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 장군, 천개소문이라고도 불렸음.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점령하였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요동성·백암성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의 혈전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644년(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신 장엄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요동성·백암성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의 혈전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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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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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서 연개소문만큼 극적인 인물도 드물 것이다. 어느날 갑자가 역사의 전면에 폭풍처럼 등장해서 세계제국을 구가하던 전성기의 당나라를 격파하여 한족의 영웅 이세민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시킨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의 멸망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은 어느 왕의 본기보다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은 그렇지 못하다.
일찍이 성균관 박사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 손으로 써놓은 연개소문의 사적이 전혀 없음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연개소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여러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연개소문에 관해 빠진 부분인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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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개소문의 출신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기록한 사초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맞아 대접했다는 단 한줄만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역사서에서 채록하여 전재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은 모두 연개소문의 적이었던 당태종 군신들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믿을 만한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서부 소속의 귀족이다.(연개소문이 서부 또는 동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성씨인 '연(淵)'을 서부인 연나부와 연결하여 그가 서부출신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북한의 손영종 교수가 쓴 '고구려사'에서도 역시 서부출신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으로 구당서 고려전에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영주도독 장검의 표문을 인용하여 그를 동부대인으로 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출신이며 집권 전에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하였고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귀족세력으로 보았다.)
2. 규염객 전
당나라 때 소설인 규염객 전은 당나라 사람 장열 또는 두광정이 저자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장열은 7세기 후반 사람이며 두광정은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 양제 시절 중국 태원에 와서 이정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아내인 홍불지와 의남매가 되었다. 규염객은 중원의 제왕이 되고자 도모하였으나 당국공인 이연의 아들 세민을 보고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원의 제왕이 되기를 포기하였음을 알리고 부여국으로 돌아와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인 이세민, 이정, 유문정, 양소 등이 등장하는데 단재 선생은 이 규염객이 연개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중국인에게 매우 인기있는 작품으로 규염객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도가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10여년 전 중국무협영화 시리즈 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적도 있다. 내용은 부여인 규염객이 수나라 때 태원에서 이정과 교분을 쌓고 그에게 병법을 전수하였으며, 양현감의 난 등으로 수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정과 함께 거병하여 수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세민이 영걸이란 말을 듣고 그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신선이 되고자 동방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3. 갓쉰동 전
또 다른 중국소설 갓쉰동 전은 단재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캐쉰이라 부르는데 이는 갓쉰동이란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옛날에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나이 쉰에 이르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바쳐 아들을 얻었다. 이름을 갓쉰동이라 하니 '갓 쉰에 이르러 얻은 아이'란 뜻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여 연국혜가 구슬처럼 아꼈으나 7살 되던 해에 어느 도사가 지나가다가 아기가 타고난 수명이 짧아 비범한 재주를 쓰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는 방법은 15년 동안 아이를 버려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연 재상은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란 이름을 새겨넣고 멀리 원주 학성동에 갖다 버렸다.
그 마을의 장자였던 사람 유씨가 꿈에 황룡을 보고 새벽에 바깥에 나갔다가 갓쉰동을 발견하여 데려다 길렀다. 유씨는 내력을 모르는 아이라 글자만 몇자 가르쳐 종으로 썼다. 갓쉰동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기이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검술, 병법, 천문, 지리를 배웠다.
유씨에게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막내인 영희는 그의 비범함을 사랑하여 서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영희는 귀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대장부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갓쉰동은 우리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쳐서 없애는 것이 평화의 근본인 만큼 달딸국을 쳐부순 후에 영희와 혼인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유씨의 집을 떠나 달딸국으로 잠입하였다.
달딸국왕의 가노가 되어 지내던 도중 달딸국왕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죽이려고 가두었다. 달딸국왕과 왕자들이 사냥을 나간 뒤 그는 공주에게 인정에 호소하여 달딸을 탈출하였는데 달딸 왕자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여동생을 죽여버렸다.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고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영희와 결혼하고 마침내 달딸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단재 선생은 연국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이며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는 갓으로 읽고,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어 갓쉰동은 연개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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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적국인(敵國人)의 붓으로만 전한 기록만으로 그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수 백년 사대에 찌든 노예사가들의 좁쌀만한 눈에 보이는대로 그를 혹평, 탄핵함으로써 한 시대 인물의 유체를 편육도 남김없이 씹어댔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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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극(京劇)의 주인공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당태종에 의해 임금을 시해한 역적, 김부식에 의해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사람, 함석헌 할아버지에 의해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악평을 들었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 민족의 영웅이 어떻게 폄하 되었으며 실제 연개소문은 어떤 존재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대항하여 큰 승리를 거둔 사람들은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성격도 포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격좋고 인물좋고 이름도 정확하게 잘 나온다.
