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무방비 도시' 서울에 대한 경고

kongbak 2008. 2. 14. 11:45
 

'무방비 도시' 서울에 대한 경고


숭례문에 국화를 바치는 심정은 참담했다. 화재 현장은 사진 이상이었다. 참혹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두 손 모아 숭례문의 수호신께 기도를 올렸다. 어디선가 깊은 탄식이 땅을 울렸다. 신의 흐느낌이었다.

조선시대 도읍지로 정해진 한양은 당대 최고 가치관인 음양오행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도시다. 4대문 중에 하나인 숭례문은 서울과 함께 탄생했다. 탄생부터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풍수지리 상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가 강하니 이를 막으라는 것.

'예(禮)를 숭상한다(崇)'는 의미의 '숭례문(崇禮門)'. 그러나 명칭부터가 관악산의 화기를 고려했다. 예(禮)는 오행상 불(火)을 상징하는 글자요, 숭(崇)자는 그 생김새가 불꽃처럼 생겼으니 이름에 '불'이 두 개나 있는 셈이다. 게다가 현판까지 가로가 아닌 세로로 씀으로써 수직성을 강조,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논리로 사대문 안을 지켜왔다. 숭례문에서는 조선의 주요 행사가 개최됐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조정 주도로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기우제, 너무 자주 내리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가 숭례문에서 열렸다.

화기(火氣)는 숭례문만 지켰던 것이 아니다. 광화문 밖에 해태상도 있었고, 숭례문 남쪽에 연못인 남지(南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사는 경복궁은 늘 화재에 시달렸다. 매번 전쟁이 날 때마다 궁은 전소됐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인 '행랑'은 그때마다 불길 역할을 해주어 불은 행랑은 따라 이 건물 저 건물로 옮겨 붙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사는 경복궁은 늘 화재와 전란에 시달려 정궁의 역할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숭례문은 달랐다. 마치 불사조처럼 그 어떤 전쟁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경복궁이 전소한 임진왜란 때도, 청군이 점령한 병자호란 때도, 광화문까지 무너뜨린 일제강점기 때도, 하다못해 포탄 세례를 받은 한국전쟁 때도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힘든 전쟁에 생사를 넘나들었던 한양 백성을, 서울시민을 따뜻하게 반겨줬다. 우리는 그렇게 숭례문을 보면서 서울로 돌아왔고, 서울에서 살아왔다. 숭례문은 600여 년 간 서울을 지켜왔다.

작은 돌멩이, 풀 한 포기에도 염(念)이 깃든다. 600년 간 서울을 지킨 숭례문은 '국보1호'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대한민국의 상징이요, 서울의 수호신이다. 그런 숭례문이 2008년 무자년 설 연휴 마지막 날에 전소됐다는 사실은 왠지 불길하다. 외신들도 ‘대한민국의 상징 국보 1호’, ‘서울의 아이콘’이 사라졌다고 앞 다투어 대서특필했다. 마치 세계 자본주의 심장을 상징했던 미국의 세계무역센터(WTC)가 9.11테러로 붕괴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기사제목이 아닐 수 없다.

관악의 화기(火氣)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없다. 화기(火氣)라 함은 작게는 화재요, 크게는 전쟁이다. 도시가스 시설 폭발 테러 같은 화마(火魔), 하나 뿐이 없는 한강 상수원의 독극물 테러 같은 수마(水磨)에 서울은 무방비 도시가 된 것이다. 숭례문의 수호신은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다시 한 번 맞지 않길 바라며 숭례문 앞에서 절실히 기도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리산 화엄사를 지켜낸 선친 차일혁 총경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사건에는 전조가 있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 재해가 오기 전엔 쥐나 개미, 새 같은 미물들조차도 낌새를 알아채고 대비를 한다.

숭례문 화재로 서울의 화기(火氣)는 더욱 거세질 것이며, 이를 막기 위해 만반의 강구책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풍수를 거스르는 개발은 이보다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며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비록 숭례문은 전소됐지만 수호신은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숭례문을 지키지 못했지만 숭례문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참혹한 현장 속에서도 결코 서울 시민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서울의 안전만을 걱정했다. 하늘이 미리 보여준 것은 철저하게 대비할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쓸쓸하게 남은 석축기둥을 바라보며 제2의 숭례문 화재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영계에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