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뿌리는 초나라가 아니라 청구와 단군조선이다 |
|
![]() |
‘신라의 뿌리는 중국의 초나라’라고 주장하는 중국 양완쥐안(楊萬娟) 교수의 주장에 대한 盧姓族의 후예 노중평의 반론 노중평 주: 楚나라를 세운 昆吾族은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후예이므로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동이족이다. 초나라의 방사 漢終이 이끌고 한반도로 온 羅성과 盧성은 유망의 성인 姜성의 후예이므로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동이족이지 역사의 정통성으로부터 이탈한 반역자 화하족이 아니다. 청구국과 단군조선이 멸망하면서 일어난 종족이동 신라사람들은 배달나라 멸망기에 배달나라의 근거지인 탁록涿鹿에서 온 사람들이다. <광여기廣輿記>에, 탁록에 대하여, “북쪽으로 곧장 진秦의 보안주保安州로 상곡군上谷郡에 속한다. 한漢은 탁록성涿鹿城이라고 하였다. 서남쪽에 탁록산涿鹿山이 있다.”고 하였다. 탁록은 진나라 때 진에 속한 땅이었다. 그래서 진을 멸망시킨 한이 이 곳의 이름을 상국商國 때부터 써오던 이름 그대로 써서 탁록성이라고 하였다. 상곡군은 탁수涿水가 발원하는 탁록산이 있다. 또 <주례추관周禮秋官> 주註에, “탁涿을 수명水名(강 이름)이라고 하였고, 탁록현涿鹿縣의 상곡上谷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이 탁수가 신라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辰韓(秦韓)조에는, 최치원崔致遠의 말을 인용하여,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사람들이 피란해 온 곳이므로, 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리邑里를 사탁沙涿(주, 새 탁수, 혹은 새 탁록이라는 뜻), 점탁漸涿(주, 탁수가 천천히 흐르는 곳) 등 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탁을 도道로 발음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서, 신라사람들의 상당수가 탁록에서 이주해 온 것이 들림이 없다고 본다. 탁록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다. 원래 탁록은 4520여 년 전에, 치우천왕蚩尤天王과 황제黃帝가 10년 전쟁을 벌인 곳이다. 이 곳에서 치우천왕이 패하면서, 청구국靑邱國이 멸망하였다. 탁록으로 불리기 전엔 청구靑丘로 불렸다. 상商(은殷) 때 청구가 탁록으로 불렸다. 이어서 상이 주周에게 멸망하였고, 주가 진秦에게 멸망하였고, 진은 한漢에 멸망하였다. 이렇게 왕조가 바뀌었어도 탁록이라는 지명은 바뀌지 않았고, 지금도 중국 북경의 서북쪽에 하북성 탁록현이라는 지명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신라사람들을 진이 망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는데, 진이 한에게 멸망하면서, 탁록에서 유민이 발생하여 대량으로 신라 땅에 이주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땅에 진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1에는, “먼저 조선유민朝鮮遺民이 산곡山谷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조선유민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단군조선유민, 기자조선유민, 위만조선유민의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단군조선이 진시황(BC246~206) 8년(BC239)에 진에게 멸망(<檀君世紀>)하였으므로, 신라에 정착한 조선의 유민은 단군조선의 유민이다. 그러므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신라에 정착한 유민은 진에 멸망한 단군조선유민과 한에 멸망한 진의 유민 둘로 볼 수 있다. 한에 멸망한 진의 유민은 황제에게 멸망한 청구국의 후손들로 볼 수 있다. 청구국 이 멸망한 이후에, BC2457년경에 천일태제天一泰帝가 다스리는 단국檀國이 생겼다. 단국은 BC2333년에 단군왕검(천일태제의 손자)에 의하여 생긴 조선의 전신이다. 조선이 진에게 BC239에 멸망했으므로, 청구국 멸망 후, 약 2128년 후에 신라가 생긴 것이다. 신라의 전신 斯盧國의 정체 사로국斯盧國이 주축이 되어 신라를 건국했는데, 사로국의 사斯는 ‘새롭다’는 말이고, 로盧는 ‘말을 키우는 부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로국은 새 땅에 이주한 말을 키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단군조선시대에 이러한 족속을 마가馬加라고 하였다. 마가는 단군조선을 세운 오가五加 중의 하나이다. 이들이 말을 키우고 말을 다루는 종족이었으므로, 이들이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조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에는, “한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끝이 났고, 남쪽은 왜倭와 연접되어 있는데, 지방은 4천리나 된다. 이 한은 세 종족이 있다.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요,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그 서쪽에 있다. 이 지방 백성들은 대대로 여기에 와서 사는 사람들로, 벼를 심어 곡식으로 먹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 입을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들 나라가 50여 나라가 된다. 