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세상을 흐리게 하는 공해의 주범은 누구일까.
지금처럼 전원주택이 활성화되지 않은 20여 년 전에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교외로 나간 지인이 있었다. 도시의 온갖 먼지와 소음을 피해서 왔기에 그는 새 보금자리 조건으로 환경을 가장 고려했고, 강이 보이는 한적한 전원에 멋진 집을 지었다. 당시 전원생활에 매료된 그가 항상 자랑했던 것이 있었다.
"법사님, 반딧불이 아주 예뻐요.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장관입니다. 꼭 놀러 오세요."
어둠이 내리면 환상적인 빛을 선사하는 반딧불이었다. 소년 같은 얼굴로 반딧불이가 너무 좋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그 덕분에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반딧불이 덕분에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만난 그에게 요즘도 반딧불이가 좋은가 물어보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청정 자연의 상징인 반딧불이의 모습을 이제는 그의 집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과거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소재로 자주 쓰일 정도로 주변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던 반딧불이가 이제 전원에서도 사라져간다는 말에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는 쓸쓸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반딧불이가 사라지게 된 공해의 주범은 바로 저였어요."
한때 그는 이런 공해의 원인이 집 주변의 급변하는 환경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사 온 후로 너도나도 집을 지었고 대형 음식점들마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나중에 이사 온 사람들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몹시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반딧불이 처지에서 바라보자 결국 자기 자신이 공해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생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끌어 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 하여 자기가 지은 업보를 자신이 받는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성현들의 말씀을 음미해보면 공해의 원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변을 원망하기 보다는 나 스스로부터 돌아봐야 한다.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나로 말미암은 부분이 있는 것이며, 언젠가부터 밤하늘에 보이지 않는 별도 내가 가린 부분이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입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독도 생각보다 타인에게 상당한 공해가 될 수 있다.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는 다들 관심이 크지만 사실은 사소한 것이 쌓여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공해의 일원이라 자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를 생각하면 다소 착잡한 기분이 든다.
어찌 보면 나 또한 공해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환경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지은 업이 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도 항상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난 시간 사람들을 위하는 취지로 했던 예언들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는 가슴 아픈 공해는 아니었을까. 사라진 반딧불처럼 이제는 세월 속에 멀어진 아름다운 시간과 사람들을 돌이켜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