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바흐

[스크랩] 줄루전쟁 - 차길진 법사

kongbak 2010. 1. 21. 20:00



(83)줄루전쟁


1879년, 남아프리카 이산들와나. 무려 2만여 명의 줄루족 전사들이 1800여명의 영국군 군대를 향해 공격했다. 그러나 영국군 부대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화포와 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무려 1400여명 이상의 영국군이 전사하고 만 것이다.
 
물론 줄루족도 타격이 심했다. 2000여 명의 줄루족 전사가 사망했고, 또 2000여 명의 줄루족 전사가 부상당했다. 그러나 줄루족의 왕은 영국군에 물러서지 않았다. 영국군을 줄루족 영토로부터 완전히 내쫓을 생각이었다.
 
1816년 남아프리카의 부족이었던 줄루족은 강력한 부족장 샤카의 출현으로 남아프리카의 모든 부족들을 통일한 뒤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로부터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영국군의 출현이라는 제국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1차 전쟁이 끝난 뒤, 줄루족 왕인 케츠와요는 로크스드리프트에 진을 치고 부상병을 치료 중이었던 나머지 139명의 영국군마저 깨끗이 괴멸하라고 명한다. 4000여명의 줄루족 전사들은 139명의 영국군을 치기 위해 그들이 진을 치고 있던 농장건물로 모여든다.
 
139명의 영국 군사들은 정말 처참했다. 정예부대도 아닌, 요리사, 주방장, 행정병 등등이었고 그나마 부상병이 대다수였다. 1차 줄루 전쟁 때 용병들은 이미 다 도망갔고, 지휘관은 전투지휘관 출신도 아닌 공병대 대위로 그는 남아프리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현지 주둔 대위는 공병대 대위가 그보다 임관이 3개월 빠르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공병대 대위에게 준다. 둘 다 전투 지휘 경험은 전무했다. 전쟁 초보들이 139명의 오합지졸 군사들을 데리고 무려 4000명의 줄루족 전사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장장 16시간의 전투 결과, 줄루족은 800여 명이 전사했고, 영국군은 15명이 전사, 12명 부상.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기적적인 대승이었다.
 
나는 이 얘기를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아버지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시절, 줄루전쟁을 교본으로 배웠다고 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조선의용군 시절 선봉으로 뛰신 태항산 전투 때 줄루전쟁을 많이 참고하셨다고.
 
2009년 한 해를 마감하며 TV에서 본 영화 '줄루'는 내게 아버지의 태항산 전투담과 더불어 줄루전쟁까지 회상시켰다. 과연 139명의 영국군은 어떻게 4000명의 줄루족 전사들을 이겼을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2010년 한국경제를 관망하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2010년에는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발생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한 갑자가 되는 해인 2010년 경인년은 백호의 기상을 갖고 있으나, 그만큼 안팎으로 부딪히는 일이 잦다.
 
정치, 경제에 있어서도 그렇다. 정치적으로는 60년 동안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남북관계가 어느 한 쪽으로 확실히 기울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자본을 유의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화교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지구상 유일한 국가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렇지 않다. 북한은 중국의 자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을 확실히 끊어줘야 한다. 북한 역시 한 나라다. 우리 자본의 힘이 북한을 움직여줘야 한다. 지금 중국은 마치 줄루족처럼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럴수록 우리는 영국군처럼 똘똘 뭉쳐 지혜롭게 나라 안팎의 경제를 움직여야 한다.
 
2차 줄루 전쟁 후, 139명의 영국군은 수많은 공훈훈장과 작위를 수여받았다. 고통 뒤엔 큰 보상이 있기 마련. 북한의 중국 의존력을 줄이고, 남한 역시 중국과의 영리한 상거래를 실시한다면 2010년 한국경제는 문제없을 것이다.

출처 : 아리랑
글쓴이 : 이승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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