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수나라의 중국 통일

kongbak 2010. 9. 20. 19:02

오늘부터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일어난 려수전쟁(麗隋戰爭)에 대하여 10회에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6세기 말 서기 598년에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1차 충돌이 일어납니다. 려수전쟁(麗隋戰爭) 전황(戰況)을 공부하기에 앞서 수나라가 어떤 과정으로 중국을 통일하였는지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수(隋) 나라 이전에는 북중국(北中國)에 4세기 말에 건국된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서기 386년에 선비계(鮮卑系)인 탁발부(拓跋部)의 규(珪)가 우주(牛州 : 山西省 右玉)에서 대왕(代王)을 칭하고 그 해 성락(盛樂 : 내몽고 呼和浩特)에 도읍(都邑)을 정하였고, 그뒤 대왕(代王)을 위왕(魏王)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북중국(北中國)에는 후연(後燕)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후연(後燕) 왕 모용수(慕容垂)는 날로 강성해 지는 탁발규(拓跋珪)의 북위(北魏)에 위협을 느끼고 태자 모용보(慕容寶)로 하여금 북위(北魏)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후연군(後燕軍)은 서기 395년에 삼합피(三合陂)에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慕容垂)는 충격을 받아 다음해 서기 396년에 죽게 됩니다.

탁발규(拓跋珪)의 북위(北魏)는 계속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후연(後燕)의 수도 중산(中山:河北省 定縣 방면)을 빼앗습니다. 그러자 후연(後燕)은 수도를 동쪽 용성(龍城:朝陽 방면)으로 옮깁니다. 이 후연(後燕)은 서기 407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대패(大敗)한 후 내분(內紛)이 일어나 고구려(高句麗) 왕족(王族) 고화(高和)의 손자(孫子) 고운(高雲 : 모용수가 양자로 삼음)이 왕이 되었고, 왕의 성씨(姓氏)를 후연(後燕)의 모용씨(慕容氏)가 아닌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를 사용하는 등 사실상 고구려의 위성국(衛星國)으로 변하였습니다.

 

「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4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로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000000000師 四方合戰 斬煞蕩盡所 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廣開土王碑文   [註 이 무렵 고구려는 후연(後燕)을 북으로는 거란 방면에서, 남으로는 전에 백제(百濟)의 요서분국(遼西分國) 방면에서[난하에서 대릉하하류 사이 발해연안지역], 서쪽으로는 유주(幽州) 방면에서[이때는 유주자사진과 태수들이 광개토왕에게 귀복(歸服)한 후임], 동으로는 북진(北鎭) 방면[고구려는 서기 402년에 서쪽으로 북진까지 빼앗았다.]에서 각 포위(包圍)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이때 후연(後燕)을 4방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연(後燕)은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內紛)이 일어나 모용희(慕容熙)가 죽고 고구려(高句麗) 왕족(王族) 고화(高和)의 손자(孫子) 고운(高雲 : 모용수가 양자로 삼음)이 왕이 되었고, 왕의 성씨(姓氏)를 후연(後燕)의 모용씨(慕容氏)가 아닌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를 사용하는 등 사실상 고구려의 위성국(衛星國)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2년 뒤인 서기 409년에 풍발이 북연(北燕)을 세우므로서 북연(北燕)은 고구려(高句麗)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용희(慕容熙)를 제거(除去)하고 고운(高雲)을 왕으로 추대(推戴)한 풍발(馮跋)의 고향(故鄕)이 유주자사(幽州刺使) 진(鎭)과 같은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이고, 유주자사(幽州刺使) 진(鎭)이 서기 408년 12월에 죽자 다음해 409년에 북연(北燕)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점입니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의 후연 공격 때 유주자사 진과 같은 고향인 풍발(馮跋)이 유주자사 진의 영향력으로 모용희(慕容熙)를 죽이고 고운(高雲)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유주자사 진이 죽자 다음해 북연(北燕)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위(北魏)는 북연(北燕)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서기 425년에 고구려와 동맹(同盟)을 맺었고, 서기 436년에 고구려와 북위(北魏)는 북연(北燕)을 협공(挾攻)하여 북연(北燕)을 멸망(滅亡)시킵니다.

