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한제국(桓帝國)에서 퍼져나갔다.
1) 중국이 제작한 역법은 없다.
하나라 중강 때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희씨와 화씨가 술에 빠져 직분을 수행하지 않자, 계절과 절기가 어지러워졌음으로 중강은 이들을 토벌하였다.
서경과 사기에 나오는 날조기사다. 무자 5년(B.C. 2133년) 하나라 사람이 상국 조선에서 신서(역서)를 구해갔다. 단군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하나라 중강 때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희씨와 화씨가 술에 빠져 직분을 수행하지 않자, 계절과 절기가 어지러워졌음으로 중강은 이들을 토벌하였다.
서경과 사기에 나오는 날조기사다. 무자 5년(B.C. 2133년) 하나라 사람이 상국 조선에서 신서(역서)를 구해갔다. 단군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역법은 한 번 제작하면 쭉 사용하기 때문에 고작 몇 년, 몇 십 년 천문관측 안한다고 해서 계절과 절기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하나라는 요, 순 시대에 사용하던 우리나라 역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조선이 역법을 바꾸자, 하나라도 역시 조선의 새 역법을 채용했다. 중토는 천문관측하지 않았다. 천문관이 술에 빠져 직분을 수행하지 않은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건 눈치챘을 것이다.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의 책력을 만드시고 ......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마한세가)
기원전 2700년경 기사다. 기원전 3500년경에도 중토는 우리나라의 역법을 사용했다. 배달의 5세 태우의 한웅의 막내아들 복희가 배달의 우사 직책에 있으면서 만든 한역을 중토에 가져갔던 것이다. 서량지도 중국사전사화에서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고 했다. 역법의 창시자가 우리나라인 것은 맞는데, 중국은 단 한 번도 역법 제작한 적 없다. 중국은 천문관측조차 한 적 없다.
복희가 만든 한역은 우리나라의 첫 역법이 아니었다.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를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태백일사 신시본기) 한역 이전에 계해를 사용하고 있었다. 계해 전에는 배달 개천 직후 신지가 육계가 제정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역법 사용 시기는 녹도문을 만든 직후다. (그러나 한국 시대에도 역법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역법은 천문관측해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천문관측했다.
“을축 4년(B.C. 2096)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다.”(단군세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건 60갑자지, 책력이 아니다. 복희가 한역을 만들었지만, 갑자라 했지, 60갑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임자 12년(B.C. 2229)에도 신지 귀기가 칠회력을 만들었다.(단군세기)
배달과 조선은 자신들보다 문화와 기술력이 떨어지는 종족들을 정복했으므로 한대륙을 간단히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 배달과 조선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대제국 고구려, 백제는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도 이어받았다. 대제국 고구려, 백제가 식민지 중국의 낙후한 천문기술로 제작할 역서를 얻어가는 건 명 때 와서야 종이 위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554년 백제인 역박사 고덕 왕보손이 열도로 건너가 역법을 가르치고, 602년에는 관륵이 건너가 천문과 역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온 나라이므로 당연히 고구려는 역법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법 제작은 고구려 건국 당시에 이미 4천년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명은 624년, ‘천하고 작은 생선’ 당이 고구려에서 역서를 얻어간 것을 두고 고구려가 얻었다고 왜곡했다.(자치통감) 고구려는 조선, 대부여, 북부여로 이어지는 나라를 계승한 나라다. 절대 자신의 식민지에서 역서를 구하지 않는다. 이 당시 고구려는 한대륙의 천자국이었다.
후주서와 수서에는 동쪽(양자강 이남에도 백제 영토가 있었다.)에 있는 백제에서 원가력을 채택했고, 인월(寅月, 음력 정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원가력을 사용한 것은 백제가 만든 역법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525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음력 정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그래서 기원전 525년 8월과 기원전 423년 2월의 일식은 달까지 일치한다. 백제는 역박사까지 두고, 열도에 역법까지 가르쳐준 나라다. 원가력을 445년 송에서 채택한 것은 송이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속국이던 송은 고구려 침공시 지원하라는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의 속국이 되기를 열망한 나라다.
