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교과서는 철저하게 중국식으로써 객관성이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 강단사학계는 개혁해야만 한다.
이제 100년이 되어가는 이 싯점에서 뒤늦게나마, 이조시대에 대한 무조건 찬양,우상화의 무뇌아적 개념으로 운영되고있는 대한민국 강단사학계는 학문을 연구적인 곳이 아니라 세습적인 곳에 불과함으로, 하루빨리 개혁하여 바른 역사의식에서 국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바른 학문의 요람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정부에 강력히 주장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모든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국사책내용은 이를테면, 중국작가들이 쓴 3류 소설책을 수입하여 전국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내용으로써 실재내용은 30%뿐이며 나머지 70%는 허구 임을 다시한번 분명하게 선언 합니다.
구려(고구려)-돌궐(몽고)-발해(거란,요)-신라(백제)-여진(금)-청
같은 민족
원제국시대 초기에 고려에 주둔시켰던 몽고군대의 총사령관은 고려 장수이었고 원나라 말기 실권자였던 원제국 황후는 고려여인이었던 점,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은 몽고족과 고려족이 같은 동족이 아니고서는 설명될수 없는 전통풍습의 증거입니다. 후고구려인 려진이 결국, 중국 정복의 대업을 이루고 세운 청제국 시대때 원세개(=위안스카이=고려양평출신,팔기군 3상귀족가문=마지막 청황제로서 진인들에 의해 암살되고 가족은 몰살되고 불태워짐)는 이조를 관리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사람은 조선말을 잘하여 통역관이 필요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고려말 최영장군의 중국,명나라 정벌군(이성계일파의 반역 회군으로 무산됨) 10만군 출병은,당시 원제국(몽고)의 실권자였던 원 황후(기황후),고려강씨의 명국 정벌군 요청에 의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은폐된 사실,이에 대하여 명나라와 전주이씨세력간의 사전 연락과 계획적,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위화도반역과 성공에 따른 원제국과 고려제국의 동시멸망 이후,
이조정권의 한민족 말살 정책인 고려양민 20만 대량학살 및 역사조작으로 이루어진 이조 500년 역사...이러한 이조의 건국과정은 근본적으로 한민족과 쥐나족의 민족 지배체체의 문제였슴에도 오늘날 한국국사에서는 이러한 실질적 사실기록은 하지않고 단순히 친원파,친명파의 문제로 은폐 왜곡하여 기록한채 가르치고 있는 바, 고려의 멸망과 이씨조선의 개국은 한민족역사에 있어서 칸(한)민족과 진족과의 민족지배 문제였다는 역사적사실을 은폐,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본인은 학자의 양심으로 고백 합니다.
(이조500년은 도데체 한민족(역사)이란 개념은 없고, 단 500년뿐인 이조역사만이 우리의 역사의 전부인양 태종태세문단세....하며 무조건 외우게 하는식의 대한민국 국사교육은 비정상적인 역사교육방식으로써 세계에 이런식으로 역사교육을 하는 나라는 이시조선 계승국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 비 상식적인 역사왜곡의 교육방식이라는 사실을 본인은 피눈물로 강조합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그릇된 역사교육방식임을 분명히 합니다.
고려 후손 청나라(태종)의 이조에 대한 역사 응징
" 삼전도 예의 "
금(청제국=여진족=려진족)나라 초기(이조초기)에 고구려지역의 유민들은 명나라와 이조에 반하여 금나라를 개국하였지만 지도자인 누러하치는 본래 고려사람으로 형제의나라(형제지국)로써 신의를 지키려 노력하였으나 이조는 후고려를 멸망시킨 후 쥐나국(명)을 어버이로 받들고 유교를 국교로하여 신앙화 할뿐아니라,같은 형제지간인 자신들을 중국인들과 같이 오랑케라 욕하여 부르고, 천대,적대시하자 청태종은 결국, 이를 응징코저 칸 자신이 직접 원정하기에 이르렀다.