이후부터 북위(北魏)와 고구려는 아주 끈끈한 동맹관계(同盟關係)를 유지하게 되며,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방면으로 진출한 백제(百濟)가 송(宋), 그 뒤는 남제(南齊)와 동맹세력(同盟勢力)이 되어 북위(北魏)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동맹국(同盟國)인 북위(北魏)를 도우게 됩니다. 고구려와 북위(北魏)는 이렇게 끈끈한 동맹관계(同盟關係)를 유지하면서 같이 북연(北燕)을 협공(挾攻)하여 멸망(滅亡)시키고 북연(北燕)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그런데 북위(北魏)는 북연(北燕)을 멸망시키기 이전인 서기 432년에 북연(北燕)을 동정(東征)한 후 난하 서쪽에 평주(平州) 소속으로 요서군(遼西郡 領縣3 肥如, 陽樂, 海陽)과 북평군(北平郡 嶺縣2 朝鮮, 新昌)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연(北燕)을 멸망시킨 후는 서기 444년에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고, 서기 447년에 북연(北燕) 때 대릉하 방면에 있던 군들을 부활한 후 창려군(昌黎郡)을 기양군(冀陽郡)을 합병하여 영주(營州)에 속하게 하고, 또 건덕군(建德郡)을 영주(營州)에 속하게 합니다.

이 무렵 북위(北魏)가 전의 북연(北燕) 지역에 군(郡)을 설치한 것은 이곳의 유목민(遊牧民) 무리들을 쓰다듬기 위하여 군(郡)을 설치한 것으로, 군(郡)을 둔 곳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국한(局限) 되었습니다. 북위(北魏)로서는 만약 이곳에 사는 유목민(遊牧民) 무리들이 단결하여 북위(北魏)에 반기(叛旗)를 들 경우 그 대응(對應)이 아주 어려워 지므로 사전(事前)에 이들을 무마하고 북위(北魏)의 세력권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하여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군(郡)과 군진(軍陣)을 설치하여 이곳의 유목민 무리들을 쓰다듬은 것입니다. 즉 이때 북위(北魏)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군현(郡縣)이나 군진(軍陣)을 둔 것은 고구려를 방위(防衛)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릉하(大凌河) 방면의 유목민(遊牧民) 무리들을 쓰다듬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고구려는 유목민(遊牧民)이 거주하지 않는 난하에서부터 대릉하(大凌河) 하류 사이 발해연안(渤海沿岸) 지역에 진출하였고, 북위(北魏)는 북쪽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군현을 설치하고 나란히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후 북위(北魏)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설치한 군들은 건덕군(建德郡), 요동군(遼東郡),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丘郡), 창려군(昌黎郡), 기양군(冀陽郡) 등입니다. 그런데 이 6군은 다 합쳐도 호(戶) 1,021호, 인구 4,664구밖에 되지 않습니다(營州治和龍城 太延二年為鎮 真君五年改置 永安末陷 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戶一千二十一 口四千六百六十四). 좀 알기쉽게 말하면 경기도, 서울특별시, 충청도보다 더 넓은 땅에 고작 인구 4,664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1개 면 정도 되는 인구입니다. 그래서 그 넓은 땅에 대릉하(大凌河) 옆 평지에 몇 개의 군(郡)만 설치하다보니 나머지 지역은 전부 공백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설명을 하는가 하면, 고대사를 상당히 많이 연구했다는 분들도 북위(北魏)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군현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는 대릉하(大凌河) 서쪽에 진출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 북위(北魏)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군(郡)을 설치한 것은 고구려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고, 북쪽 유목민을 쓰다듬기 위한 것입니다. 설사 북위(北魏)가 대릉하(大凌河) 방면에 설치한 군현(郡縣)이 고구려의 서쪽 진출을 막고 싶어도 겨우 천여(千餘) 호(戶) 인구로는 대릉하(大凌河) 북쪽에서부터 발해연안(渤海沿岸)까지 그 넓은 지역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 무력(武力)이 아쉬운 쪽은 북위(北魏)입니다. 만약 북위(北魏)가 고구려를 잘못 건들여 삐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남조(南朝) 정권이 백제(百濟)와 연합하여 북위(北魏)를 공격할 경우 북위(北魏)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북위(北魏)는 어떻게 하던지 고구려에 잘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뒤에 설명하지만 백제(百濟)가 서기 488년에 일본열도를 다시 평정하여 인현조(仁賢朝)를 세우고 일본열도의 인현조(仁賢朝) 병력을 백제(百濟) 주둔지역으로 대량으로 이동시켰을 때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백제(百濟),남제(南齊) 연합군이 서기 488년에 북위(北魏)를 공격하자 북위(北魏)는 그 해부터 한해 3번씩 고구려와 교류하며 고구려 무력에 메달리게 됩니다. 즉 급한 쪽은 고구려가 아니라 남쪽 남조(南朝)의 공격에 시달리는 북위(北魏) 등 북조(北朝)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위(北魏)와 고구려는 찰떡 궁합같은 동맹관계(東盟關係)를 계속하게 되고, 북위(北魏)는 고구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난하에서 대릉하(大凌河) 사이 요서(遼西) 지역을 북위(北魏)는 북쪽 대릉하 이북 지역에, 고구려는 남쪽 발해연안(渤海沿岸) 지역에서 서로 공존(共存)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는 서쪽으로 발해연안을 따라 난하까지 진출(進出)해 있었습니다.