674년 당이 역술을 배워간 것을 두고 신라가 배워왔다고 왜곡한 것도 김부식이 아니라 명이다. 역술만 배운다고 달력을 만들 수 있는가. 천문관측 기술을 배워서 티벳고원 북부의 계절의 변화를 알아야 역법을 만들 수 있다. 결국 674년 당은 신라에서 역술 외에 천문도 함께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역법을 제작할 수도 없었던 게 일식기록부터 우리나라 기록을 모조리 베꼈다. 나머지 역사기록까지 빠짐없이 베낀 미개 소국이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천문관측하지 못하고 달력을 만들지 못한 것은 일본이나 중국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유목민 ‘천하고 작은 생선’ 선비족 당에 무슨 역서가 있을 것인가. 육계를 만든 지도 4500년이 넘었고, 중국이 대대로 배달과 조선에서 역법을 구해갔는데, 천문강국 신라가 뭐하러 당에서 역술을 배울 것인가. 신라도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역법을 만들어 사용한 나라다.
세계 최고의 천문관측 기술을 보유하고서도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선명력과 수시력, 대통력을 사용했다고 날조당하고 있다. 그러나 선명력을 만든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가 고구려, 대진국, 고려가 만든 역법들을 줄줄이 중국의 것이라 우기고 있다. 우리나라가 만든 역법을 우리나라가 빌려다 썼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명력을 당이 만들었으니까, 신라도 당연히 빌려다 썼다고 우긴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던 고려의 속민 숙여진이 세운 금한이 대명력을 만들 수 있는가. 대명력 또한 우리나라가 만든 역법이다.
장안은 몽고간섭기에도 여전히 고려의 황성 개경이었다. 수시력은 고려의 역법이다. 몽한은 동유럽까지 정복하고도 고비사막과 오르도스사막을 벗삼아 뜻밖에 얻은 고려 땅에서 살기를 원했다. 고려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고려에 지배당하며 살았다. 고려의 어시책도 가져가서 과거시험 참고서로 썼다. 그걸 요즘에 와서는 중국이 맨 처음 금속활자를 발명했노라고 우기고.
주원장은 양자강 이남을 차지한 후 고려의 수시력을 이름만 바꿔 대통력이라 불렀다. 방법이야 어쨌든 천자가 되었으니, 역법을 만들긴 해야 했는데, 능력은 없고 해결책으로 기존의 역법을 이름만 바꾼 것이다. 1370년이 아니라, 주원장이 죽기 직전에 날조했다.
명이 어째서 역법을 새로 만들지 않고 수시력을 이름만 바꿔 부를 수밖에 없었나. 이성계가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천문관을 대부분 데려가 버린 것이다. 천문관이라고 남겨놓은 사람들은 신참이거나 무능한 인물이라서 새로 역법을 만들 수가 없었다.
고려의 수시력과 똑같은 대통력을 과연 수입했다고? 대통력을 만들었다고 날조할 당시 주원장은 티벳고원 북부에서 장사성 등과 중토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도적 떼를 동원하여 싸우고 있었다. 대통력을 수입한 것은 예맥족의 나라 이씨조선이다. 주원장이 천자 행세를 하기 위해 필요 없는 역법을 하사했던 것이다.
이도 때 수시력을 개선해서 칠정산내편이라는 서울을 관측 지점으로 하는 ‘자주적인‘ 역법을 만들었다고들 얘기한다. 중국 대륙을 포기한 이씨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관측지점을 바꾸어야 했다.
조선시대 천문관측의 철저함을 볼 수 있는 한 예는 선조 때 천강(天江, 뱀주인자리의 일부)에 나타난 객성을 관측한 기록이다. 조선실록에 7개월에 걸쳐(1604. 10.13∼1605. 4.23) 총 130개(18회는 관측 못함)의 관측기록이 실려 있는 이 초신성은 서양에서 케플러 초신성으로 알려져 있다. 초신성의 밝기를 목성·금성·화성·심대성(心大星, 전갈자리 α별) 등과 비교하여 변화를 기술하고, 위치와 색깔을 기록하였다.(인간과 우주, 1997)
이씨조선이 천문관측한 이유는 이성계와 그 후손들이 예맥족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한이 맺혔거나 우리민족인 척 하느라 천문관측에 매달린 것이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 역법을 사용한 것은 시헌력이 처음이다. 샬 폰 벨(탕약망)이 만든 시헌력을 사용함으로써 중국은 제 스스로 만든 역법이 단 하나도 없다.
