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역사학자가 본 중국 東北工程의 진짜 속셈은? 붕괴 후, 북한통치 주도권을 노린 사전 정지작업 이덕일 역사학자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 편입하려고 함으로써 한·중 양국 간에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중국이 소위 東北工程을 추진하는 속뜻은 무엇일까. 과연 기존 해석처럼 대한민국을 견제하거나 남북 통일 후 만주 중국교포사회의 동요를 막기 위함일까. 東北工程을 통해 중국이 한반도 북부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을 진정으로 알리고 싶은 대상은 누구일까. 중국의 숨은 의도를 분석했다.
중국의 역사왜곡 민족연대 추진운동본부 회원들과 민족사관학교 학생들이 지난 1월5일 서울 효자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고구려 장군 복장을 하고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東北工程’을 한국 보다 미국에 더 알리고 싶어한다”
필자는 지난해 베이징(北京)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중국교포(조선족)를 만났는데, 그는 ‘광밍르바오’(光明日報)가 2003년 6월26일자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변방민족 정권’이라는 내용의 글을 대대적으로 실었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광밍르바오라는 신문의 성격 때문이다.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일반 공산당원을 상대하는 중국공산당 기관지라면 광밍르바오는 지식인 공산당원을 상대하는 공산당 기관지라는 차이가 있는데, 광밍르바오의 논설은 때로 중국공산당이 나아갈 미래에 대한 방향타 구실을 한다.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초기였던 1978년 광밍르바오가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것이 그런 예다.
이 논문은 중국공산당이 개혁 개방으로 갈 것임을 알리는 방향타 구실을 했고, 실제로 중국공산당은 그렇게 갔다. 파룬궁(法輪功)을 가장 먼저 비판한 매체도 광밍르바오인데, 그 직후부터 중국 공안당국은 세계적인 비난을 무릅쓰고 파룬궁 탄압에 나섰다. 이는 광밍르바오에 실린 어떤 글들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치밀한 계획으로 작성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광밍르바오가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변방민족의 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한 것은 우연도 아니고 ‘볜중’(邊衆)이라는 필자 개인의 견해도 아니다. ‘중국 변방에 사는 민중’이라는 뜻의 볜중이 가공인물이라는 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에 싣는 역사 관계 논문을 이름 있는 학자가 아닌 가공인물이 썼다는 사실은 이 논문이 특정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 의중에 따라 작성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와 한반도 남부
꽤 긴 장문의 광밍르바오 논문 중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아래 부분이다.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고구려: 필자 주)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관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십 년 후 고씨 고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의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를 제외한 부분은 여전히 안동도호부가 관할했다.
대부분의 고구려족은 당나라 내지(內地: 중국)로 옮겨져 한족과 융합되었으며 나머지 고구려인은 주위의 각 민족에 융합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 지 700여 년 만에 드디어 중국 역사 발전의 긴 강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씨 고려가 건국한 것은 고씨 고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250년 후인 서기 918년이었다. 왕씨 고려는 서기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 정권을 대치하였고 그 이듬해 후백제를 멸망시켜 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고구려를 이름도 생소한 ‘고씨 고려’라고 새롭게 작명한 이유는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논문은 고구려는 고씨 고려, 고려는 ‘왕씨 고려’라는 생소한 명사를 만들 정도로 둘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고구려는 중국사이고 신라사와 신라를 이은 국가들의 역사만이 현재의 한국사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신라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위의 인용문 중 핵심은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는 구절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사의 강역은 ‘한반도 남부’가 되고 만다.
한반도를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그 남부만이 한국사의 강역이라고 주장한 것은 볜중이 처음이 아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학자 쑨진지(孫進己·1931∼)는 그보다 일찍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현재의 중국측 주장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1993년 8월 옛 고구려 국내성 자리인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학술대회’에서 북한의 박시형과 이 문제를 놓고 다투다 지병인 심장병으로 쓰러졌다는 일화까지 있다.
쑨진지는 1994년 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에서 펴낸 ‘동북민족사연구’(東北民族史硏究)1에서 ‘고구려가 차지하기 전 한반도 북부는 한족(漢族)의 땅이었고, 한인(韓人)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차지하기 전 한반도 북부는 한족의 땅’이라는 쑨진지의 주장과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는 볜중의 주장은 완전히 같다. 두 글은 모두 ‘한반도 북부’를 중국 영토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한반도를 북부와 남부로 나눈다면, 그 기준은 한강이 된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강역이 아니라 현재 남북한의 강역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조선과 고구려를 빙자해 한반도 북부를 중국사의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속셈은 광밍르바오에서 고구려사 문제를 ‘학술화’‘정치화’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더욱 분명해진다. 광밍르바오 논문은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장황한 논리를 전개한 후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계속 깊은 연구를 요구하는 과제다.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는’ 경향과 작태에 대해 반대한다”는 구절처럼 고구려사를 ‘현실화’‘정치화’하는 언명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역시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는 글이다. 중국공산당측의 이런 주장의 허위성은 고조선·고구려사를 비롯한 만주사와 한반도 북부사 전체를 중국사의 범주로 넣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인 이른바 ‘동북공정’의 조직 체계를 보면 잘 드러난다.