이 중에서 큰 나라는 인구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인구가 몇 천 호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 나라 중에서 사로국과 관련이 있는 나라로 볼 수 있는 나라가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막로국莫盧國·구로국狗盧國·사로국駟盧國·정로국挺盧國·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매로국邁盧國 등 8국이다. 8국의 이름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속로불사국은 오래전부터 말을 길러온 나라, 자리모로국은 칼을 세우고 말을 기르는 나라, 막로국은 막조선에 속했던 말을 기르는 나라, 구로국은 구가에 속했다가 말을 기르게 된 나라, 사로국은 말을 가장 많이 기르는 나라, 정로국은 특출하게 말을 잘 기르는 나라, 모로비리국은 칼을 세우고 말을 기르던 선비족을 떠나온 나라, 매로국은 뛰어나게 말을 잘 기르는 나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나라'라는 말에는 ‘말을 잘 기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나라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 나라가 斯盧國(새나라)이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 한에는 駟盧國(말을 잘 기르는 나라)이라고 하였다. 신라新羅는 사로斯盧의 변음이다. 이외에 신라초기에 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이라고도 불렸는데, 서徐는 소蘇의 변음이다.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사로국의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수장으로서,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 마립간麻立干으로 내세웠다. 우리역사에서는 소벌도리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데, 소벌도리의 조상에 소풍이 있고, 소풍은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60세 손이 된다. 그러므로 소벌도리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신라를 세운 소벌도리를 징검다리로 해야 중국 땅에 버려진 우리 대륙의 역사를 되찾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이전> 변진전弁辰傳에는 24국이 나온다. 먼저 50여 국이었다가 통폐합되어 24국으로 줄었다고 볼 수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 중에 사로국駟盧國이 없어지고 사로국斯盧國이 생겼다. 사로국斯盧國에 새 나라라는 뜻이 있으므로, 로盧자들어가는 8나라가 사로국斯盧國에 합쳐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로국盧國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나라들이 생겼는데, 변진반노국弁辰半奴國·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변진감로국弁辰甘露國·시로국尸路國·마연국馬延國·변진정조마국弁辰定漕馬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 등이다. 노奴와 로路와 로露는 로盧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이름들이다. 말을 의미하는 마馬는 말을 키우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로盧와 같은 뜻으로 섰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나라들이 공통으로 로자를 나라 이름에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라가 생길 때 신라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蘇伐都利와 己私國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의 마립간으로 세운 소별도리는 어느 나라 사람으로 불 수 있을 것인가? 변진 24국 중에서 기사국己私國이 소벌도리의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소벌도리의 조상이 소풍蘇豊(<부소보서扶蘇譜序>·<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소씨상상계蘇氏上上系>)이고, 소풍의 원래 족성族姓이 기성己姓이었기 때문에, 기사국을 소벌도리의 나라로 보는 것이다. 기성己姓이 원래 풍이족風夷族에서 나오므로, 사私는 사巳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기己가 사巳에서 나왔음을 밝히는 문자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주: 풍이족 “우리나라에서 고대에 사蛇(뱀)자의 부수인 충虫(벌레)자, 또 사巳(뱀)자로서 씨족의 성을 삼는 예가 적지 않았다. 이로써 뱀을 숭상하는 씨족(본고 필자 주, 風夷)을 이루게 되었다. <모문리>에는 蛇자와 虫자와 사巳자가 성씨로서 통용되었고, 옛날의 말에서는 작은 뱀이 충虫자가 되었다. 사람과 관련하여 독충毒虫을 사蛇라고 하고, 지금도 사蛇를 장충長虫(긴 벌래)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고대의 치우蚩尤, 축융祝融(본고 필자 주, 衆艅鯀), 우禹(본고 필자 주, 중여곤의 사위 <尙書>)...는 충虫자를 따랐다. 풍씨족風氏族의 복희伏羲, 여왜女媧도 충虫자를 따랐다.” 이 글은 지나인이 지나인의 관점에서 쓴 글이므로 이 글의 오류를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씨족이라는 말을 썼는데, 풍風은 씨족의 씨칭氏稱이 아니고 족성族姓이다. 