2) 일본 최초의 천문도 및 달력은 조선통신사가 만들었다.
배달시대부터 4천년이 넘도록 축적된 고도의 천문관측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태백월범, 태백주현을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고대 우리나라의 천문학 수준은 단순관측에 그치지 않고, 예보의 수준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신라 애장왕 2년(801), “일식이 있어야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식예보가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식예보는 이미 우리 선조들이 일식발생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이 천문관측한 이유가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이라는 주장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우리민족이 농경민족이다 보니까 절기를 알아야 했고, 시각과 방위를 중시했기 때문에 천문관측한 것이다. 그리고 천손민족이라는 자부심에서 천문관측한 것이다.
“팔금법에 상해자는 곡물로 배상한다는 조항에서 조선이 농경사회임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배달 개천 당시부터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 주곡을 두었던 농경사회였다. 다른 나라들에 앞서 농경을 한 만큼 스스로 절기를 파악해야 했고 자연히 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4300년 전에도 후직이 조선에서 곡식과 과일의 종자를 가져가 미개 토착민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야 했을 정도다. 원래 중토는 농사가 안되는 땅이다. 결국 유목생활을 한 것이다. 중국이 천문관측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중앙부인 북극 주변은 이씨조선 초의 하늘이고, 주변부는 1세기 고구려의 하늘을 그린, 관측 연대상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오래된 전천성도다. 첫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는 기토라 고분의 벽화로 기원전 65년경의 전천성도다. 북위 38.4°의 한반도 천문대에서 관측한 우리나라 천문도를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이 복제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가 파괴되고 남아 있는 인본(인쇄본)을 바탕으로 1395년에 돌에 새겨 제작한 천문도다. 별들을 실제 밝기에 정비례하는 크기로 표시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 34.3°는 고구려 평양성의 위도고, 중앙부의 관측자 위도 38°는 원래 38.4°로 한반도 천문대 위치의 오차다. 한반도는 백제 영토였다. 이씨조선이 한반도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날조하기 위해 고구려 천문도에 중앙부만 한반도의 별자리를 바꿔 그려 넣었던 것이다.
천문도의 외곽원은 도면 안의 별을 모두 포함하기 위해 약간 크게 그린 듯하다. 외곽원이 출몰성들의 경계라면 외곽원 바로 안쪽에까지 많은 별들이 걸쳐 있어야 하나, 실제로는 외곽선 근처에는 별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외곽선보다는 외곽선 안쪽에서 실제로 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곳을 사용하는 것이 관측자의 위도를 더 충실하게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곳을 사용하면 관측자의 위도는 약 40°이어서 바로 고구려 강역의 위도가 되는데, 이는 주극원 바깥 부분의 별자리들이 원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부합되고, 原圖가 고구려에서 만든 천문도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만약 원도가 수도의 위도가 33°~ 34°인 한이나 당의 천문도라면 별들을 더 남쪽(바깥쪽)으로 내려 그렸을 것이다.(http://astro.snu.ac.kr/%7Ecbp/General/Refer/Hangul/chun.hwp, 천상열차분여지도의 별그림 분석)
40°라는 해석은 현평양의 위도를 염두에 둔 기술이다. 한나라의 최적 일식관측지는 발해만이다. 수도가 아니라 위도 40°인 현북경에서 천문관측했다고 나온다. 백제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후한이 현낙양에서 천문관측할 수도 없는 게 후한 존속 당시 우리나라가 현낙양에서 쭉 천문관측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잉글랜드의 루퍼스가 618년에 선 ‘천하고 작은 생선’ 당에서 보낸 천문도가 원본이라고 억측을 한 뒤로 중노는 당왕의 하사품이라 왜곡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대부분이 5천년을 지배해온 최절정의 미개 식민종족 중노의 것을 모방했다고 왜곡, 날조당하고 있는 것이다.
