 동화사 통일 약사여래불을 탓하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오해는 풀어야 한다. 높이 33m에 이르는 이 대불(大佛)은 명칭 그대로 ‘통일을 부르는 부처상’이다. 불상은 13년째 남북통일을 묵언(默言)으로 외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만 해도 통일은 ‘우리의 소원’ 노래 속에서나 가능한 신기루였다. 지금 통일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국민은 없다. 염(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길거리 탁발승의 불전함에 돈을 넣을 때마다 동행자는 “한 길 사람 속도 모른다”며 핀잔을 준다. “스님 행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술이나 마시는 가짜 중에게 왜 속느냐”는 것이다. 해명은 언제나 같다. “나는 저 사람에게 술값을 준 게 아니라 부처님에게 시주한 것이다.” 팔공산 통일 약사여래불도 마찬가지다.


 

3.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웅지를 키운 곳

팔공산 석굴서 기도하며 신의 계시 받아...
무예 연마하던 바위 등 영기(靈氣)로 충만

팔공산(八公山·1193m)의 영기(靈氣)는 여전히 충만하다. 오히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시절, 충천했던 영기만큼이나 강해진 상태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영기를 뿜어내고 있을 정도다. “돌에 든 미륵을 목격했다”는 영기 예민한 이가 적지 않고, 인간의 생로병사 길흉화복을 귀띔하는 신비로운 돌도 있다. 신(神)이 깃든 돌이다. 팔공산 갓바위 인근 개울에서 발견돼 서울 인사동으로 옮겨진 3.3㎏ 남짓한 화산암과 퇴적암의 중간 성분으로 이뤄진 돌이다.

 

‘돌할머니’로 통하는 이 돌은 OX퀴즈 식으로 물음에 답한다. 속으로 소원을 말한 뒤 돌이 쉽게 들리면 그 소원은 터무니없는 소원이다. 반대로 옴짝달싹 안하면 그 소원은 이뤄진다.

 

팔공산의 ‘돌’들이 이토록 영험한 파장과 영적인 파동을 분출하는 배후에는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있다. 김유신은 팔공산, 그 중에서도 팔공산의 돌과 인연이 깊다.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17세 때 팔공산 석굴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다. 고구려가 신라를 강하게 압박할 무렵이었다. 김유신 영가(靈駕)는 “나라를 구할 지혜를 청하는 내 기도에 (팔)공산 신령이 응답했다”고 인정했다. “신의 계시가 삼국통일의 청사진이 됐다”는 고백이다. 현행 6-3-3 학제에서는 고교생까지 아이 취급을 받지만, 신라 시절 청소년의 사고력은 요즘의 철든 성인과 다를 바 없었다. 전인교육의 힘이었다.

 

김유신은 경주 충효동 소재 자신의 묘소(사적 21호)를 외면하고 있다. 자신의 음택(陰宅)이 아닌 탓이다. 김유신묘에 누워 있는 이는 신무왕(神武王)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 동쪽의 김인문(金仁問)묘가 진짜 김유신묘다. 그래도 김해 김씨 화수회는 국가가 공인한 사적 21호 묘지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무관하다. 주소나 번지수는 인간에게나 유의할 따름이다.

 

▲ 절벽 위의 중암암 돌구멍절.

 

김유신 영령은 경주의 무덤 대신 팔공산 장군봉 장군당을 즐겨 찾는다. 김유신사(祠), 효령사(孝靈祠) 등으로 불리는 자신의 사당에 머물며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 귀화한 당나라 장수 이무의 혼령에게 팔공산 구석구석을 안내한다. 김유신을 ‘팔공산 산신(山神)’으로 받들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한 이유다. 자주 눈에 띄니 그리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팔공산에서 고려의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혼백을 감지한 사람이 장절공을 팔공산신으로 모시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김유신은 은해사골 중암암의 장군굴, 그 옆의 깊은 샘인 장군수, 건들바위, 삼인암, 만년송, 그리고 대구를 내려다보며 말(馬) 형상 바위에서 무예를 연마한 말머리바위 등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몸은 떠났지만 1300여년 전과 유사한 팔공산 곳곳을 오르내리며 추억에 사로잡히곤 한다. 영혼에게 시간과 공간은 역시 무의미하다.