족성은 모계성母系姓을 말한다. 다음에 풍씨족風氏族이라고 했는데, 이때엔 씨족氏族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풍이족風夷族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 글의 취지는 충虫자와 사巳자에서 성姓들이 나왔다는 뜻인데, 풍이족의 족성에서 복희伏羲, 여왜女媧, 치우蚩尤, 축융祝融, 우禹라는 족성이 나왔다는 것이다. 복희틑 포희包羲라고 했는데, 포包자에 사巳가 들어 있으므로 풍성으로 보고, 또한 여왜는 복희의 누이이므로 그도 또한 풍성에서 나왔다고 본다. 蚩尤의 치蚩에 충虫이 있으므로 역시 모계족성이 풍風임을 알 수 있다. 축융의 융融에도 충虫이 있으므로 모계족성이 풍風이라고 본다. 우禹 또한 충虫이 있으므로 모계족성이 풍이라고 본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축융을 처음 쓴 분은 9,900년 전에 한국을 세운 풍이족 출신의 한인천제라는 점이다. <부소보서>에, 한인천제를 적제赤帝 축융祝融이라고 하였다. 그가 풍이족의 시조가 됨으로 융融자에 충虫자를 썼던 것이다. 따라서 풍이 풍이족의 족성임이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춘천의 설화와 민요>에서는 우씨족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성씨가 양楊씨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은 을묘년(BC2706년)에 즉위하였는데 강수姜水에서 살아 성을 강姜이라고 하였다. 유망도 강수姜水에서 오래 살았다. 그래서 그의 성이 강姜,羌이 되었다. 황제 또한 유망의 이복동생이므로 같은 곳에 살았고, 성이 강씨가 되었다. 강姜자에는 양羊자가 들어 있다. 양자가 들어 있는 강자를 성으로 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같은 모계집단에 소속한 유목민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동근구보서>에 “적제(주, 한인천제)의 후손은 風, 姜, 姬, 己 등 여러 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적제의 61세손 곤오가 기己를 소蘇로 바꾸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강, 희, 기가 모두 풍이에서 나온 모계족성임을 알 수 있다. 양성楊姓은 희성姬姓에서 나온다. 희성은 황제의 또 다른 성이다. 주周 선왕이 아들 상부尙父를 양楊(호북성湖北省 양번楊樊 일대)애 봉하여 양성楊姓이 되었다. 양성楊姓은은 지나성의 6대 성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고장에 우성과 양성이 정착한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이들 우성과 양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두 성이 무슨 이유로 앙숙이 되었는지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소벌도리蘇伐都利를 풀어 쓰면 소도벌도읍리蘇塗伐都邑利로 풀어 쓸 수 있는데, 利는 里와 같은 음과 뜻으로 본다. 소벌도리를 풀면, “소도를 세운 벌판에 정한 도읍이 있는 곳”으로 풀린다. 변한에 속한 50여 국 중에 신소도국臣蘇塗國이 있는데, 신소도국은 소벌도리의 나라인 기사국의 신하나라이거나, 새로이 소도국蘇塗國으로 지정이 된 나라로 볼 수 있는 나라이다. ‘마고를 세우는 사람’이라는 뜻의 麻立干 신라의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했는데, 마립麻立은 ‘마고를 세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마고를 세우는 일이 솟대를 세우는 일이다. 솟대를 소도에 세우는 일을 해 온 사람이 소성蘇姓 집안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박혁거세가 신라의 임금이 된 이후로 신라의 임금들이 솟대를 세웠으므로, 마립간은 솟대를 세운 신라의 임금이라는 뜻이 된다. 마고의 유습이 마고지나에서 한국으로, 배달나라로, 청구국으로, 단국으로, 단군조선으로, 신라로 전수된 것이다. (주, 소풍은 원래 풍이족의 기성으로 단국의 홍제 때 홍제에게 귀순하여 홍제 8년에 황하의 지류인 수분하綏芬河에서 제곡고신을 물리치고, 소성을 사성한 사람이다<부소보서>) 마고의 유습을 실천해 온 신라 여기에서 마고의 유습이라고 하는 것은 마고가 체제를 구축한 모계사회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것이고, 그의 유시인 해혹복본과 증표인 천부삼인을 전승하는 일이다. 마고가 세운 모계사회는 공동부부의 사회였고, 이 사회는 여덟 쌍의 부부가 공동부부가 되어, 종족을 번성시키며 이끌어가는 사회였다. 신라는 향찰鄕札이라는 문자를 썼는데, 향찰은 한자의 이미지를 살려서 기록자의 의도를 표현하는 기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향찰로 기록된 문장을 그 문자가 갖고 이는 본래의 뜻을 가지고 해석을 했다간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문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를 추적하여 해석을 해야만 기록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신라 때 박재상이 쓴 <부도지>에 기록된 율려律呂·팔려八呂·실달성實達城·허달성虛達城과 같은 문자들이 향찰로 쓴 문자들로 볼 수 있는 문자들이다. 이들 문자에는 이들 문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 이외에, 저자가<부도지>에서 향찰로 써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따로 감추어져 있다. 이 감추어진 의도를 알아내기 위하여, 필자는 이들 문자에서 이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찾는다. 