1세기에 당은 없었다! 신과 후한이었다는 것도 모르나. 한나라는 타림분지에서 남하한 남흉노에게 공물을 바치다가 거덜 난 나라고(공주도 바쳤다.), 수는 신라편에 붙어 고구려와 싸우다가 망한 나라다. 수문왕도 돌궐에게 제 딸을 주었다. 어차피 선비족도 돌궐과 막상막하의 미개 수준이었다. 당만 해도 안사의 난 이후 나라가 해체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고구려에 잘 보이고자 자진해서 고구려인을 황제로 받든 나라가 중국(북연)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극소수의 고구려인이 신라를 피해 당으로 가서 중토의 지배층으로 부상하여 중국문물을 이끌고 갔다. 고구려인 대부분은 신라로 귀속되거나 대진국의 주민이 되었다.
순우천문도조차 중노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일식기록조차 우리나라 기록을 줄줄이 베낀 나라가 어떻게 천문도를 만든단 말인가. 고려의 천문도를 명이 송의 천문도로 날조한 것이다.
중국은 대진국의 주민 극소수가 말갈이라 말갈의 나라도 아니고 중노의 나라라고 우긴다. 그러나 말갈은 대진국의 오지 채달목분지에 살았던 종족이다. 채달목분지가 고구려, 대진국, 고려 시대 내내 예맥족의 거주지였다.
대진국인의 절대다수가 고구려인이었다. 대진국이 피지배층의 나라라는 해괴한 소리는 로마도 게르만인, 갈리아인. 아프리카인, 그리이스인의 나라라는 소리보다 더 심한 말이다. 로마는 고작 수천 명으로 시작한 나라다. 그것도 남자뿐이어서 건국 당대에 이민족 여자의 유전자를 절반이나 섞어야 했다. 말갈족이 대진국의 피지배층이라고 하지만, 고구려 때부터 쭉 그래왔다. 우리나라는 말갈과 섞여 살지 않았다. 말갈이 우리나라 한쪽 귀퉁이에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진국이 멸망하자,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이 중토에 들어가서 옷조차 걸치지 못한 미개 화하족을 거두어 농사짓는 법부터 가르쳐주었다. 자오지 한웅이 중토를 정복한 이래 우리민족이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한나라까지 세웠다. 태호와 신농의 나라도 우리나라다. 태호와 신농은 우리민족이고, 봉토로 중토를 받았다.
거란도, 예맥족도, 흉노, 돌궐도 중토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 선비는 중토 전부를 차지한 수, 당을 세웠다. 몽고는 중토를 한 지방으로 전락시켰다. 피지배종족의 나라. 그것은 중노가 명 이후 오늘날까지 우기고 있는 중국사의 실상이다.
본의 아니게 메국과 유럽 문명의 바탕을 일궈준 사람이 고구려인이다. 20세에 장군이 된 고선지는 신라에 의해 요서로 이송된 고구려인이다. 어쩌다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에 유럽에 종이가 전파되었던 것이다. 751년 탈라스 전투는 파미르 고원 너머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졌다. 고선지의 부친이 신라에 의해 강제이주당했으나, 요서에서 대진국이 건국하자, 대진국의 장군이 되었다.
한제국사를 바탕으로 중노사를 날조했지만, 한제국사는 날조 중노사보다 훨씬 위대하다. 중노는 한제국사를 날조해 중노사로 둔갑시키면서 연대를 다 끌어내리고, 조각냈다. 한제국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동아시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구려가 없었다면, 오늘날 날조 중국문명에 감격한 루퍼스가 ‘천하고 작은 생선’ 당에서 보낸 천문도라 왜곡할 수도 없었다. 고선지의 패배에 대한 비난으로 점철된 중국측 자료? 그것조차 대진국의 사료를 중노가 날조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는 “중국의 발명품으로 남조선에서 발견됐다”고 왜곡하고,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중노 것이라 날조(금강반야바라밀경도 중국이 아니라, 대진국이 만든 거다. 어시책은 고려의 작품이다.)하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천문대가 되기에는 평지에 세워지고 너무 작다는 거다. 우리나라 천문대는 모두 평지에 세워졌고 첨성대보다 작다. 망원경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육안으로 5800년 동안 천문관측했다. 그런데도 서양(중노는 천문관측하지 않았다.)이 따라올 수 없을 만치 정확하고 많은 관측을 했다. 로웰은 사막에다 해발 2210m의 천문대를 세우고도 화성에서 운하를 봤다고 주장하며 그림까지 열성적으로 그렸다.>는 종교재단이나 상징물로 둔갑하고 있다.
