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누族은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이었다
日本人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라 우기는 아이누族이
氷河地帶를 건너 中國에서 列島로 건너간 사람들이라 우긴다. 이 얼마나 독창적이지 못한 주장이란 말인가! 오늘날 日本한테 氷河期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아메리카 先住民은 홍적세(洪積世 : Pleistocene Epoch) 마지막 氷期인 1 만 5 천년 전(이보다 더 오래 전이라는 주장도
있다)에 아시아에서 베링海峽(Bering strait)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지척지간의 韓半島를 놔두고 최단거리도
720km나 떨어진 중국 어딘가에서 건너 왔다는 것이다. 가끔은 수천 km나 떨어진 印度 어딘가에서 건너 왔다고 우기기도 한다.
日本國立遺傳子協會가 공식 채택한 호라이의 단독연구에서 중국인의 遺傳子 25.8%는 8 세기에 이주한 中國倭의 유전자다. 인도인과의 유전자 비교
연구는 한 적도 없다. 척 보기에도 人種上, 生物學上 틀려도 너무 틀리기 때문이다.◀ 繩文時代의 土偶
제어드 다이아먼드(Jared Diamond)는 죠몬토기(繩文土器)가 지금부터 12,700 년경 전에 만들어졌고,
죠몬문화(繩文文化)는 농경문화가 아닌 수렵-채집민의 것이면서도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아서 정착생활을 영위한 특이한 사례라고 주장한다.
繩文土器가 12,700 년에 만들어졌으면, 繩文人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新石器 文化를 영위한 종족이라는 거다. 문제는 그런 우수종족이 발전도
없이 내내 조잡한 繩文土器 하나로 10500 년을 버틴, 가장 늦게까지 新石器 生活을 영위한 最後進 종족이라는 거다. 日本은 기원전 3 세기
까지 石器 時代였다.
더구나 수렵-채집민들이 한 곳에 정착하면, 금방 굶어 죽는다. 제아무리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다 해도
짐승도 옮겨 다니고, 과일도 철에 맞춰 영글고, 물고기도 해류를 따라 이동한다. 狩獵-採集民은 짐승을 따라, 과일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倭列島(後代의 日本列島)는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조차 극히 낮은 땅이다. 이는 繩文 末期
倭列島의 인구가 겨우 10 만 내외 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세리자와 죠수케(芹澤長介), 야마우치 세이오(山內), 고야마슈조(小山周三)].
韓半島人들이 벼농사법을 가져가 기아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인구가 팽창한 지난 천년간 기아가 또 다시 倭奴民族을 찾아왔다. 바로 西洋人들 자신이
분석하길, 飢餓 때문에 日本이 2 차 대전도 일으켰다고 했지 않는가.
아이누族이 新石器 민족 繩文人이며 繩文土器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日本도 인정한다. 그래서 繩文時代라는 시대명도 생긴 것이다. 그런데 西아시아에서 처음 土器가 만들어진 연대가 5 천 년 전에서 7 천 년
전 사이다. 한국(桓國)도 기원전 7197 년에 開天한 나라다. 그 전에 靑銅器 時代로 진입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東아시아가 아니라, 시베리아에
있었던 나라다. 따라서 아이누族이 10 만 년 전, 혹은 1 만 2 천 년 전에 列島로 이주 했다면 舊石器人 이어야지, 新石器 文明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수천 년 전에 뜻한 바가 있어 列島에서 나가 土器 제작법을 배워 가지고 돌아 왔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자체적으로 原始土器를 만들어 썼다는 것인가. 前者가 성립할 수 없는 건 日本이 기를 쓰고 氷期를 외쳐대며 걸어서 列島로 건너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氷期는 1 만 2 천 년 전후로 끝났다. 지역마다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어 1 만 년쯤이라는 주장도 있다. 後者
역시 성립될 수 없는데, 古代 韓半島人이 이주할 때까지도 新石器 文化라는 낮은 文明 단계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자체 제작 가능성도 사라지고 만다.