제대로 찾지 못하면, 저자의 의도를 알아내는 데에 실패한다. 이렇게 하여 찾아낸 의미들을 종하여, <부도지>에 기록된 위 단어들에서 신라 사회가 푸날루아로 엮어진 모계사회임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율려律呂의 율律은 달릴척彳+붓율律자이다. 붓이 달린다는 뜻이다. 붓은 문필文筆이라는 뜻이고, 촛대와 좃대를 은유한다. 여呂는 입구口+꽂을곤丨+입구口자이다. 입에 입이 꽂혀있음을 나타낸다. 남녀간에 교접交接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율려는 남녀간의 교접을 의미하는 문자로 본다. 따라서 이들 문자에서 이성교합異性交合이나 부부관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팔여八呂는 팔八+여呂자이다. 여呂를 부부로 보면, 8쌍의 부부가 된다. 8쌍의 부부 사이에서 마고麻姑가 태어난다. 마고는 8쌍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모계사회에서 처음 태어난 여자가 된다.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려주지 않으면, 마고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모계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대단치 않기 때문에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가 팔여의 음에서 태어났다고 막연하게 말하게 된 것이다. 그가 이룩한 모계사회를 마고지나麻姑之那라고 하였다. 마고대성麻姑大城은 마고가 사는 큰 성이다. 모계사회를 의미한다. 실달성實達城의 실實은 집면宀+어미모母+조개패貝자이다. 어머니가 집안에 들어앉아서 돈을 버는 형상의 문자이다. 이 문자는 성창聖娼과 관련이 있다. 아스테르신화에서처럼 1년에 딱 한번 금을 주고 여자를 사는 경우이다. 달達은 달릴착辶+희망할행幸자이다. 희망을 보고 달려가는 것을 뜻한다. 성城은 흙토土+이룰성成자이다. 뜻을 이루는 땅이다. 그르므로 실달성實達城은 사내가 돈을 가지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사겠다는 일념으로 달려가서 뜻을 이루는 곳이다. 이러한 곳이 바빌로니아신화에 나오는 아스타르신전이다. 실달성은 마고대성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소원을 이루는 아스타르신전과 같은 곳이다. 허달성虛達城의 허虛는 점복卜+굴바위엄厂+칠성칠七+북녘북北자이다. 북쪽에 있는 바위굴에서 칠성으로 점을 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위굴에서 점을 쳐서 소원을 이루는 곳이다. <부도지>에 나오는 위 문자들을 해석하면, 성창聖娼과 모계사회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고의 출생배경이 모계사회임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세운 솟대는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를 상징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마고지나의 유습을 계승한 나라가 신라였고, 신라의 전신은 사로국斯盧國에 통합된 나라들로, 나라 이름에 말을 의미하는 노盧자가 들어가는 馬加족들이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는 BC770년에서 BC453년까지 323년 동안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천자국은 주나라였다. 제후국은 초기에 1000여개가 있었으나, 후기에 가서 128개로 통합되어 있었다. BC376년은 춘추시대가 끝나는 때였다. <國語>에는, 지금의 장강 한수일대의 남국南國은 신申·여呂·응應·등鄧·수隨·당唐이 있고, 그 북쪽으로 적狄·선우鮮虞·노路·낙洛·천泉·서徐·포蒲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우虞·외·곽·양楊· 위魏·예芮·, 동쪽으로 등騰·설薛·추芻·거가 있다. 그 외 두杜·주·담·식息·나羅·노盧·선單·형 담譚·수遂·정程·서徐·서舒·육六·향向·박薄·용·庸·영·옹雍·경涇·수水·양梁·강絳·익翼·제祭·허許· 섭葉·방房·황요黃蓼·영씨英氏·계·담·숙宿·鄭의 동쪽으로 10읍인 괵·회·오·폐蔽·보補·주舟·의依·유柔·역歷·화華였다. 이들 나라 중에서 마가에 해당하는 나라로 볼 수 있는 나라들이 나羅·노盧·로路이다. 이들 성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구려족에서 나온 신농의 동이족과 황제의 화하족 처음 강성姜姓을 쓴 분이 신호身號가 염제炎帝인 신농神農이다. 그의 이름이 석년石年이다. 그를 천자天子라고 하였다. 그가 강수姜水에서 자랐기 때문에 강성을 갖게 되었다. 그를 시작으로 신농의 대가 8대 519년을 이었다. 신농의 8세 후에 태어난 분이 유망楡罔이다. 중국은 신농과 유망을 혼동해서 말하고 있다. 신농神農을 시조(주, <사기> 오제본기)로 말하면서, 8대 후손인 유망楡罔(<장자> 주)도 시조 신농이라고 기록했고, 기록자들은 언제나 이 둘을 혼동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농에다 유망을 덮어 씌워 일어나게 된 현상이다. 유망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태어났고, 황제와는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 사이였다. 이들 형제 중에서 유망이 신농처럼 강수姜水에서 자랐으므로 강성을 갖게 되었다.(<여씨춘추> 맹하기 高수 주) 유망, 황제(황제는 희수姬水에서 자랐음)와 같은 시대에 치우천왕(배달나라의 자오지천왕, 치우천왕도 강성이었음)이 탁록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멸망하여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이때가지가 배달나라의 구려족九黎族시대였다. 