2002년 2월28일 정식 발족한 ‘동북공정’의 정식 이름은 ‘동북변강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인데, 우리말로 풀이하면 ‘중국 동북 변경의 역사와 그에 파생되는 오늘의 현상에 대한 연구’라는 뜻이다. 1999년 ‘중국 변강지구 역사와 사회연구 운남공작참’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국변강지구 역사와 사회연구 동북공작참’이 모체다.
2002년 2월부터 중국사회과학원과 헤이룽장(黑龍江)성·랴오닝성·지린성 등 동북3성은 동북공작참의 활동 결과를 바탕으로 중앙의 비준을 얻어 동북공정을 정식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북공정이 과연 중국 정부의 주장이나 우리 정부 일각의 해석처럼 정부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자율조직인지는 ‘동북공정영도협조기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동북공정영도협조기구지도하는 상부 기관인데, 그 고문은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인 리톄잉(李鐵映)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재정부장인 샹화이청(項懷誠)이다.
동북공정영도협조기구 산하 ‘영도소조’ 조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뤄린(王洛林)이며, 부조장은 헤이룽장성 공산당위원회 부서기 양광훙(楊光洪), 지린성 부성장 취엔저주(全哲洙), 랴오닝성 부성장 자오신량(趙新良) 등이 맡고 있다.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이 참여하고 동북3성의 부성장급들이 참여하는 정부 조직인 것이다.
동북공정은 중국 정부의 전국적 프로젝트
동북공정 조직은 중국에서도 특이한 예다. 중국의 변경지역 역사나 지리 연구를 위한 연구기관은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었다.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경의 역사와 지리 연구센터’라는 뜻의 이 연구소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수행한 거의 모든 변경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유독 동북공정만은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이 직접 나섰으며, 중국사회과학원의 원장·부원장과 동북3성의 공산당 조직, 행정조직이 총동원되어 수행하는 전국적 프로젝트인 것이다.
중국공산당 중앙 차원의 이런 지원은 중국측이 오히려 고구려사 연구에서 발견되는 역사 문제를 ‘현실화하는 것’과,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이 문제가 한국과 북한 등 관련 당사자들에 의해 현실화, 정치화하는 것을 우려해 ‘현실화’‘정치화‘를 반대했을 뿐 그 자신들은 이미 깊숙이 ‘현실화’‘정치화’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왜 이 문제의 ‘현실화’‘정치화’를 두려워하는지는 광밍르바오 논문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新五代史)는 가장 먼저 고씨 고려를 왕씨 고려전에 기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송사’(宋史)는 왕건이 고씨의 지위를 계승하였다(王建承高氏之位)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책이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 그리고 ‘송사’에 등장하는 이 기록은 그 후에 나온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광밍르바오의 주장은 고구려와 고려는 전혀 별개의 나라인데, 역대 중국 사서들이 동일한 계통의 국가로 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구오대사·신오대사·송사 등의 중국 역사서들은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서술하는 큰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광밍르바오의 주장이 얼마나 무리인지는 그런 잘못 된 인식(?)을 가진 역사서가 위의 책들에 그치지 않는 데서 명확해진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송사 ‘고려전’은 앞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술을 종합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두 역사서의 작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 간의 관계를 왕건이 고씨 고려 왕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함으로써, 고씨 고려와 왕씨 고려가 계승 관계에 있는 것처럼 기술했다. ‘요사’ ‘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잘못이 발견된다.
그 후에 나온 역사서들은 이렇게 잘못 된 기술을 답습하였다. ‘명사’(明史)는 이전에 나온 잘못 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갔다. 명사는 명 왕조가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다 보니 앞의 몇몇 역사서가 저지른 오류를 답습했을 뿐만 아니라, 이씨 조선 정권의 연혁에 대해서도 아주 잘못 된 계통을 세워주었다.”
구오대사·신오대사·송사 뿐만 아니라 요사·금사도 잘못 기록했으며, 심지어 명사는 ‘이전에 나온 잘못된 역사서보다 한 발 더 나가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명사의 오류에 대해 볜중의 견해는 분명하다.
현실의 권력으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는 중국
즉 명사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東徙復國)-왕씨 고려-이성계가 국호를 바꾸기 전의 고려-이씨 조선’이라는 계통을 세워 줌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하는 기자조선과 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를 모두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중국 역사서의 기술에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다방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전란으로 문헌이 유실된 데다 왕씨 고려에 대한 오도(誤導)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여기에서 ‘동사복국’은 나당연합군에 패망한 고구려의 후예들이 동쪽으로 옮겨가 세웠다는 나라로서 발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광밍르바오는 ‘기자조선-위씨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동사복국’은 모두 중국사인데 중국 사서들이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중국의 고대 변방 민족이 사용하던 ‘고려(고구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 정권(고려)이 도용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 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많은 혼란과 잘못 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중국공산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동북공정의 논리는 광밍르바오에서 잘못 기술했다는 중국의 옛 사서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중국 사서들이 명백한 오류를 범함으로써’라고 흥분하는 대목에서 이미 논리적 파탄을 맞았다. 구오대사·신오대사·송사·요사·금사·명사가 모조리 고구려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이 모든 중국 역사서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중국 역사서들이 잘못되었다는 광밍르바오의 인식이 잘못 된 것일까.