한글을 두고 “중국어와 결합시켜 28자의 자모를 제정했다”고 날조하고 “한자 음운을 참고하여 표음문자인 언문을 창제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표의문자(그림문자)를 모방해 표음문자를 만들 수 있는가. 중노어는 말뿐이다. 화하는 단 한 번도 문자를 개발한 적이 없는 미개 종족이다.
한자조차 우리민족이 만들었다. 한자의 원형 갑골문이 발견된 황하 하류는 삼국의 최적 일식관측지로도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땅이다. 은나라가 황하 하류에 있었으면, 주나라도 황하 하류에 있었고, 춘추전국의 소국들도, 진나라, 한나라도 황하 하류에 있어야 한다. 그 경우 삼국이 중국 대륙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가. 은나라가 갑골문자를 사용했는지 알아보려면 티벳고원 북부를 발굴해야 한다.
왜(倭)에 천문학과 역법을 가르쳐준 관륵과 왕보손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백제인이다. 이게 더 중요한데, 그렇게 가르쳐줘도 왜노는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더욱 중요한 건 일본에 우리나라가 천문을 가르쳐준 것은 밝혀진 것만 네 번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일본은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잉글랜드의 스티븐슨은 우리나라 천문관측 역사를 자그마치 5천년이나 깎아내리고, 고려부터 시작됐다면서 기원전부터 2천년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우리나라의 오로라 기록도 부정하고 일본 최초의 오로라 기록은 620년이라 우긴다. 왜의 일식기록도 628년부터 나온다. 그나마 16세기까지는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껴 가짜 일식기록과 섞은 것이다. 17세기부터는 조선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식관측을 해주었다. 당연히 오로라 기록도 우리나라 것을 베꼈다.
백제인 관륵이 602년에 왜(倭)에 건너가 천문, 역법을 가르치고, 역박사 고덕 왕보손이 554년 왜(倭)로 건너가 역법을 가르쳤는데, “삼국이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이 자국에서는 독자 천문관측을 안하고 식민지 왜(倭)에 건너가서 독자관측을 하라고 가르쳐주었단 말인가. 일본은 백제인 관륵을 왜노 천문학의 비조로 떠받들고 있다.
일본은 628년부터 1599년까지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다. 고려의 속국인 탓에 1189년에서 1326년까지는 고려 천문관이 건너가 천문을 가르쳐주었건만 배우지 못해서 직접 천문관측해 주어야 했다. 1600년 이후에는? 조선통신사가 관측해주었다. 베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가짜 일식을 40~50%나 만들어냈다. 어째서 이런 미개 일본의 최초 천문도도 우리나라 식민종족 화하가 보내준 하사품이라 우기지 않는가?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그렸다는 천문분야지도에는 종대부라는 한반도 고유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와 백제 별자리를 합성한 이씨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본 따서 그렸다. 이름까지 땄다. 천상열차지도(1670년), 천문분야지도(1676년)와정향력(1684년)은 이씨조선이 일본에 한창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고 있었을 때 만들었다. 이씨조선의 선비 나산 박안기로부터 역법을 배운 오카노이 겐테이에게서 배워 만든 거라고 한다. 554년 왕보손에게 배운 것을 필두로 관륵, 고려 천문관이 가르쳐줘도 배우지 못하다가 천여 년이 지나 박안기에게서 네 번째로 배워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제작시기가 이씨조선의 천문관이 일본의 일식관측까지 해주고 있을 때라는 사실이다.
달력이 뭔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1년을 적당히 나눈 것이다. 천문관측(태양관측)만 할 줄 알면 계절의 변화는 알게 되니까, 달력은 자연히 만들 수 있다. 602년부터 천문관측해온 나라라니까 정향력을 만들기 천여 년 전에 달력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나라도 배달 개천 당시부터 스스로 깨우쳐 역법을 만들었다.