구려족은 한국의 종족명칭인 구한족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구려족시대는 치우천왕을 묘족苗族(苗桓族)이라고 하였고, 유망과 황제를 아울러 화서족華胥族 또는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불렀다. 한반도에 유입된 종족이 중원의 패권을 잡은 황제가 다스리는 화하족을 뺀 다른 종족들인데, 이들이 동이족東夷族이다. 그러므로 동이족이라고 할 때는 구려족에서 황제가 다스리는 화하족을 뺀 종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망이 이끌던 종족은 사실상 화하족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인류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킨 화하족의 역사왜곡 황제가 이끄는 화하족을 유망이 이끄는 화하족에 덮어씌워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배경에는 유망이 소전의 장자라는 데에 있었다. 황제가 소전의 장자였다면 이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신농으로부터 8대를 이어 유망이 물려받은 강성姜姓의 장자권長子權을 그대로 인수하기만 하면 9대 신농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자권을 유망이 가지고 있으므로 그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하족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유망의 후손과 황제의 후손이 한 대씩 걸러 가며 제위에 앉게 하는 제위상속의 제도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황제의 가계에서 제위상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제위는 유망(BC2517)에서 유망의 적자인 희화羲和에게 넘어가지 않고, 황제의 적자인 소호금천少皥金天(BC2474)에 넘어가게 되었다. 황제가 치우천왕과 유망을 아우르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고서도 제위에 앉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라의 금성金姓은 소호금천이 시조가 된다. 다음엔 유망의 손자인 전욱고양諯頊高陽(BC2467)에게로 제위가 넘어갔다. 전욱고양이 고성高姓의 시조가 된다. 고구려 고성高姓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다음엔 황제의 손자인 제곡고신帝嚳高辛(BC2420)에게로 제위가 넘어갔다. 제곡고신은 다음에 유망의 증손자인 중여곤衆艅鯀에게 제위를 넘겨주지 않고 자신의 아들 지摯(BC2365)에게 제위를 넘겨주어, 제위찬탈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인류 역사상 첫 쿠데타가 된다. 그런데, 지가 제곡고신의 장자가 아니라, 측실 간적과의 사이에 서 출생한 차자次子이라, 정실인 중계(종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인 요堯의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요가 쿠데타를 일으켜 지를 죽이고 제위(BC2357)를 차지하였다. 다음엔 거호의 아들 순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죽이고 제위(BC2320)를 찬탈하였다. 다음엔 제곡고신과 간적 사이에서 태어난 우禹가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이고 제위(BC2311)를 찬탈하였다.(주, 이상 제위 즉위 연대는 낙빈기駱賓基(1917~1994)의 연표에 의한 것이다) 황제의 후손들에 의하여 4회에 걸쳐서 연속으로 쿠데타가 일어나 3명의 제왕이 살해당했고, 1명의 제왕 후보가 축출 당했다. 화하족의 후손들이 부르짖어 온 요순의 태평성대가 실은 쿠데타의 피로 얼룩진 새빨간 거짓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역사를 감추기 위하여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화하족이 대를 물려가며 해온 역사왜곡이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 공자와 사마천이었다. 중국역사에서 무수한 왕조의 부침이 있었지만, 이 유습만큼은 누가 제왕이 되었든 철저하게 지켜왔다. 물론 지금의 중국도 불타는 사명감에 넘쳐서 이 일을 하고 있다. 유망·황제·치우천왕이 모두 구려족에 속했고, 이들을 웅족熊族(황제 쪽에서는 유웅족有熊族)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머리 위에, 천제 한인의 아들이자 신인 한웅과 곰족 여인 웅녀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출생시키는 단군신화가 있다. 단군신화는 웅족(유웅족)의 신화이다. 그러므로 동이족과 하화족 모두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주: 구려족을 구성하고 있는 종족 중에 가장 강성한 종족이 웅족熊族이었다. 웅족은 황하를 기반으로 하여 탁록까지 널리 분포되어 살고 있었다. 하화족은 웅족을 유웅족有熊族이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시대에 우리의 조상은 모두 웅족에서 나왔다. 이 시대에 유웅족 중에서 세력을 키운 황제黃帝(BC2689 즉위)가 헌구軒丘에서 하백천왕체제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하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출동한 치우천왕의 군대가 탁록대전涿鹿大戰에서 10년 전쟁 끝에, 황제에게 패하여 배달나라를 대표하여 하백의 임무를 수행하던 청구가 멸망하였다. 이후로 배달나라시대는 구려족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없어졌다. 