왜 그럴까? 대만에서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극은 원나라 때 발생해서 명나라 때에 형태가 갖추어진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공연이 되어 경극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가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이다.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 가운데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있다는 것은 그가 중국인들에게 강한 기억을 남겨준 사람이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당태종을 거꾸러 뜨린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된 연개소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중앙일보는 대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짧게 보도한 바 있다.(이글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신문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2. 연개소문의 집안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에 대해 연못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연씨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의 잘못이다.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묘지석이 나왔다.
이 묘지석에는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이며, 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를 지낸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족보없는 괴물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이다.
(서울대 사학과의 노태돈 교수는 1999. 8월에 발간한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씨가 평양 천도이후 새로이 등장한 신흥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3.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일 것이다. 아군의 병력 손실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한칼에 쓸어버린 세계 전쟁역사상에서도 뛰어난 승전이였다. 고구려는 이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수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묻고 그 위에 승전을 기념하는 경관대탑(京觀大塔)을 세웠다.
중국인들게는 수치였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하늘에 떠있는 두개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수군사량관으로 양제의 침입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이 부분부터는 역사와 전설의 혼합)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
626년 또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다시없는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돌궐, 설연타, 아사나 등은 다시 중원을 공격했다.
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역사와 전설의 혼합 끝)
오히려 영류왕은 624년 당에 조공을 바쳤고 도교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사신들이 와서 경관대탑을 부수고 수나라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아무 대가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전국을 돌며 군사시설을 정탐했고 왕은 이를 방치했다.
젊은 조의선인들은 분노했다. 왕은 이들이 두려웠다. 그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631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여 조의선인을 징발했다. 그리고 아까운 국력을 낭비했다.
역사상 만리장성이건, 천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 국방에 도움이 된 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정체와 안일의 상징일 뿐이었다. 왕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서부대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반대했다. 왕을 옹호하던 기득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연개소문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서부대인의 자리를 허락했다.
642년 연개소문과 조의선인들은 당의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정탐하는 것의 중지, 631년 파손시킨 경관대탑의 복원과 을지문덕의 복권, 국력낭비인 천리장성의 축조 중단을 요구했다. 왕은 연개소문을 중앙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전방인 천리장성 축조 감독관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고구려는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하거나,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왕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왕들이 이런 이유로 죽거나 쫓겨났다. 고구려는 유교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 전 열병식을 열고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08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왕(보장왕)으로 옹립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을 공연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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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서 연개소문만큼 극적인 인물도 드물 것이다. 어느날 갑자가 역사의 전면에 폭풍처럼 등장해서 세계제국을 구가하던 전성기의 당나라를 격파하여 한족의 영웅 이세민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시킨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의 멸망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은 어느 왕의 본기보다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은 그렇지 못하다.
일찍이 성균관 박사이신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우리 손으로 써놓은 연개소문의 사적이 전혀 없음을 개탄하기도 하였다. 이 글은 연개소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여러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연개소문에 관해 빠진 부분인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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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개소문의 출신
연개소문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기록한 사초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맞아 대접했다는 단 한줄만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의 역사서에서 채록하여 전재한 것이다. 중국측 기록은 모두 연개소문의 적이었던 당태종 군신들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믿을 만한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서부 소속의 귀족이다.(연개소문이 서부 또는 동부 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단재 선생은 성씨인 '연(淵)'을 서부인 연나부와 연결하여 그가 서부출신일 것이라고 확정하고 있다. 북한의 손영종 교수가 쓴 '고구려사'에서도 역시 서부출신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당서 고려전에는 연개소문을 동부대인으로 구당서 고려전에는 서부대인으로 기술하였다. 자치통감에는 영주도독 장검의 표문을 인용하여 그를 동부대인으로 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개소문이 동부출신이며 집권 전에 동부대인의 직을 수행하였고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귀족세력으로 보았다.)
