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무능해 식민지됐다” 잘못된 통념 뿌리부터 깨
![]() ![]() 2006/12/11 23:42 |
[한겨레] 1592년부터 7년간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조선을 유린한 임진왜란은 한반도 역사를 기름지게 만들었을까, 피폐의 나락으로 몰고갔을까?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되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된 것은 인도와 베트남이 형편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국과 베트남이 식민통치를 했기 때문에 그 나라들이 형편없어진 걸까? 미국의 한반도 분할과 남한 점령통치는 한반도와 한민족 전체 역사에 행일까 불행일까? 어떤 사건이든 양면이 있기 마련이어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일부 새 문물이 들어오고 기존사회에 새로운 자극을 준 측면이 어찌 없을까마는, 셀 수 없는 인명을 살상하고 붙잡아가고 재화를 약탈하고 불지르고 파괴함으로써 물질적·정신적으로 조선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어 근대로 가는 도정마저 뒤틀어버린 대신 일본에게는 발전의 도약대가 됐던 저 임진년의 처참한 야만행위를 두고 ‘그 덕에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됐다’고 말하는 한국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국인도 일제침략사 진실 몰라 일제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독점지배를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은 뒤 그해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강제하고 12월에 통감부까지 설치함으로써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했을 때 그 일을 주도한 세력이 임진왜란의 주역 도요토미 영전에 “당신이 못 이룬 뜻, 마침내 우리가 해냈습니다”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게르만족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몽골족과 여진족이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휩쓴 뒤 원, 청나라를 세운 것은 게르만이나 몽골, 여진이 로마나 중국·조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도요토미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조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 때문에 조선을 유린한 것인가? 이 땅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특히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조선 침탈은 당대뿐만 아니라 고대 이래로 자생력없는 조선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됐으며, 일제의 식민통치는 한반도 역사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따위의 식민지근대화론에 경도된 사람들이 적지않다.
심지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더 객관적이며, 편협한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한 차원 높은 자세라고 과시하는 듯한 풍조마저 요즘 유행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태학사 펴냄)를 읽으면 그게 얼마나 식민사관에 찌든, 터무니없는 착시인지 알게 된다. 저자는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근거들을 착실하게 들이댄다. 일본은 조선 근대화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이 책은 일본 도쿄대 철학센터 초청(초청자는 일제의 전범행위를 반성적으로 고찰해온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으로 2004년 6월24일부터 7월15일까지 도쿄대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대학원생 및 교수들을 대상으로 행한 총 6회의 강의와 일반에 공개한 특별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에 의해 이뤄진 최초의 한국사 학점강의였다.
도쿄대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메이지 시대를 비판하는 강의는 이번에 처음 들어봤다. 메이지 시대에 근대국가 만들기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으로 알고 존경했던 인물들이 한국에 대해 한 짓들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역사상이 흔들린다. 국제법 아래 진행된 한일관계사에서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놓고 근대화를 했다고 할 수 있느냐.” 일본은 패전 뒤 ‘쇼와시대’의 식민통치와 전범행위에 대해서는 마지못해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했지만 정한론으로 대표되는 메이지 시대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 지금까지도 그때를 영광의 시대로 예찬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바로 그 허상을 깨뜨리지 않는 한 정상적인 한-일관계, 동북아 공동체 추진이 불가능하다. 일본인은 그렇다치고 한국인은 과연 그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메이지시대 만행 아직도 모른척 거리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은 서울이 도쿄보다 3년이나 빨랐다. 전기를 들여오고, 근대교육체제를 도입하고, 전국 철도망 건설계획을 짜고, 지금의 한국은행 옛 본관건물을 설계하고 근대 금융제도를 도입하고, 오늘날의 서울도심 기본틀을 만든 도시개조계획을 밀어붙인 것이 일제였다는 막연한 ‘상식’은 착각이다. 고종황제는 무능했고 명성황후는 일족의 이권과 권력에 눈먼 여인네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관파천은 무책임 무능의 소치라는 이미지는 사실에 반하는 간교한 날조다. 일제는 자신들의 조선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를 뒤집었다.
고종은 무능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대에 괄목할만한 근대화가 시작됐다.
16-17세기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유성우 등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과 그로 인한 사회난맥상을 설명하기 위해 ‘외계충격’이라는 최신 학설까지 활용한 이 교수는 말한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근대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력 근대화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일본의 노골적인 방해, 곧 침략을 받게 된다는 ‘근대화기회 박탈론’으로 이 시대를 보고 있다.” 운양호 사건도 날조됐으며, 경복궁 난입사건이나 동학혁명 진압, 청일전쟁, 러일전쟁 관련 진상도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많이 다르다. 고종시대 괄목할 근대화 시작돼 1965년 한일협정 문서에 들어있는, 과거 한-일간 조약들에 대한 “이미 무효”라는 문구를 두고 일본은 지금까지도 “한일합방 등 과거 조약들은 당시의 국제법상으론 문제될 게 없는 합법적인 것이었으며, 지금부터 무효라는 뜻”이라거나 “식민통치가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나중에 만들어진 평가일뿐”이라 강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당시 군대까지 동원한 강압분위기 등 정황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지적해왔으나 이 교수는 제1, 2차 한일협약 등 ‘합방’으로 가는 정식, 약식 조약 또는 각서 따위가 황제 서명을 위조하고, 조약명칭도 비준서도 위임장도 갖추지 않은 명백한 탈법이며, 국제법상으로 따져도 조약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국권강탈 행위임을 증거를 들이대며 낱낱이 까발린다. 이부분은 최근에야 안팎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그의 독보적인 업적이다.
쉽고도 깊이있는 그의 강의는 도쿄대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예상컨대, 대다수 한국인들의 한국사 인식수준도 도쿄대생들의 그것을 넘지 못할 것이다. 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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