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호환 마마'의 그림자

kongbak 2006. 11. 13. 17:18
[(8) '호환 마마'의 그림자]
남한산성에 병자호란 상흔 숯무덤 즐비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음란물' 할 때 '호환'은 보통 호랑이에 물려간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른 유래도 있다.

 '호환'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오랑캐 '호(胡)'자다. '마마'는 천연두를 말한다. 고려 몽골 강점기에 원나라 궁궐에서 상전을 일컫는 '마마'란 궁중용어(가령 공주마마, 상감마마)를 빗대어, 천연두가 치사율과 전염율이 전염병 중에 으뜸이라고 '마마님 오셨다'고 비꼬는 말이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몽골과 청나라는 같은 혈통이다. 둘 다 '오랑캐'라 불리고, 날랜 기마병을 내세워 아녀자들을 욕보이고 납치한 만행도 같다. 즉, '호환 마마'란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는 북쪽 오랑캐들에 의한 폐해란 뜻이다.

 북쪽 '오랑캐'들에 당한 정사의 기록은 그 치밀하다는 조선왕조실록에도 희미하다. 그러나 터에 뿌려진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 후손들의 무의식에 응어리져 그날의 굴욕을 잊지 말라는 듯 우리 일상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 중기,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인조 임금과 공신들이 광해군을 귀양 보내고 처음 한일은 광해군이 창설했던 5천명의 조총부대와 10만 군대 해산이었다. 신무기 조총은 군현대화의 핵심이었으며 청나라의 주축인 기마병 제압에 최선이었다.

 조정을 장악한 척화파들은 중국(명나라)을 섬기는 사상적 군신국가로서 공연히 주변국들의 긴장감을 초래한다며 군비에 쓸 재정을 민생에 쓰자는 대동평화 논리를 폈다. 국가간 평화는 고상한 논리가 아니라 물리적 힘의 균형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의견은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36년 겨울 기마병으로 무장한 청나라 군사 20만명이 순식간에 한양을 짓밟고 조선의 1만 3천군사와 인조임금이 피신 온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병자호란). 겨울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한 청군은 무자비했다. 조선은 두 달도 채 안 되어서 100만 명이 죽고, 60만 명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당시 조선 팔도 인구가 1천만 명이 안됐다고 하니 7년 임진왜란의 피해를 몇 배 능가한 수치다.

 청군이 닥치는 대로 조선의 아녀자들을 잡아가 욕을 보이자, 민가에서는 여자들 얼굴에 숯검정을 칠해 너도 나도 병자나 추녀로 보이려 위장하고, 갓을 깊게 눌러써 남장을 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할 때 '도탄(塗炭:숯검정을 뒤집어쓴다는 뜻)'과 '가스나, 가시나, 갓시나'란 말은 이때부터 유래하게 되었다.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45일 만에 청군에 항복하고 인조임금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예식을 한다(삼전도의 굴욕). 한민족 역사상 이렇게 어이없고 굴욕적인 패배는 없었다.

 환향녀(還鄕女)는 몽골,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말한다. 전쟁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절개를 잃었다하여 '화냥년'이라 손가락질 당하며 큰 사회문제가 되자, 임금은 한양 서쪽 개천에서 몸을 씻고 입성하면 정절 문제가 구제된다고 특명을 내렸다. 널리 구제하는 개천이란 뜻에서 지금의 '홍제천'이 유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인들이 자결을 하고 살아남은 이들도 비탄의 세월을 숨어 살아야했다.

 남한산성 곳곳에는 죽은 사람 관 크기의 직사각형 구덩이가 산재해 있다. 숯을 가마니에 넣어 파묻은 '숯무덤(매탄처:埋炭處)' 터다. 호란의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나서야 산성 94곳에 숯을 묻어두게 된 것이다. 남한산성의 숯무덤이야말로 수십만 명의 이름 없는 백성들의 무덤을 상징한다.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면 비극은 순환된다. 조선 남한산성의 총지휘본부인 '수어장대' 누각에는 지난날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망루(無妄樓)' 편액이 걸려있다. 차길진법사(후암미래연구소 대표)가 '무망루'를 찾아 탄천(炭川)을 바라보며, 최근 심각한 대북정세에 대해, "근일에 북쪽으로부터 먹구름이 드리울 것 같다"고 에둘러 한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