 

김유신이 불굴사 석굴을 가리키며 일러줬다. “바로 여기서 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신의 계시란 곧 삼국통일의 비결이다. 소년 김유신이 “적국이 무도해 이리와 범이 돼 영토를 침략하니 평안할 해가 없습니다. 하늘은 뜻을 내리셔서 제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라고 기원했다. 기도 나흘째 되던 날, 노인이 나타났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혼자 거처하니 어쩐 일인가.”

김유신이 물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명(尊名)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만년송으로 가는 극락굴.
“일정한 거처없이 인연 따라 움직이는 난승(難勝)이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국가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스러워 이곳에서 염원하고 있습니다. 제 정성을 굽어 살피셔서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

 

김유신은 그렇게 비법을 받았다. ‘조심하라. 함부로 전하지 말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되레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난승(難勝)’은 ‘승리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노인의 모습으로 출현한 신은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할 가능성을 100%로 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불굴의 노력으로 난승을 완승(完勝)으로 돌려놓았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은 대구를 내려다보며 웅지를 키웠다. 대구의 특징은 의리와 신앙, 그리고 충절과 역동으로 요약 가능하다. 팔공산 불국(彿國) 미륵사상의 영향으로 미래지향적인 동시에 현세에서도 성실히 복록을 쌓는 것이 대구 사람들의 캐릭터다. 역사는 배우는 게 아니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흘러가게 놔둬야 한다. 종교보다는 문화와 정서가 우선이다.

 

대구 비산동은 원래 평야였다. 옛날 어느 여인이 달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서쪽에서 산(山)이 날아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여인은 “아이고, 산이 나네”라고 비명 지르듯 외쳤다. 순간, 하늘을 날던 산은 수직강하했다. 그 자리가 바로 비산동이다. 당초 ‘날뫼’, 즉 ‘나는 산’이었던 것이 ‘비산(飛山)’이 된 것이다.

 

산은 양(陽)이고 달천은 음(陰)이다. 산이 냇물가로 주저앉은 것은 곧 성적 교합이다. 섹슈얼 인터코스(sexual intercourse)는 잉태 행위다. 출산은 풍요로 이어진다. 대구의 생명력을 암시하는 상징 설화다. 제2의 김유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용솟음치는 기운이기도 하다.

 

종교가 국민을 선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직은 공직이다. 영계(靈界)가 낙점한다. 영계가 비난하면 최고위직은 궐석이다. 형 같은 아우네 집에 자중지란이 일어난다. 창피해진 가장은 잠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다. 뒤를 따라온 다크호스 세 마리가 가장의 바짓가랑이를 자꾸 잡고 매달린다. 선왕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이 왕 노릇을 하더니 이제는 세자를 책봉해가며 왕정을 공고히 하고 있다. 대통령의 자식이 대통령이 된다면 코리아는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현대판 왕국이 된다. 그런데 조지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도 대통령이다.

 

팔공산은 혈연이라는 최대 인연(因緣)을 매몰차게 자르지 못한다. 현대는 컴퓨터와 인터넷, 정보통신(IT)이 지배하는 전연(電緣)의 시대다. 다음 단계인 영연(靈緣)의 시대가 머지않았다. 팔공산은 김유신과 천하통일을 꿈꾸는 이들에게 ‘덕(德)’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스스로 만든 덕은 아니다. 인내로 살아온 덕이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일희일비, 파르르 떨어서는 안된다. 경청(敬聽)하되 경청(傾聽)해서도 안된다.

 

팔공산은 효충(孝忠)을 강조한다. 충효(忠孝)가 아니다. ‘효 다음에 충이어야 한다’고 몇 번씩이고 다짐을 받는다. 무기보다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라고도 한다. 팔공산은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안개가 비산(飛散)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뱃(海)사람 둘이 떠났고, 산(山)사람도 떠난다. 가운뎃(中)사람이 오고 있다. 팔공산은 신라의 가운뎃산, 중악(中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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