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김대중평가

kongbak 2009. 12. 31. 01:43

 

- 김대중전대통령 평가-

 

 

 

 

역대 정권 중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은 경제가 파탄 난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경상흑자 906억弗물가도 안정  한국은행과 통계청 등에 따르면 고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8~2002년 경상수지 흑자는 906억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181억1천40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말 204억600만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말에는 1천214억1천300만달러로 늘어나면서 5년간 1천10억700만달러 증가했다.

 

연평균 증가액은 202억100만달러로 노무현 정부의 281억6천200만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김대중 정부 때는 물가도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3.5%로 노무현 정부 때의 3.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4.5%로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높았지만, 전두환 정부(8.7%), 노태우 정부(8.4%), 김영삼 정부(7.1%) 등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성장률이 -6.9%에 이르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연평균 고용률은 58.1%로 전두환 정부의 47.2%보다 높았을 뿐 김영삼 정부(60.3%), 노무현 정부(60.0%), 노태우 정부(58.4%)보다는 부진했다.

 

하지만 연간 고용률 추이를 보면 1998년에는 외환위기 여파로 56.4%까지 떨어진 후 2000년 58.5%, 2001년 59.0%, 2002년 60.0%로 매년 조금씩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윤덕룡 국제거시금융실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대응해 대외적인 안정에 신경을 쓰면서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고금리 여파로 물가도 비교적 안정됐다"며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확대한 여파로 경기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들고 고용이 감소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술(IT)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황인성 수석연구원은 "중화학 공업과 IT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구성, 고환율과 선진국 경기 호조라는 유리한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게 IMF 조기졸업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경제연구본부장은 "IT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지식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해 IMF 졸업 이후의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며 "외신들이 한국을 `IMF 모범생'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각종 위기설이 불거질 때마다 막대한 외환보유액은 루머를 일축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선임연구원은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하고 순식간에 15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재앙'이 덮쳤는데도 사회적인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조기에 수습한 것은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설득의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기업 재무구조, 고용 유연성, 공공부문 개혁 등 우리 경제의 구조를 개선한 점도 김 전 대통령이 거둔 큰 성과로 꼽혔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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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0일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 성명이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은 점도 밝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고 밝혔다. [45]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조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 다음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며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46]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금융위 기 때는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헌신한 분"이라면서 "영국 정부를 대신해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밝히고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등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관계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 앞으로 조문을 보내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한국 민주화와 인권, 동북아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독일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성명에서 "민주화와 인권의 용감한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 한국을 움직인 용감하고 비전에 찬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길을 놓았고, 국제사회의 인권을 지켰으며, 따라서 노벨평화상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었다. 햇볕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지속적인 평화를 주었다"고 평가했다.[47]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난 6.15 공동선언을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도 서해직항로를 이용한 특별기편으로 조문단을 파견하였기도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11월 13일 오후 5시  일본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민간 김대중 추모위원회’가 마련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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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5월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25] 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며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한국 내 특정지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다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고 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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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52]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증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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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해외에서는‘아시아넬슨 만델라’로 불리었다. 그는 민주화와 의회주의의 상징으로 불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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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경력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메달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2000년 - 노벨 평화상

2000년 - 국제평화상

2000년 -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2003년 - 늦봄통일상

2003년 - 제7회 만해상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2003년 -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학위


1992년 -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교 외교대학원 정치학박사

1983년 - 미국 에모리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92년 - 미국 가톨릭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94년 -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1995년 - 미국 포트랜드 주립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1996년 - 호주 시드니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98년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1998년 - 경희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1998년 - 고려대학교 명예 경제학박사

1998년 - 미국 워시본 대학교 명예 문학·인문학박사

2001년 -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2002년 -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2006년 - 영남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2006년 - 전남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2

006년 -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박사

2007년 - 전북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2007년 -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명예 법학박사

2008년 - 미국 포틀랜드 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2008년 - 말레이시아 말라야 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

 

 

 

 

c_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