황제가 그의 이복형 유망(BC2517~2474)을 아우르고, 황제의 후손과 유망楡罔의 후손이 겹사돈관계를 맺어 푸날루아체제로 황제의 후손과 유망의 후손이 번가라가며 제위를 승계하였다. 이들이 중원의 역사를 이끌어간 때가 황제-소호금천(BC2474~2467)-전욱고양(BC2467~2420)-제곡고신(BC 2420~2365)-지(BC2365~2367)-요(BC2357~2320)-순(BC2320~2311)-우(BC2311~2303)의 시대였다. 전욱고양諯頊高陽에게서 곤鯀이 나왔다. 곤이 푸날루아의 법칙에 의하여 제곡고신으로부터 제위를 인수하여야 하나 제곡고신이 그의 아들 지摯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유망집안과 황제집안 사이에 맺어진 제위상속의 룰을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제위의 정통성이 곤에게서 끊어졌다. 熊心國(?~BC2333)과 檀國(BC2457~2333)이 청구국(BC2706~2598)의 뒤를 이어 배달나라를 대표하게 되었다. 단국 출신의 단군왕검은 14세 되는 해에 웅심국의 웅녀에게 장가들어 비왕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단국의 태자를 겸직하고 있었다. 단군왕검이 조선을 선포하기 전에 조선은 이미 웅심국과 단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국의 世系는 천일태제(BC2457~2400), 지일홍제(BC2399~2334), 태일성제(단군왕검BC 2333~2241)의 3대로 이어진다. 한인천제시대에 기성己姓을 창설하여 황하일대에서 구한족의 하백임무를 수행해 오던 곤오昆吾족(한인천제의 61세 손)이 황제-제곡고신으로 이어지던 시대에 세력이 약화되어 하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홍제에게 귀순(홍제8년 BC2392)하였다. 이해에 제곡고신이 단국과 고신국의 경계인 황하의 지류 수분하綏芬河를 넘어 단국을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고 하백임무수행의 능력을 회복하고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하였다. <扶蘇譜序>, <朝鮮紀> 웅심국왕이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고 단군왕검은 웅심국을 인수하였다. 또한 단국의 홍제가 붕어하면서 단국의 제위에도 올라 무주공산이 된 배달나라를 승계하였다. 이해가 무진원년인 BC2333년이었다. 그는 당시에 하백인 비서갑(한인천제의 62세손)의 딸 하백녀와 혼인하여 하백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아직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면 곤으로부터 구려족의 정통성을 인수하여야 하였다. 정통성을 인수하는 방법이 곤으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인수하는 일이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인수함으로써 유망의 장자인 희熙의 집안과 과 유망의 손자인 전욱고양 집안이 조선에 통합된다는 의미가 있었다. 단군왕검은 곤으로부터 조선이라는 명칭을 인수하여 경인 23년(BC 2311) 국호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개명하여 선포하였다.(<조선기>) 이 나라가 단군조선이다. 그러나 화하족이 동이족을 배반하고 화하족으로 홀로서기를 성공함으로써 사실상 단군신화종족시조신화권에서 떨어져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단군신화를 버리고 그 대신에, 복희伏羲가 화서華胥와 혼인하여 화하족(華胥族)의 시조가 되었다는 억지춘향의 신화를 그들의 시조신화로 삼았다. 복희는 배달나라의 6세 다의발한웅이다. 다이발한웅을 정체불명의 화서와 혼인시켜 그들의 시조로 삼고자 하였다. 그들이 이 신화를 시조신화로 택함으로써 화하족이 배달나라를 세운 구려족의 일원임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라고 하겠다. 己姓昆吾와 帝嚳高辛 나성羅姓은 <世本>에 웅성熊姓으로 나와 있다. 웅성은 모계족성이 웅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熊女를 배출한 웅족계열熊族系列의 성으로 볼 수 있다. 나성의 유래에 대하여, 그를 축융지후祝融之後라고 하였는데, 축융지후는 축융의 후예라는 말이다. 불을 관장하는 임금이라는 뜻인데,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축융이 된 분이 9900년 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扶蘇譜序>)이다. 그러므로 나성족을 한인천제의 후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축융지후은 축융이었던 전욱고양의 후예라는 뜻도 있다.(<廣韻>) 전욱고양이 나국羅國(지금의 호북湖北 의성宜城 서쪽)에 봉했으므로, 라가 그의 자손의 씨칭氏稱이 되었다는 것이다.(<廣韻>) 춘추시대에 나국은 망하여 초국楚國이 되었다. 그 후에 나라이름이 씨칭이 된 것이다. 황제에서 시작한 나성세계羅姓世系에, 황제 9대 후에 곤오昆吾가 나온다. 이 곤오가 기성곤오己姓昆吾와 같은 사람이라면, 나성羅姓과 기성己姓은 같은 성으로 볼 수 있다. 기성곤오는 황제세계에서 黃帝-昌意-乾荒-諯頊高陽-称(소호금천이 낳은 딸)-老童-吳回-?-昆吾로 나오는데, 이 세계표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전욱고양이 유망의 손자이므로, 사실상 황제-창의-건황 3대는 유망을 축출하고 황제를 갖다 붙인 황제의 세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들 3대를 없애고, 전욱고양 위에 소전-유망-희화를 갖다 붙여야 맞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소전-전욱고양-칭-노동-오회-?