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14연대 반란사건

kongbak 2009. 6. 14. 08:29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본고는 주로 군사작전을 중심으로 한 광양과 관련된 사건의 개요를 다루고자 하였다. 현대사의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있고 이 사건과 관련된 생존자들이나 그 후손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각적이고 신중한 검토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후고를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국군의 전신이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 4연대(광주주둔)가 창설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이었다. 창설요원들은 전라남도내 각 경찰서와 군청의 협조룰 받아 모병에 나선 결과 제 1기 A중대 270명을 모집하는데 700여명이 응시했다. 도립병원에서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을 거치고 특히 해방전의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장교 또는 하사관 출신과 중학교 이상의 학력자를 우대해서 선발, 1월 15일 창설을 보았던 것이다.

A중대 창설에 이어 동년 4월에는 B중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군인출신들은「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며 정식 군대는 다시 생길것」이라는 생각으로 갈수록 모병에 응하지 않아 부대편성이 곤란하였다. 그런데다가 경찰과의 잦은 충돌사건으로 가장 큰 문제거리로 등장하였다. 군, 경의 충돌은 경비대원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으로까지 번지는데 순천경찰서 사건과 영암군경 충돌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이 같은 군경의 마찰은 그 원인의 일단을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① 경비대가 창설될 때 「경찰예비대」란 간판을 달고 나왔기 때문에 한때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간주되었다. ② 미군정하의 정책이 경찰 우선주의였다. ③ 경비대에는 일본군 출신이 많았다. 장교는 일제하에서 고등관 이상의 대접을 받았고 하사관, 사병들도 군인 우선을 내세웠던 군국주의의 덕분으로 군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④ 경비대에 입대한 병사들 중에는 일제하의 압정에 시달렸던 농촌출신 계층이 압도적인 숫자였다. 그들은 해방후 국립경찰이 일제경찰의 수법을 그대로 써 동포를 괴롭힌다고 판단한 나머지 경찰을 증오했다. 사실 당시에 경비대에 입대한 사람중에는 그들의 고향에서 경찰과 충돌했거나 경찰을 피할 목적으로 입대한 자들이 많았다.

이상의 4가지 이유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경비대를 선동과 선전으로 몰고간 것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후일 14연대 반란이 터지고 난 후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南勞黨 全南軍事同盟責은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인 池昌洙 상사였다. 그를 정점으로 4연대 내에는 많은 좌익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47년 5월 4일 제 5여단 산하에 여수의 제 14연대가 창설되자 광주의 4연대에서 1개 대대병력이 차출되었다. 이 가운데 제 4연대의 좌익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설된 제 14연대의 위치는 여수읍 신월리로 이곳은 일제말 일본 해군 항공기지였다. 더욱이 미군 철수를 서두른 미군정의 국방경비대 증군 방침에 따라 제 14연대는 3개 대대병력을 새로이 모집했는데 응모자가 없었기 때문에 불온사상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지원자는 무조건 입대가 허락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에서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면 입대하는 자가 많았다. 한편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발생한 「4.3폭동」이 군경의 끈질긴 작전으로도 진압되지 않자 국방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증원계획의 일환으로 여수의 14연대에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기로 계획하고 10월 19일 밤 여수를 출발 제주도에 입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기밀을 탐지한 지하 남로당에서는 14연대의 조직책인 池昌洙 상사, 吳一均소령, 金智會, 洪淳錫소위 등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령하였다.

이 지령에 따라 선동된 반란군은 20일 새벽 6시 통학열차를 이용하여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천경찰을 비롯 광양, 구례, 곡성, 보성, 고흥, 광주, 장성 등지에서 긴급 출동한 지원병력 500명은 죽두봉과 풍덕천을 경계로 반군과 대치해 교전을 하였으나 진압을 위해 순천에 도착한 광주 4연대 9중대까지 총 한방 쏘지 않고 반란군과 합류해버려 이날 오후에는 순천마저 그들에 점령되고 말았다. 처참한 희생이 줄을 이었다. 반란의 기간중 여수지구에서만도 관민 1,200여명이 학살당하고 중경상자 1,150명, 가옥의 소실 및 파괴 1,538동, 이재민 9,800여명이 발생하였다. 순천지구의 인명피해도 약 400여명에 달하였다.