2. 규염객 전
당나라 때 소설인 규염객 전은 당나라 사람 장열 또는 두광정이 저자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장열은 7세기 후반 사람이며 두광정은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한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이다. 수 양제 시절 중국 태원에 와서 이정과 교분을 맺고 이정의 아내인 홍불지와 의남매가 되었다. 규염객은 중원의 제왕이 되고자 도모하였으나 당국공인 이연의 아들 세민을 보고 그 영명한 기운에 눌려 이정에게 중원의 제왕이 되기를 포기하였음을 알리고 부여국으로 돌아와 난을 일으켜 부여국왕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실존인물인 이세민, 이정, 유문정, 양소 등이 등장하는데 단재 선생은 이 규염객이 연개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중국인에게 매우 인기있는 작품으로 규염객은 중국의 보통사람들이 도가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10여년 전 중국무협영화 시리즈 물로 만들어진 것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적도 있다. 내용은 부여인 규염객이 수나라 때 태원에서 이정과 교분을 쌓고 그에게 병법을 전수하였으며, 양현감의 난 등으로 수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정과 함께 거병하여 수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이세민이 영걸이란 말을 듣고 그에게 제위를 양보하여 신선이 되고자 동방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3. 갓쉰동 전
또 다른 중국소설 갓쉰동 전은 단재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캐쉰이라 부르는데 이는 갓쉰동이란 발음과 매우 유사하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옛날에 연국혜라는 재상이 있었다. 나이 쉰에 이르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바쳐 아들을 얻었다. 이름을 갓쉰동이라 하니 '갓 쉰에 이르러 얻은 아이'란 뜻이다. 어려서부터 영명하여 연국혜가 구슬처럼 아꼈으나 7살 되던 해에 어느 도사가 지나가다가 아기가 타고난 수명이 짧아 비범한 재주를 쓰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이를 막는 방법은 15년 동안 아이를 버려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연 재상은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란 이름을 새겨넣고 멀리 원주 학성동에 갖다 버렸다.
그 마을의 장자였던 사람 유씨가 꿈에 황룡을 보고 새벽에 바깥에 나갔다가 갓쉰동을 발견하여 데려다 길렀다. 유씨는 내력을 모르는 아이라 글자만 몇자 가르쳐 종으로 썼다. 갓쉰동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기이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검술, 병법, 천문, 지리를 배웠다.
유씨에게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막내인 영희는 그의 비범함을 사랑하여 서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영희는 귀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대장부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갓쉰동은 우리를 괴롭히는 달딸국을 쳐서 없애는 것이 평화의 근본인 만큼 달딸국을 쳐부순 후에 영희와 혼인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유씨의 집을 떠나 달딸국으로 잠입하였다.
달딸국왕의 가노가 되어 지내던 도중 달딸국왕의 둘째 아들이 갓쉰동의 비범함을 알아채고 죽이려고 가두었다. 달딸국왕과 왕자들이 사냥을 나간 뒤 그는 공주에게 인정에 호소하여 달딸을 탈출하였는데 달딸 왕자가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여동생을 죽여버렸다. 고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찾고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영희와 결혼하고 마침내 달딸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웠다.
단재 선생은 연국혜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이며 연개소문의 이름 개소문에서 개(蓋)는 갓으로 읽고,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어 갓쉰동은 연개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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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적국인(敵國人)의 붓으로만 전한 기록만으로 그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 수 백년 사대에 찌든 노예사가들의 좁쌀만한 눈에 보이는대로 그를 혹평, 탄핵함으로써 한 시대 인물의 유체를 편육도 남김없이 씹어댔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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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극(京劇)의 주인공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당태종에 의해 임금을 시해한 역적, 김부식에 의해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사람, 함석헌 할아버지에 의해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악평을 들었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 민족의 영웅이 어떻게 폄하 되었으며 실제 연개소문은 어떤 존재였는지 밝히고자 한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대항하여 큰 승리를 거둔 사람들은 이름이 전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성격도 포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격좋고 인물좋고 이름도 정확하게 잘 나온다.
왜 그럴까? 대만에서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극은 원나라 때 발생해서 명나라 때에 형태가 갖추어진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 청나라 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공연이 되어 경극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가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이다.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 가운데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있다는 것은 그가 중국인들에게 강한 기억을 남겨준 사람이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당태종을 거꾸러 뜨린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깊게 각인된 연개소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 중앙일보는 대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짧게 보도한 바 있다.(이글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신문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2. 연개소문의 집안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에 대해 연못에서 나왔음으로 성을 연씨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의 잘못이다. 1923년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묘지석이 나왔다.