청태종은 대장군 용골대(개성출신)를 이조정벌군사령관으로 하여 2만의 기병으로 원정하였는데, 이조는 이에대해 사전에 협의대로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나 명국이 지원할수없슴을 통보하자,인조는 즉시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가, 청군의 총공격 전날밤 지금의 서울 송파 삼전동에서 용골대 휘하 만유주처에게 사로잡힌다(당시 맨발의 상태로써 주변에 궁인 몇명만 있었다고 기록됨)
청태종은 인조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게 한후, 이조개국과 관련하여 이성계의 위화도반역을 꾸짖는 부분이 있다.
청태종이 이조 왕에게 "삼전도의 예"를 갖추게 한 후 말하기를 "내가 직접온 이유는 너희 조상놈들이 떼놈나라와 내통하여 위화도에서 역모를 일으켜 고려의 수많은 충신,현자들을 대살륙하고 백두백성을 떼놈들에게 팔아 떼놈들의 속방국으로 만든 대반역의 죄를 벌하고저 함이다! 내 이자리에서 너는 물론, 9족을 멸할뿐아니라, 네 조상의 묘를 모두 부관참시토록 엄명을 내려야 하나, 오늘 이자리에서 네가 우리 백두제국 청나라에 귀의하는 맹세를 한 바, 이제 본래의 우리 한의백성으로 돌아와 따로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도다"
- 청연사 삼전도 -
청태종의 이조 친정 이후, 군신관계로 복속시키되 전통에 따라 정권은 유지시켰던 역사적 사실, 그러나 전주이씨 정권은 한민족정권으로 인정하지 않아 황실간 교류는 하지 않았으나,몽고에 대해서는 려몽때와 같이 형제국을 유지하면서 황실간에 공주를 교류시켜 서로 황후를 간택 함.
이들은 후일 중국을 정복한 후, 같은 민족인 몽고에 대해서는 형제의예를 갖추기를 명하고,몽고가 칸으로 받아들이자 민족전통의례에 따라 몽고황실의 공주를 데려다 칸비(황 후)로 삼았던 한민족 전통을 지킨점등, 이러한 사실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수없습니다.
(청제국이 한민족 전통인 칸비간택을 몽고에는 하고,이조에 하지 않은 이유 는 위만조선과 같이 이조가 중국인 정권이었기 때문이었으나,백성은 같은 민족이라하여 백두산 출입은 허용하였고, 중국인들은 더럽다하여 일체 출입시키지 않았슴:청연사기록, 거대한 세계최대의 비석 칸비(광개토 호태왕비) 에 보호건물을 세워 보호했던 점 청제국이 진족(중공)에 의해 멸망하면서 불태워졌다가 최근 중공이 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하면서 다시지음)
위와같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만주족,몽고족은 우리와같은 민족임이 분명하고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들을 형제국이라고 불러온 바, 형제라면, 형제란 뜻이 아닙니까? 형제라면.... 그 아버지는 도데체 누구란 말입니까?
한민족은 수천년전부터 최고지도자를 칸(한 干,汗)이라고 불러왔읍니다.
고구려시대때 고구려 황제를 한 汗(칸)이라고 불렀고, 신라도 칸(마립干)이라고 불렀으며 돌궐이 세계를 정복하고 세운 원나라 의 왕을 칸이라고 했으며, 려진이었던 금나라가 세계를 정복하고 세웠던 청황제역시 "칸"이라고 불렀던 이러한 명백한 역사적사실들은 이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언어적 공동증거가 아닐수 없습니다.
중국 漢은 우리 최고의 단어인 "한" 이란 말로 부를수 없는데 중국을 섬기는 정권인 이조들어 지금의 미국을 아름다울 미자로 부르듯이 사대주의 정신 에서 붙여주었던것이 이렇게 쓰이게 된것이므로 버려야 할 폐습입니다. (일본은 미국사람들의 얼굴이 쌀처럼 희다하여 쌀미자를 씀)
쥐나=china족이라고 중국을 호칭해야 바른 말이고, 중국이란 말은 이전에는 없었던말인바, 중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나라는 중국을 어버이나라로 받들고, 중국인 공자를 지금의 기독교 예수그리스도 믿드시 신앙화하던 이조이후 현재의 대한민국 우리나라가 시작입니다.