列島는 기원전 3 세기 까지 新石器時代였다. 韓民族은 유물 조사에 의해서도 기원전 2700 년경에 靑銅器 文化로 진입했다. 鐵器 時代는 기원전
15 세기 이전에 진입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원전 2700 년경에는 이미 鐵器時代로 진입했다. 더욱이 새끼줄 무늬의 繩文土器는
지극히 원시적인 土器로 新石器 初期 단계에 해당한다. 아이누族은 문화가 낮아도 아주 낮은 것이다.
아이누族의 문화가 극히 낮았다는
점에서 아이누族의 列島 이주 시기는 西아시아에 土器가 등장한 연대인 7 천 년전 이전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주 시기는 더 낮춰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죠몬인(繩文人)의 新石器時代가 1 만 2000 년 전에 시작됐다고 우기는 倭奴가 가끔 있다. 이 말은 곧 기원전 3
세기 까지 初期 新石器文化를 영위한 劣等民族이 新石器 文化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優秀民族이라는 모순에 빠진다.
사실 日本은 모순이고
자시고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주장이나 마구 한다. 모순점을 해결할 머리조차 없는 것이다. 일례로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일본의 베스트셀러인 ‘국민의 역사(國民の 歷史)’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야요이문화[彌生文化 :
기원전 약 3 세기~기원후 3 세기)는 渡來人(韓國人)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선주민인 죠몬인(繩文人)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고,
야요이(彌生) 문화의 주체는 繩文人 이었으며 북 규슈(北九州)와 南朝鮮(韓國)과는 같은 시기 동일문화권에 가까웠으나 사람의 왕래나 교역이 있었던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3 세기 까지 新石器 文化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열등민족이 어느 날 갑자기 靑銅器文化는
건너뛰고 스스로 鐵器文化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일본국립유전자협회도 倭奴民族이 韓國人의 遺傳子를 24.2% 가지고 있다고 하고, 다른
나라와 공동연구하면, 韓國人의 遺傳子가 65% 라는데,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전부 아이누族이라 우기니, 손발이 안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이다.
죠몬(繩文)‘人’이자 아이누‘族’도 모자라, 한 종족을 두고 繩文'人'이니, 彌生'人'이니 달리 불렀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렀다고 하니, 이후에도 야마토[大和 : 통일국가 大和國이 있었다고 날조해서 만들어낸 시대명. 원래는 倭國이 있었다고 하다가
요즘은 그 의미가 지극히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야마토국(大和國)으로 바꿨다. 그래도 역사책을 보면, 다 왜(倭)로 써 있다. 눈이 많이
괴롭겠지?]'人', 아스카(飛鳥)'人', 나라(奈良)'人', 헤이안(平安)'人', 가마쿠라 무로마치(鎌倉室町)'人', 아즈치
모모야마(安士桃山)'人', 에도(江戶)'人', 메이지(明治)'人', 다이쇼(大正)'人', 헤이세이(平成)'人'이라 불러야 하지 않는가. 자그마치
12 개다! 한 인종을 두고 12 개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日本이 舊石器人도 繩文'人'이라고 우긴다면, 13 개가
된다.
‘日本이 4 대 문명의 하나’라고 주장, 70 만부 이상이 팔렸다(필시 지금은 훨씬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는 ‘국민의
역사‘라는 책(?)의 서두는 날조한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으로 시작된다. 倭奴들의 조상인 舊石器人은 가미타카모리人으로 불렀으리라. 日本에는
舊石器 時代에도 ‘民族’이 있었단 말인가. 日本에는 新石器 時代에도 ‘民族’이 있었단 말인가. 가미타카모리人(上高森人?)이 日本人의 조상이란
말인가. 舊石器人은 멸종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날조한 유적들을 거론 하면서 “日本
歷史는 자바 원인(Pithecanthropus erectus )이나 베이징 원인(北京猿人)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日本이 30 만 년 전, 前期 舊石器 時代 것이라 주장해온 人骨[도치기(鍈木)縣 구즈(葛生)]은 15 세기 것이었다.