“육계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이다.”(태백일사 신시본기) 천문관측 기술을 배울 때나 역법을 배우는 거다. 일본의 경우 왕보손이 역법을 가르쳐준 554년에 천문도 배웠을 것이고, 당연히 제 스스로 역법을 만들어야 했다. 태양관측하면 낮과 하루의 길이도 알게 되니까, 역법만이 아니라, 시계도 만들어야 한다. 기원전부터 천문관측한 신라는 역법을 스스로 깨우쳤지, 당에 가서 배워오지 않았다. 674년 당이 신라에 가서 역술을 배웠다는 사실은 이전까지 중노가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노 역시 그렇게 배우고도 천문관측도 못했고, 역법도 제작하지 못했다.
천상열차지도(1670년), 천문분야지도(1676년), 정향력(1684년)을 일본 스스로 만들었다면, 천문날조도 다른 역사날조와 같은 18세기에 벌써 했다. 그 당시에는 이씨조선의 영토가 만주 대부분일 때라, 일본이 만주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을 베끼지 않는다. 만주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을 훔쳤다는 것은 이씨조선이 한반도로 축소된 1824년 이후에 일본의 천문기록이라는 것을 날조해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천상열차지도(1670년), 천문분야지도(1676년)는 일본 최초의 천문도가 아니고, 정향력은 일본 최초의 달력이 아니다. 이씨조선의 천문관이 일본의 일식관측까지 해주는 상황에서 왜노가 천문도와 역법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씨조선의 천문관이 일본에서 천문관측도 해주고, 천문도와 달력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천문도나, 일본의 달력이라는 것은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554년 왕보손에게 배운 것을 필두로 관륵, 고려 천문관이 가르쳐줘도 배우지 못하다가 천여 년이 지나 박안기 등에게서 네 번째로 배웠지만, 일본은 천문도나, 달력을 끝내 만들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천문관측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민족은 천손민족이라는 높은 긍지로 천문관측했다. 그러나 왕보손에 이어 관륵이 천문을 가르쳐주고, 고려 천문관에 이어 이씨조선 천문관이 천문을 가르쳐주려다가 배우지 못하자 직접 천문관측해준 것처럼, 674년 신라가 당에 역술을 가르쳐준 것처럼 우리나라는 주변국들에게 천문관측 기술을 비롯해서 한문화를 기꺼이 전수해주었다.
오카노이 겐테이에게 역법을 가르쳐주었다고 날조된 나산 박안기는 그 당시 일본에 건너가 일식관측까지 해준 이씨조선의 천문관 중의 한 명으로 추정된다. 박안기를 일본에는 호만 따서 조선의 손님 나산이라고 하다가 슬쩍 글자(客을 容으로)를 바꿔치기해 조선의 용나산으로 바꾸고 지금은 일본 인명사전과 국사사전에 그냥 용나산이라 쓰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다 일본인이구나 생각한다. 그게 일본민족의 통상수법이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열도에 문물을 전해줬던 고대 한국인들의 이름을 하나같이 바꿔 부르고 있다. 음이 같은 다른 문자로 다 바꿔치기하거나 전혀 같지 않은 이름으로 바꾼 경우도 흔하다. 일례로 한웅(환웅, 桓雄)은 항웅(恒雄)으로 바꾸었다. 역사왜곡학이 발흥한 18세기 이후에 바꿔치기 했다. 어이없게도 조선통신사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한편으로 역사왜곡에 열중했던 것이다. 메이지 때는 한국지명과 한국이름이 붙은 사찰, 신사 등을 대대적으로 바꿔댔다. 그러면서도 배달, 조선의 통치자를 부르던 천황 호칭은 새삼스레 사용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철저히 숨겼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모신 일본 전역의 신사를 관리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 모른다.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인들도 자신이 누구한테 참배하는지 모른다. 대체 왜 참배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뭔가 열심히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나 보다.
