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kongbak 2006. 9. 12. 12:33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에 처음 보이기 시작한다.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 내용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했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거북선은 고려말, 또는 조선 초기에 이미 제조·사용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는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창제된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실용화되었다. 철갑선으로서 세계적 선구인 이순신의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투옥과 더불어, 또는 그의 전몰 이후에는 거북선의 실용이 저하되고 만다. 임진왜란 후 거북선은 시대에 따라 당초의 제도를 상실하고 변모하면서 조선 말기까지 각 수영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거북선이다.

이순신의 거북선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해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鎭)에 대해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특히 조선기술(造船技術)에 뛰어난 막하의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임진년 6월 14일에 써올린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습니다[別制龜船]. 앞에 용두를 설치하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해서, 비록 적선 수백 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天字砲)·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라는 구절로 거북선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및 제도에 대한 기술적 자료는 보전·전승되지 않았으나, 정랑 이분(李芬)의〈행록 行錄〉 속에는 그 모습을 후세에 전해주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벼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위에 인용한 이순신의 장계 내용 및 이분의〈행록〉, 그리고 일본측의 당시 기록인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 경상좌수사 이언섭(李彦燮)의 장계내용(1748, 영조 24) 등의 현존 사료(史料)로부터 이 거북선의 구성과 주요기능에 관계되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크기 : 판옥선(板屋船)의 크기와 같다. ②용두 : 뱃머리에 용두(龍頭)를 설치하여 용의 아가리를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철첨 : 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鐵尖:쇠송곳)을 꽂아 적병이 배 위로 오르는 것을 막았다. ④포의 수 : 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었다. ⑤포의 종류 :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비했으며,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큰화살)을 많이 발사하였다. ⑥철갑 : 철로 덮어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 특히 화공(火攻)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일본측의 실전기록인 〈고려선전기〉는 안골포해전 대목에서 "큰 배 중의 3척은 맹선(盲船:장님배. 거북선에 대한 일본측의 별명)이며, 철로 덮여 있고……"라고 쓰고 있다. 경상좌수사 이언섭의 장계는 "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鱗甲)을 하였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갑이란 철엽(鐵葉)을 비늘 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것이다. ⑦척수(隻數) : 〈고려선전기〉에 따르면 1592년의 거북선 수는 3척이었다. 그러나 1595년에는 명(明)에 "수군통제사 이순신은……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 65척을 거느리고……"(事大文軌 권12)라고 통보하고 있으므로 1595년의 거북선수는 모두 5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⑧정원 : 거북선의 승무원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명 정도였다. ⑨돛대 : 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할 수 있어서 접전시에는 돛대의 장비를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하였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귀배판 철장갑에 대한 복원개념도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귀선
〈이충무공전서〉의 전라좌수영귀선
해군사관학교 복원 거북선의 중앙단면도
광해군 때부터 숙종기에 이르러 소홀했던 국방력의 증강과 수군의 재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거북선에 대하여도 이순신이 창제했던 옛 제도로의 복구책이 거듭 논의되었으나, 난 후의 전선(戰船)의 변모와 더불어 거북선의 크기도 확대 추세를 보였다.

1795년(정조 19) 어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선의 제도를 기술한 내용이 있다. 비록 후대의 거북선이기는 하나, 거북선의 제원(諸元)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史料)로 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권수(卷首) 도설(圖說)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판화귀선도(版畵龜船圖), 그리고 700자 정도의 '안설'(按說)이 실려 있다. 안설에서 거북선 구조에 대한 기술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제도:저판(底版)은 10쪽을 이어붙였는데, 길이는 64척 8촌이고, 머리쪽 너비는 12척, 허리 너비는 14척 5촌, 꼬리쪽 너비는 10척 6촌이다. 좌우 현판(舷版)은 각각 7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7척 5촌이고, 맨아래 첫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츰 길어져서 맨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113척이 되고, 두께는 다같이 4촌씩이다. 노판(版)은 4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2번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 구멍 1개씩을 뚫었다. 축판(版)은 7쪽을 이어서 붙였는데, 높이는 7척 5촌, 위쪽 너비는 14척5촌, 아래쪽 너비는 10척 6촌이다. 6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 2촌의 구멍을 뚫어 키[舵]를 꽂게 하였다. 좌우 현(舷)에는 난간[舷欄:속명은 信防]을 설치하고 난간 머리에 횡량(橫梁:속명은 駕龍)을 건너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난간[牌欄]을 만들었는데, 현란에서 패란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며, 좌우 패란 위에 각각 열한 쪽의 판자(덮개:속명은 蓋版 또는 龜背版)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뱃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길이는 4척 3촌, 너비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고, 좌우 패에는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혈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냈으며, 문 옆에는 각각 포혈 1개씩이 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鋪版) 아래 방이 각각 12칸인데, 2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3칸에는 화포·활·화살·창·칼 등을 넣어두고,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사용하였다. 왼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선장이, 오른쪽 포판 위의 방 1칸은 장교들이 거처하는데, 군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혈에 대포를 대놓고 쉴새없이 쟁여 쏜다. ……지금의 통제영귀선이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씩 치수의 가감이 없지 않다……"(이상 '통제영귀선'에 대한 설명문).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길이·너비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의 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

안설에 의한 복원연구에 따르면,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는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980년에 진수된 해군사관학교의 '복원거북선'은 〈이충무공전서〉의 도설에서 주로 전라좌수영귀선을 본떠서 제작한 것이다.

朴惠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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