-곤오가 된다. 그러나 전욱고양 이후의 칭과 오회 등도 변조되었을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 <소씨상상계>에서 기성곤오가 제곡고신의 학정을 피하여 단군의 홍제에게 귀순했다고 했는데(高辛暴政莫甚移 居于弗咸山北肅愼 洪帝8年 高辛氏入寇 而爲義旅將 擊退於綏東之野 洪帝致賀其功而封蘇城爲河伯一云夏伯 <蘇氏上上系>), 그의 세계가 전욱고양 계열이어야만 왜 전욱고양의 뒤를 이어 제위에 제곡고신이 기성곤오에게 학정을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 하백河伯이라는 관직을 처음 쓰기 시작한 사람이 한인천제가 세운 한국시대에 한국을 세운 사람들인 풍이風夷족의 족성 풍風(뱀, 바람)에서 나온 기성己姓이다. 기성은 후에 단국의 홍제 때 소성蘇姓이 되는데, 기성이 소성이 되기 전에 기성으로부터 하백이 나왔다. 하백이 다스리던 기성족己姓族을 풍이馮夷라고 하였다. 풍馮은 풍風과 음이 같다. 풍馮은 풍이족에서 나온 풍이족馮夷族이라는 뜻이다. 풍馮에는 풍이馮夷가 물가-황하黃河에 살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황하에서 말을 기르며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후에 소성蘇姓을 갖게 되면서, 순수하게 기성己姓을 고집하는 집안과 소성을 받아들인 집안의 둘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있다. 소성을 받아들인 사람이 소성의 시조가 되는 곤오昆吾이다. 중원에는 지금도 곤오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곤오가 처음으로 청동솥을 만든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청동으로 처음 무기를 만든 사람이 치우천왕인데, 치우천왕시대에 곤오 집안에서 청동의 주조법을 발명했거나 치우천왕으로부터 청동주조법을 전수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나支那의 선진사先秦史에서는 청동기 문명의 주역으로 치우천왕, 황제와 함께 곤오를 이 시대 사람으로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하백은 곤오가 단국의 홍제 8년에 수분하綏芬河로 침입한 제곡고신을 물리침으로서 홍제로부터 받게 된 관직이기도 하다. 하백을 황하의 신이라고 하는 것은 황하에서 하백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신격화로 볼 수 있다. 하백이 하는 일은 황하일대에서 일어나는 종족분쟁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일이었다. 황하의 지류인 수분하綏芬河는 구려句麗로 불리던 지역이다. 단군조선시대에 부루단군은 그가 단제로 등극하던 신축원년(BC2240년)에 그의 4제弟 부소夫蘇를 수분하의 왕인 구려왕句麗王에 봉했다. 이 곳은 후대에 일어난 고구려의 발생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도 이 곳을 중요시하여 하백을 필요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기성곤오에게 가해진 제곡고신의 박해는, 제곡고신이 다음의 제위를 중여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중여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그의 서자 지에게 물려주려고 함으로, 중여곤계열의 사람인 기성곤오가 반기를 들어 부당함을 지적했기 때문에, 제곡고신으로부터 기성곤오에게 가해진 박해라고 볼 수 있다. 기성곤오는 제곡고신을 피하여 단국의 홍제에게 귀순하였다. 곤오족이 세운 楚와 羅姓과 盧姓 나성은 장손인 곤오의 6형제 중에서 막내 계운季運-부저附沮-혈웅穴熊-?熊의 4대를 거쳐서 생겨난다. 이들의 성은 나성이 나오기 전까지는 장자인 곤오의 성인 기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노성盧姓은 원래 9900년 전에 한인천제桓因天帝가 한국桓國을 세운 구한족九桓族에 속한 풍이족風夷族에서 나온 강성姜姓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풍이족의 강성에 성의 뿌리를 두고 있다. 풍이족에서 나온 성들이 풍성風姓·강성姜姓·사성巳姓·기성己姓·희성姬姓들이다. 노성盧姓은 여성呂姓·고성高姓·신성申姓과 함께 풍이족을 구성하는 족성의 하나인 강성에서 나왔다. 중국에서는 노성을 사해대성四海大姓 중에서 2번째라고 한다. 노성이 강성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유망·전욱고양계열의 성이고, 또한 나성과 뿌리가 같은 성이라고 하겠다. 강태공은 중국의 대표적인 정치가, 전략가로 유명한 전략병서 육도六蹈를 저술하여 인류에게 남겨주었다. 자손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70여 개 이상의 성씨가 분파되었다. 20세 강공康公까지 700년을 이어간다. 그 가운데에, 10세 강성姜城, 11세 高해, 고해가 제齊 한공桓公을 옹립한 공으로 말년에 盧國(오늘의 제남濟南시)의 왕이 되고, 노씨를 받게 되니, 고해, 즉 노해이며, 노씨를 사성한 시조이며, 주대周代 천자국天子國이 왕 칭호를 썼기 때문에, 제후국은 공 칭호를 썼다. (盧泰久 경기대 사회과학과 교수 <중국 東陽市의 盧宅을 다녀와서> 노씨종조 435호. 2004.11.20. 주, 盧宅은 절강성浙江省 동양시東陽市에 있는 세계 제1의 종택宗宅이다) 최근에 중국 우한(武漢)의 중남민족대학 남방소수민족연구소의 양완쥐안(楊萬娟) 교수가 역사문헌을 고증하여, 2000여 년 전 진나라 말엽에. 신라를 건국한 사람들이 방사方師 한종漢終이 이끌고 한반도로 넘어간 3,000명의 초나라의 나씨와 노씨들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이들이 한반도로 가서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주축을 이루었고, 신라의 먼저 국명 사로의 주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사로斯盧가 노씨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아울러 방사 한종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한웅의 원형으로 생각한다는 설도 제기하였다. 