최초의 통신사는 1429년에 파견했다. 조선통신사들은 일본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선통신사가 없었다면, 서양은 벌거벗은 채 기모노 깔고 산천 아무데서(주로 길거리에서)나 섹스를 하고 고작 그림책이나 들여다보는 일자무식한 왜노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는 저 일본민족에게 숟가락에서부터 기와, 주춧돌, 나아가 불상, 사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만들어주었다. 저 일본민족의 뼈와 살까지도 만들어준 것이다. 이건 중노도 마찬가지다.
3) 중국 4대 발명품? 문자조차 발명하지 못한 중국이다.
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을 중국 4대 발명품이라 주장한다. 화약을 고려가 발명했다는 것은 전술했다. 중노가 인쇄술을 세계최초로 만들었다면서 내세운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대진국의 작품이고, 어시책은 고려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세계 최초가 아니다. 우리나라 인쇄술의 역사는 그 이상으로 소급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닥종이이다. 그런데 중노가 “다라니경의 글자 중 8자가 당에서 사용됐던 무주제자이고 중국산 닥종이로 만들어졌다”고 어거지를 쓰고 있다. 속국 당이 우리문자인 한자를 빌어다 쓰는 상황에서 상국 신라가 고작 글자 몇 개 빌려 쓰는 게 뭐가 문제겠는가. 과연 무주제자를 당이 만들었는지도 의문이다. 중토는 원래 무엇 하나 만들 줄 몰랐던 귤화위지의 땅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베꼈다는 점에서 신라 혹은 고구려, 백제가 만든 것을 날조해서 무주제자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유녀도 많고, 남녀가 들에서 함부로 야합하는” 화하족이 종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럴 능력이 되면, 제대로 된 집부터 짓고 살았을 것이다.
무측천은 오랑캐 위에 군림한 오랑캐다. 그런 무측천도 3차 고신 전쟁에서 신라의 지원군으로서 당군을 이끌고 직접 참가했다. 상국 신라에게는 “지극히 공손”했던 한위노였다.
이세민이 이치에게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절대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속국이 제 마음대로 전투를 하고 말 수 있나. 상국 신라가 공격하라면 해야 하는 신세다. ‘고구려에 붙을지 신라에 붙을지 잘 판단해라’고 당부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고구려를 절대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은 무열제가 했다. 유언까지도 베꼈던 것이다.
현낙양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부터 성무 고황제(대조영)가 즉위한 직후인 700년까지는 신라 땅이었다. 이미 살펴봤듯이 낙양은 중노가 밀어낸 지명이다. 원래 티벳고원 북부에서도 라사 서쪽에 있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현낙양에서 발간됐다면, 신라의 중국 대륙 지배를 증명시켜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중노는 신라에 닥종이 제조 기술이 없었다고 우기는데, 조선을 계승한 삼국의 종이제작기술이 앞섰을 것인가. ‘천하고 작은 생선’ 당의 종이제작술이 앞섰을 것인가. 우리나라에 견한사를 수없이 보내고도 명이 건국하고 20년이 지날 때까지도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화하족이 대체 뭘 만들 수 있는가. 명조차 고려의 수시력을 그대로 베껴서 대통력이라 우겼다. 삼국시대 종이류를 정밀 분석한 결과, 신라가 이미 8세기 전후로 두께 0.019mm에 불과한 종이를 만들 정도로 훌륭한 종이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러자 중노는 신장에서 발견된 '묘법연화경'이 690년대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이라고 우기고 있다. 하지만 690년대 중국 대륙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토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인쇄물이다.
신장에서 발견된 신라의 묘법연화경에 무주제자(?)가 없는 걸로 보아 제작 연대가 무측천이 당을 지배하기 시작한 690년 이전일 수도 있다. 이 경우도 신라가 제작한 거지만, 더 소급 가능하다면 고구려나 백제가 제작한 것일 수도 있다. 삼국 이전까지 소급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중노는 일본에 있는 어시책을 근거로 중국이 금속활자의 종주국이라고 우겼으나, 1341년에 편찬된 고려의 목활자본으로 밝혀졌고, 북경도서관에 소장된 어시책은 16세기 이씨조선 중종 연간에 편찬된 목활자본이었다.