日本의
자부심이란 게 겨우 타종족인 舊石器人에 기대어 세계 4 대 문명이 되고, 세계 1 대 문명이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오천년(문헌상으로는 9 천
2 백 년)의 역사라고 하지, 韓大陸에서 발견된 舊石器 遺跡을 가지고 수십만 년 된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倭奴 땅에서는 이런 게
먹혀 들어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倭奴 땅에 이주했고 倭奴民族으로 죽죽 進化해 왔다고 우겨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倭奴民族에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곧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다. 귀찮게 이주는 뭣하러 하나? 조만간 38 억 년 전,
化學進化 時代에 倭奴民族이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列島에서 單細胞 生物이 태어나고 이윽고 진화해서 倭奴民族이 된 거라고 우기겠지?
아이누族은 日本列島의 舊石器 人種이 아니다. 舊石器人은 좀 있다 검토하고 아이누族이 어떻게 列島로 이동 했는지부터 검토해보자.
이에 대한 단서를 倭奴學者들이 제공한다. 이들은 아이누族이 ‘氷河’를 건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이누族은 배를 만들어 韓大陸과 日本列島 사이를
이동할 그런 기술이 없었다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미 古考學的 유물 발견으로 韓民族이 4700 년 전부터 靑銅器 文化를 꽃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4700 년에는 이미 鐵器時代로 돌입했다. 神市氏가 시베리아에서 南下한 5898 년에 우리 역사에는
東아시아를 무대로 하는 大帝國이 성립했다. 배달 이전에는 시베리아에서 인류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 기원전 7197 년에 한국(桓國)을 세웠다는
것은 최소한 이 당시부터 靑銅器時代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靑銅器 文化를 가진 韓民族이 남하하자, 新石器文化를 가진
아이누族이 列島로 이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누族의 列島 이주시기는 기원전 3898 년 이후다. 한동안 우리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면, 5
천년 전후로 列島로 이주했다.
港海術이나 造船術이 없었던 아이누族이 列島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는 것뿐이었다.
타타르 해협(Tatar strait)의 가장 좁은 부분은 폭이 7km에 불과하다. 11∼5 월에는 얕은 곳이 얼어 붙으니까, 걸어서 海峽을
통과했다.
우리민족은 타종족을 억압하지 않았다. 아이누族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한다고 농경생활을 강요 하지도 않았다. 華夏族도
4300 년 전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中國古代神話). 쌀을 본 적이 없어서 밥을 먹던 慈烏支 한웅의 정복군을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했다.
자유롭게 떠도는 新石器人이라 구한(九桓)의 최소한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기원전 3 세기 부터
韓半島人들이 개별적으로 오늘날의 규슈(九州) 일대로 이주했다. 狩獵, 採集 생활을 고수하던 아이누族이 혼슈(本州)나 북해도(北海道)로 물러나지
않고, 어째서 기원전 3세기 부터는 벼농사법을 가져간 古代 韓半島人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同化되기로 했을까. 어째서 태도를 바꿔 定着生活을 하는
被支配系層의 지위를 받아들였을까.
그건 아이누族(繩文人)의 인구가 식량부족 등으로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식량 위기는 기후변화
때문 이라고 하거나 繩文人이 급격히 늘어나 식량부족 상태에 처했기 때문 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더 이상 수렵, 채집생활을 고수 하다가는 종족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倭奴民族은 문명의 정도가 극히 낮아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던 자신들의 조상 新石器人들이
자체적으로 靑銅器 時代는 건너뛰고 鐵器文明을 꽃피웠다고 우긴다. 식량위기 부터 타파하지 않으면 멸종을 감수해야 했던 繩文人이 어떻게 철기문명
시대로 자체 진입 할 수 있는가. 他種族의 피지배 계층이 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세리자와 죠수케(芹澤長介)는
繩文 末期의 인구를 약 12 만 명, 야마우치 세이오는 약 15만 명으로 추계한다.
日本 國立 民俗學博物館의 고야마슈조(小山周三)는
1984년 日本人類學會에 보고한 “繩文時代의 人口”라는 논문에서 아이누族의 인구 변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죠몬말기(기원전 약 3 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 만 5 천 8 백 명에
불과했고, 그후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자 59 만 4 천 9 백 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 하지키(土師器 :
金海 土器. 즉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土器다. 伽倻는 韓半島에 없었다. 百濟土器다)를 사용한 나라시대(奈良 710~784)에는
무려 5 백 39 만 9 천 8 백 명으로 증가했다.
상선약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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