그 답은 자명하다.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과거에 벌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라는 현재 중국공산당의 역사 인식은 현실의 권력으로 과거를 재단하려는 후세인의 월권이자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생각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필자는 이 시점에서 앞에서 인용한 광밍르바오의 ‘고씨 고려가 관할한 다른 일부분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 정권에 귀속되었다’는 부분과 쑨진지의 ‘고구려가 차지하기 전의 한반도 북부는 한족의 땅이었고, 한인의 거주지가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대목을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이 두 기술은 모두 고조선·고구려사를 빙자해 현재의 북한 영토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취지문은 중국이 중앙 차원에서 왜 이런 사업을 전개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특별히 근 10여 년 이래로 동북아의 정치·경제의 지위가 날로 상승함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뜨거운 지역이 되었는데, 아국(我國:중국) 동북의 변경지구는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하여 극히 중요한 전략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형세 아래 일부 국가의 연구기구와 학자들이 역사 관계 등의 연구에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고, 소수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잘못된 주장을 공공연히 펼치면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리하여 동북변경의 역사와 현상 연구가 많은 도전에 직면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아울러 이 방면의 학술연구에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고구려사의 ‘현실화’‘정치화’에는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이 동북공정의 취지문에서는 그 연구 목적이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동북아의 ‘현실화’와 그 ‘정치화’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 10여 년 이래로 동북아의 정치와 경제’ 문제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을 뜻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보다 북한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동북아에서 북한만큼 큰 변화를 겪은 나라는 없다.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북한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국가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핵을 매개로 대립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베이징 6자회담이 난관에 봉착하자 미 유력 전국지 ‘USA 투데이’ 2003년 9월2일자 기고를 통해 ‘우리는 잠재적으로 궤멸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제2의 한국전이 발발할 수 있는 높은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면서 6자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화를 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6자회담을 성사시켰던 중국인데, 중국의 영향력 또한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연합뉴스’2003년 12월30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센터의 알렉산드르 만수로프 박사는 ‘아시아 국가들의 중국에 관한 논의’라는 제목의 특별보고서에서 ‘북한 지도층은 중국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고, 특히 김정일 스스로 중국의 잔소리를 듣는 것을 싫어하고 간섭을 거부하기 때문에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전 주중대사였던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는 지난해 8월의 6자회담을 평가하면서 중국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국 지도부의 핵심 주역들이 미국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후진타오(胡錦) 주석도 북핵 문제를 더 이상 중국에 부담으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주의와 사대주의
중국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경제 고속성장의 중요한 배경인 미국과의 협력이 북핵 문제 때문에 깨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미국이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해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상황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 북부는 중국사라는 내용의 대규모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기존 해석처럼 대한민국을 견제하거나 남북통일 후 만주 중국교포사회의 동요를 막기 위함일까.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 북부사는 중국사라는 주장을 진정으로 알리고 싶은 대상은 한국이나 만주의 교포들이 아니라 미국 아닐까.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 즉 ‘먼 곳과는 교제하고 가까운 곳은 공격하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과 동북공정은 무관한 것일까.
세계적 베스트 셀러 ‘문명의 충돌’을 썼던 미 하버드대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만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져 군사적 충돌이 벌어질 상황이라면 한국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결국 중국 아니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중앙일보, 2003년 7월 10일)
이것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라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공중에 떠버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월간중앙’ 2003년 9월호에 실린 전(前) NHK 워싱턴지국장 히다카 요시키가 ‘김정일 제거 후, 미국의 북한 통치계획’이라는 글에서 ‘한국 배제, 미·러·중이 공동관리’라는 주장은 음미할 만하다.
허드슨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한 미국문제 전문가인 히다카 요시키의 분석은 그 실행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의 지위에 변화가 생긴다면 ‘당연히 남북통일로 귀결될 것’이라는 국내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구상에 대해 중국은 ‘미·러·중 공동관리’가 아니라 ‘중국 단독관리’를 주장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하나로 ‘동북공정’을 진행하는 것은 아닐까.
중국이 미국의 묵인 아래 김정일 정권을 제거하고 북한내 친중 군부세력 등을 파트너로 삼아 사실상 북한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할 가능성은 전무한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이 한국 영토에 야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런 순진한 이상주의가 120년 후 또 다시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사실상 정부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정부가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거나 외교통상부의 실무국장이 “(중국의) 소장 역사학자들이 변방사를 정리하려는 프로젝트를 중국 정부에 제출했고 당국이 이를 승인한 것”이라거나, “동북공정의 학자들이 중국 정부 정책의 통제 하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발언(서울신문, 2004년 1월12일)을 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이상주의를 넘어 사대주의로 진입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출판호수 2004년 02월호 / 출처 : 월강중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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