그후  서기 534년에 북위(北魏)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지게 되나, 동위(東魏)와 고구려는 여전히 동맹관계(東盟關係)를 유지하였습니다.

그후 550년에 동위(東魏) 지역에는 북제(北齊)가, 서위(西魏) 지역에는 북주(北周)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북제(北齊)와 고구려는 우호관계(友好關係)를 유지하였고, 그 때문에 고구려는 난하까지 발해연안(渤海沿岸) 지역을 계속 영유(嶺有)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서기 577년에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키자 북주(北周)와 고구려는 적대관계가 됩니다. 이때 북주(北周)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고구려는 온달장군을 보내어 북주(北周)와 전쟁을 벌이게 되나, 고구려는 발해연안을 따라 난하까지 그대로 영유하게 됩니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은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肄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三國史記 列傳 溫達傳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주몽의 기풍을 닯았는데 연호를 대덕이라 고치고 나라를 다스림과 가르침이 아주 밝았다. 대덕18년(서기 576년)에 평강상호태열제가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러 가서 크게 처부시니 유림진 이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平岡上好太烈帝 有膽力 善騎射 乃有朱蒙之風 改元大德 治敎休明 大德十八年丙申 帝率大將溫達 往討碣石山 拜察山 追至楡林關 大破北周 楡林鎭以東悉平 楡林」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註 유림진은 난하하류 바로 서쪽입니다.]

 

한편 북주(北周)의 무제(武帝)는 북제(北齊)를 멸망시켰지만 다음해 선정(宣政) 원년(578) 초에 돌궐 정벌에 나섰다가 운양(雲陽)에 이르러 병이 나서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는 도중 36세의 한창 나이로 죽고 뒤를 이어 태자 우문윤(宇文贇)이 2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그가 선제(宣帝)입니다. 선제(宣帝)는 즉위한 후 같은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군벌(軍閥 양견(楊堅)의 딸을 황후로 세우고는 즉위 후부터 온갖 음란(淫亂), 포악(暴惡)한 짓을 하다가 그것에 전념(專念)하기 위하여 재위 1년도 안 된 대성(大成) 원년(서기 579년) 2월에 그 자리를 어린 태자 우문천(宇文闡)[정제(靜帝)]에게 양위(讓位)하고 자신은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칭하다가 상황(上皇)이 된지 1년만에 황음(荒淫)으로 인하여 요절(夭折)하게 됩니다. 이에 외척(外戚 ) 양견(楊堅)이 수왕(隋王)에 봉해져 8세인 정제(靜帝)의 후견인(後見人)이 된지 1년만인 서기 581년에 선양(禪讓) 형식을 취하여 사실상 어린 황제를 폐위(廢位)하고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수(隋)로 바꿉니다. 이 해가 개황(開皇) 원년입니다. 이때 남조(南朝)에는 서기 557년에 무장(武將) 진패선(陳覇先)이 세운 진(陳)나라가 있었습니다.

수(隋) 문제(文帝)는 비록 정제(靜帝)로부터 나라를 빼앗았지만 대단히 영민(英敏)하고 전략(戰略)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나라를 세운 후 동쪽의 고구려와 남족의 진나라 중 어느 것을 먼저 정벌(征伐)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이때 정세에 밝은 평원왕(平原王)은 재빨리 정세를 파악하고 그해부터 해마다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외교적 접촉을 합니다. 수 문제가 보기에 고구려는 재빨리 수나라 건국에 대비하여 사신을 보내는 등 민첩(敏捷)하게 움직이는데 반하여 남쪽 진나라는 고구려보다 활기가 없어보이자 진나라를 먼저 치기고 마음 먹습니다. 이때 진나라는 운이 다했는지 서기 582년에 선제(宣帝)가 죽고 어리석은 후주(後主)가 즉위합니다.

후주(後主)는 고구려 평원왕과는 달리 수나라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 토목사업을 일으켜 궁전을 꾸미고 총애하는 장려화(張麗華) 등 미인들을 포옹하고 밤낮으로 주연(酒宴)에 골몰하며 놀이에 열중합니다. 이에 수(隋) 문제(文帝)는 중국을 통일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강남(江南) 공략(攻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하여 양자강 상의 요충지 강릉(江陵)을 점거하고 있는 후량(後梁)을 무너뜨리고 그곳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는 수군(水軍) 선단을 준비한 후 건강(建康)으로 향하게 하고, 수(隋) 문제(文帝) 자신은 보기병을 거느리고 육로로 건강으로 처들어 갑니다. 기습(奇襲)을 당한 진나라는 서기 589년에 수나라에 멸망하므로서 수나라는 중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내일은 수나라 건국 시까지 평주(平州), 영주(營州) 방면의 군현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출처 : 바른역사알리기 운동본부
글쓴이 : 러시안롤렛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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