이때 광양경찰 병력 1개 중대가 순천에 파견되었는데(48년 10월 20일) 이 인원은 광양군내 7개 지서와 2개 직할파출소에서 차출된 인원이었다. 총 지휘는 광양경찰서 사찰과 吳錦容 주임이 맡았고 서장인 崔點圭는 만일의 경우 광양경찰서를 맡기로 하였다. 광양에서는 당시의 사건규모를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차출된 경찰은 1인당 13-15발 정도의 실탄밖에 배급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양경찰서의 차출병력은 순천으로 진입하기도 전에 기습공격을 받아 광양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 기습에 3-4명이 희생되었다.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은 1개 대대로 하여금 광양-->구례-->곡성-->남원을 경유하여 전주로 진출할 것을, 또 다른 1개 대대로 벌교-->보성-->화순-->광주-->이리로 진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출동한 4연대가 학구와 구례구에서 반란군의 진로를 차당하고, 육군 총사령부가 10월 21일 반군토벌 전투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 宋虎聲 준장을 임명함으로서 진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0월 21일에는 순천이 진압되었고 27일에는 여수가 탈환되므로서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소탕되었다. 그러나 순천을 진압한 진압군은 광양쪽으로 반란군들의 퇴로를 열어 주어야만 했다. 그것은 폭도외에 양민과 시가지의 건축물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亂의 주모자 金智會, 洪淳錫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잠입하였다. 이 도주하는 잔여병력에 대한 진압작전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압작전을 위해 광양에 들어온 부대는 2개 부대였다. 崔南根 중령이 이끄는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제 15연대가 그 하나이며 또한 순천을 진압한 다음 광양으로 들어온 군산 제 12연대(연대장 白仁燁 소령)가 다른 하나이다. 최남근의 부대는 옥곡면에서 반란군과 첫 접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최중령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얼마후 무사히 돌아 왔으나 淨軍과정에서 적색분자로 밝혀졌으니 이때 포로가 된 것은 짐짓 거짓이었다 할 것이다. 최중령 대신 申尙徹중령이 새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이 부대는 광양으로 진격하였다. 그런데 광양의 입구에서 약 2㎞ 떨어진 곳에서 마산의 부대와 군산의 두 부대가 충돌하였다. 반란군의 복장과 동일했기 때문에 서로 아군과 반군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군끼리 이 싸움에서 10여명의 부상자가 난 후에야 오해가 풀려 두 부대는 함께 백운산 공비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순천에서 진압군이 광양으로 들어오기 전에 광양지역의 형편을 탐색하기 위하여 정찰부대가 파견되었다. 10월 22일 밤, 제 4연대의 2개 소대가 이 임무를 띠고 광양에 파견되는데 소대장은 文重燮소위였다. 문소위의 소대가 광양에 도착한 것은 23일 새벽이었다. 광양입구의 회암부락에 도착해보니 읍내의 주요 건물에는 人共旗가 꽂혀있었다. 이때 광양에는 金智會가 이끄는 반란군은 이미 백운산 방면으로 도주하고 없었지만 일부의 반란군과 지방폭도들이 광양군청과 경찰서를 점령하고 있었다. 문소위의 2개 소대는 곧 반격을 개시하였다. 1시간 정도의 총격 끝에 문소위의 소대는 70여명의 반란군을 사살하였다. 경찰서를 탈환한 문소위의 소대는 반란군과 자방폭도들이 작성한 보안대, 유격대, 인민위원회, 자위대 등의 명부와 불온 삐라를 압수하였다. 그리고 그 명부에 의해 10여명의 지방폭도를 검거, 경찰서 앞에서 즉결처분 하였다. 산악지대로 잠입한 반란군의 주요한 약탈 대상지가 되었던 곳이 광양이었다. 지리산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반란군들은 백운산에 진을 치고 봉강면, 옥룡면, 옥곡면, 진상면, 다압면 일대에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이 광양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으므로 광양의 경찰이나 유지들은 대부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반란군들이 광양을 거쳐 백운산방면으로 광양경찰은 섬진강변에 신원리까지 퇴각하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광양경찰은 마산 15연대의 광양진출에 힘입어 비로소 광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따라서 광양경찰은 반란군들이 백운산 지역으로 잠입한 후에야 토벌작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처참한 동족상잔, 그러나 만약 14연대 반란사건의 경험없이 6.25를 만났다면 대한민국은 쉽게 赤化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반란사건 후에 있었던 대대적인 淨軍作業과 일반 민중의 뼈아픈 체험이 6.25에 대하여 이상적이 방패의 구실을 해주었다. 비극은 비극대로 남았지만 이 사건이 대한민국을 튼튼한 반공국가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