이 묘지석에는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이며, 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를 지낸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족보없는 괴물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이다.
(서울대 사학과의 노태돈 교수는 1999. 8월에 발간한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씨가 평양 천도이후 새로이 등장한 신흥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3.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인 까닭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일 것이다. 아군의 병력 손실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한칼에 쓸어버린 세계 전쟁역사상에서도 뛰어난 승전이였다. 고구려는 이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수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묻고 그 위에 승전을 기념하는 경관대탑(京觀大塔)을 세웠다.
중국인들게는 수치였을 것이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족들에게 고구려는 하늘에 떠있는 두개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당태종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고구려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했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중원은 혼란기였다. 수양제의 살수패전이후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민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 설연타, 고창, 고막해, 아사나 등 여러 민족들이 일제히 중원을 공략하여 당왕조는 이들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고구려도 이때 중원을 공격하자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618년 안타깝게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수군사량관으로 양제의 침입때 패수에서 내호아와 주법상이 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을 한번 싸움으로 격파하여 물리친 태자 건무였다.
(이 부분부터는 역사와 전설의 혼합)
이때 을지문덕을 비롯한 주전파들은 영류왕에게 강력히 중원공격을 요청했으나 영류왕은 평양 석다산의 평민출신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받고 있는 을지문덕을 경계하여 천금같은 기회를 방치했다. 젊은 무장들의 분노는 높았고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웠던 조의선인들은 영류왕에 대한 분노로 왕을 비난했다.
626년 또다시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은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다시없는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때를 틈타 돌궐, 설연타, 아사나 등은 다시 중원을 공격했다.
젊은 연개소문이 주동이 된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중원이 통일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았고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중원의 분열공작을 계속해 평화를 누렸었다. 통일된 중원을 고구려는 위험하게 생각했다.
왕은 이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동맹국이던 돌궐, 고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 등이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했고 마침내 고구려는 당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이민족들의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역사와 전설의 혼합 끝)
오히려 영류왕은 624년 당에 조공을 바쳤고 도교를 수입하였으며 당의 사신들이 와서 경관대탑을 부수고 수나라 포로의 송환을 요구하자 아무 대가없이 그대로 시행했다.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 전국을 돌며 군사시설을 정탐했고 왕은 이를 방치했다.
젊은 조의선인들은 분노했다. 왕은 이들이 두려웠다. 그는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631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도록 하여 조의선인을 징발했다. 그리고 아까운 국력을 낭비했다.
역사상 만리장성이건, 천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 국방에 도움이 된 장성은 없었다. 그것은 정체와 안일의 상징일 뿐이었다. 왕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서부대인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반대했다. 왕을 옹호하던 기득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연개소문 가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서부대인의 자리를 허락했다.
642년 연개소문과 조의선인들은 당의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정탐하는 것의 중지, 631년 파손시킨 경관대탑의 복원과 을지문덕의 복권, 국력낭비인 천리장성의 축조 중단을 요구했다. 왕은 연개소문을 중앙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전방인 천리장성 축조 감독관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고구려는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하거나,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왕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왕들이 이런 이유로 죽거나 쫓겨났다. 고구려는 유교국가가 아닌 것이다. 그는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 전 열병식을 열고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08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장을 왕(보장왕)으로 옹립했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을 공연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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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淵)씨의 유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나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외경하여,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고 있음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민족의 설화와 신화에 널리 보이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그의 이름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하고 있다. ▲
▶ 집권과정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고 한다. 동부(또는 서부라고도 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자,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영류왕 25)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초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으므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에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
▶ 대외관계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 대외정책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히 결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이다.
그리고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종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 경직된 정책술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서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된 면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이 수반되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하며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하였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하였던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장수를 기용하여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나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외경하여,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고 있음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민족의 설화와 신화에 널리 보이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그의 이름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하고 있다. ▲
▶ 집권과정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고 한다. 동부(또는 서부라고도 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자,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영류왕 25)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초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으므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에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
▶ 대외관계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 대외정책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히 결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이다.
그리고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종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 경직된 정책술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서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된 면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이 수반되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하며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하였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하였던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장수를 기용하여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출처 : 연개소문 이야기
글쓴이 : 다도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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