우리민족의 흐름을 다시 정리하자면, 최초의 국가 주신(쥬신=조선=고조선=한4군= 4조선(하나로써 은조선,기자조선,위만 조선,왜 까지 포함))=구려(=고구려=돌궐)=발해(=신라)=후구려(고려=몽고=한4국) =구련(거란,요)=금(려진)=청= 남북한으로 이어집니다. (은나라는 주신의 범주로써, 한민족의 병방국가였슴,그러나 기자와 위만조선역시 우리와 같은 족속으로 보아야 하나 중국 전주이씨의 조선은 여러모로 한민족정권으로 보기 어려운점이 있슴)
한(=단=칸) 은, 큰, 지도자,호태왕(황제)의 뜻으로써 고조선시대부터 써온 순 우리말 호칭 입니다.
고조선의 본래땅은 몽고,북중국,만주,러시아,반도(왜)로써 지금의 중국보다 더 컸슴 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된것으로 진나라때는 지금의 3분의1이 안되었슴) 주신의 후손인 구려, 발해,고려,돌궐,금의 국시는 원토회복이었고, 중국정복은불가피했습니다.동북아 패권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영토회복의 뜻이었던 것 입니다.
중국땅은 원래 우리 땅 !!
겁 많은 자들의 '행위예술' 에 불과한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그곳이 원래 '남의 땅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주신(고조선)제국 이후,
1000 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만들어진 중국 최초의 국가 진(China=쥐나), 이 쥐나가 가장먼저 한 일이 성벽쌓기였는데, 이들이 왜 성벽을 부랴부랴 만들었겠습니까? 진시왕이 세계적인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 이유는 남의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다스리던 원래 제국의 강력한 공격을 잘 방어하기위해 수많은 희생자를 무릅쓰고 공사를 강행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어용
당시 진인들이 만들었던 진장성(만리장성의 원래이름)은 지금의 3분의1이 안되었습니다. 왜? 왜 그때 지은 성이 지금 만리장성의 3분의 1밖에 안되었겠습니까? 성을 쌓을 돌이 없어서요? 성을 쌓을 사람들이 없어서요? 그게 아니라, 그때 자기들 땅은 거기밖에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 넘어 자신들의 최초국가를 불안하게 했던 원래 주인이었던 강력한 사람들의 제국...그들이 누구였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당신이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칸(한)민족, 바로 당신들의 선조들이었읍니다.
지금, 중원대륙을 마치 원래 자기네 땅이라고 뻔뻔스럽게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바, 주신의 유적인 북중국에 거대한 피라밋들을 자연히 생긴산이니...홍산문명의 주신(고조선)은 신화이니...고구려는 말족(말갈족)역사로써 한국인 조상이 아니라 중국역사이니... 하는 말도안되는 생떼거지 거짖과 조작을 일삼고 있는 바, 저 화하(쥐나)족들은 주신제국이후 천년이 지나서야 지금의 대만 건너편에 대만만한 조그만 나라를 시작으로 주신의 지방정권으로 존재하면서 번식하였고 이후 송나라를 세우면서부터 시작한 4천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것이 쥐나의 진실한 역사입니다.
5천년전부터 우리선조님들이 통치하던 중원땅이었슴이 역사적으로 명백한데, 고려후손인 청조를 멸망시키고 쥐나족들이 지금,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현실이라하여, 마치 원래 자기땅인양 역사를 마구조작하고 있는 행위는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어리섞은 행위로써 부질없는 짖임을 역사의 경험으로 충고합니다.
진시황이 천년 만년살기를 원했으나 그렇지 못했드시, 현재의 중국위정자들 또한 현재의 중국이 천년 만년 가기를 바라는 욕심은 이해하나 그러한 욕심과 추구(동북공정)는 결국, 허황된것임을 지난 수천년의 역사가 말해주고있는 바, 중국 일본의 위정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은폐중인 북중국의 거대한 피라미드군
세계최고,최대의 주 신 문화유적
" 1963년4월에 우리 고적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그림,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절구,솥,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 당시 발굴요원이었던 故 장문구(張汶邱 )씨의 임종 전 증언 내용-
중국 당국은 그토록 은폐해왔던 북중국 피라미드가 서구의 고고학계를 통해 알려진 이후에 과거 주은래총리가 반대한 동북공정을 더욱, 대대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한 중 역사학자들 모두가 알고있는 공공연한 사항이다.
출처 : 한민족에 대한 역사적 사실(2)
글쓴이 : 금강초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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