단군신화도 초나라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단군설화가 숭배하는 토템이 곰과 호랑이인데, 초나라 토템 역시 곰이며, 초나라 왕족 성이 슝(熊)이라고 밝혔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다 본 두 지역(三危와 太白)이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간쑤(甘肅)성 교차지에 있는 민산(岷山)과 한국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킨다고 양 교수는 주장했다. (<후베이일보 湖北日報>) 이 주장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초나라 왕족의 성이 웅熊이라고 한 점이다. 초의 선왕이 웅역이 살던 곳 형산이 곤오족이 살던 곳이다. 따라서 초나라가 곤오족이 세운 나라임을 수 있다.(아래 주, 참조) 곤오족은 9900년 전에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60대 손이다. 초나라의 방사 한종이 나성과 노성 3000명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를 세웠으므로, 신라는 중국인이 세운 나라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초나라는 이미 풍이족에 속한 기성곤오족이 세운 나라이므로, 한국 구한족에 속한 풍이족의 후예인 동이족이다. 초가 동이족이고, 화하족이 또한 동이족의 전신인 구려족에서 갈라져 나갔으므로, 화하족이 역사의 정통성을 찾는다면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주: <선진사先秦史>의 저자 전백찬翦伯贊은 고증을 하면서, 초楚의 선왕先王 웅역熊繹이 살던 형산荊山을 곤오족昆吾族이 살던 곳이라고 하였다. 또 <左傳> 哀公 17년에 '곤오의 허墟'에 대하여, 융주戎州에 있던 기성己姓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부소보서扶蘇譜序>에서 밝힌, 곤오족의 모계족성이 기성己姓이고, 풍이족 출신의 한인천제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국어國語 정어鄭語>에서는 기성곤오己姓昆吾라고 하였다. 다음부터는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금문족보연구>에서는 杞는 己가 변한 문자라고 하면서, 杞가 하우씨夏禹氏 이므로 기성이 곤오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곤오가 하족夏族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문족보연구>자 유정은 곤오가 한인천제의 60대, 또 61대 양 대의 손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거나, 알면서도 왜곡을 한 것이다. 하우씨는 황제가 25명의 아들을 낳아 己氏를 賜姓한 기씨己氏의 후예이다. 기성己姓은 족성族姓(모계족성母系族姓)이고 己氏는 씨칭氏稱(부계씨칭父系氏稱)이다. 그러므로 곤오가 하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라를 세운 사람들의 주축은 탁록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사람들 신라를 세운 사람들의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하북성의 탁록에서 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청구(상국 때 탁록으로 지명이 바뀜)가 황제에게 멸망할 때와 단군조선이 진에게 멸망할 때 2차에 걸쳐서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사람은 청구와 단군조선의 망인들로 볼 수 있다. 초나라는 BC8세기경에 건국했으나(건국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BC223년에 진에게 멸망했다. 진에게 멸망한 단군조선의 멸망 때(BC238)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초의 망인과 단군조선의 망인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에 초리국楚離國 단 하나가 나와 있다. 한전에 기록된 50여 국 중에서 단 하나 초리국만 소개되어 있다면, 이 초리국을 초국을 떠난 사람들의 나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변진전弁辰傳에는 24국이 소개되어 있으나, 초국에서 온 사람들의 나라는 단 하나도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중국에서 노성은 2대 대성에 속하는 성이다. 노성이 대성이므로, 초와 단군조선이 멸망했을 당시에도 노성이 대성이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대성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국명에 노盧자가 들어가는 여러 소국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
'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구려 갑옷의 특징 (0) | 2007.01.21 |
---|---|
[스크랩] 고구려 지도 (0) | 2007.01.21 |
[스크랩] 어느 화교의 양심고백-중국 한족은 허구다 (0) | 2007.01.17 |
[스크랩] 동이 혈통 태호복희와 역학 (0) | 2007.01.17 |
[스크랩] 고대환국의 토기 유물 (0) | 200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