중국에서 금속활자 인쇄를 실제로 성공한 사례는 명나라의 15세기 금수만화곡으로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중국보다 2세기 앞선다,(천혜봉, 성균관대)
중국이 만들었다고 우기는 어시책과 똑같은 것이 현재 고려대에 소장(무척이나 탐욕스러웠던 이성계라서 이씨조선은 챙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챙겨왔다. 준 거라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뒤떨어진 기술뿐이다. 화전, 화구, 질려포, 비화창 등. 그러나 화약처럼 세계최초의 발명품은 어쩔 수 없이 중국사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되어 있다. 어시책은 고려에서 몽한으로 건너간 책자 중 하나다. 장안에서 북경으로 건너간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은 1372년에 제작한 직지심체요절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독자발명인가. 우리나라가 한반도의 나라라고 우길 때나 가능한 얘기다. 하긴 이 땅의 사학자들은 아라비아인들이 한반도로 무역하러 왔다고, 우리나라는 대대로 해상무역왕국이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하는 대제국 고려는 전세계로 한문명을 전파했다. 그러나 한문명의 서방전파는 기원전 장건(?~B.C. 114?)이 서역 교통을 개척한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서역은 비단을 비롯한 상품만을 수입해간 것이 아니라, 한문명을 지속적으로 주입받았다. 장건 이전에는 우리나라 피지배종족들이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한문명을 전파했다. 그래서 유럽에 우리나라 문화와 비슷한 나라(핀란드)가 있다.
대진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은 1908년 잉글랜드의 스타인이 돈황석실에서 발견해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고, 고려의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가 가져갔다. 이게 더 가관인데, 유네스코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 중인 직지심체요절을 한국과 프랑스 공동명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요청하자, 프랑스가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거부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재를 놓고 프랑스 명의로 등록하겠다니, 고약한 심보가 아닌가. 그렇게 해서 천년 뒤에는 프랑스가 만들었다고 우길 심산인가. 중국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도, 일본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도 그런 식으로 오늘날 중국 것으로 둔갑하고 일본 것으로 둔갑했다.
살펴보았듯이 화약, 인쇄술이 중국의 발품이라는 건 날조,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날조, 왜곡을 해대는 중국이 과연 종이, 나침반, 한자라고 만들어냈을까.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베낀 미개 한위노다. 우리민족이 중토에 5천 수백 년이나 문명을 전해줬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중국의 발명품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나침반을 백제가 발명했다는 주장이 있다.
백제유민들의 후손이 양자강 하구 항주만 입구에 있는 주산군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했고, 그 문화는 멀리 사라센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사라센 여행가인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는 이 땅을 일러 “이 나라는 Syla(신라)라는 나라로 금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모든 것이 충족된 아름다운 나라”라고 묘사했고 10세기에 알 이드리시와 14세기에 앗 다마시키라는 사라센인은 “신라는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 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남겨, 이들이 말한 신라가 통일신라가 아니라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이 세운 해상왕국임을 나타내고 있다.(http://my.dreamwiz.com/pensword/history/marineboy.htm)
백제 영토는 요서에서 흑룡강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갈 때도 연안항해를 하면 됐다. 7세기에 멸망한 백제의 유민이 9세기까지 신라에 대항하는 것은 가능하다 해도, 14세기까지 남아서 고려와는 다른 독립국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연 백제 유민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국호를 사용했겠는가. 9세기에는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다. 대륙에 신라가 있는데, 섬나라 신라라고 했단 말인가. 주산군도는 신라의 섬이다.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가 외국인이라 섬 이름이 어려웠거나 헷갈려서 신라 영토라는데 착안, 신라라고 부른 것이다. 신라는 10세기에 멸망했으니까, 그 유민들이 고려에 저항했을 것이다. 14세기 기록이 10세기 기록과 같다는 것은 10세기 기록을 베꼈음을 말해준다.
신라는 중국 동부에 있었다. 중국 동부에서 한반도를 침공한 나라다. 신라는 열도에 식민지까지 있었다. 나침반은 끊임없이 황해를 오가야 했던 신라가 발명했다. 신라의 조선술 및 항해술은 탁월했다. 그래서 백강 전투에서도 백제(백제 식민지 왜)가 패했다. 열도 왜는 백제 멸망 전에는 백제 선박으로,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 선박으로 중국 대륙을 오갔다. 항해에 꼭 천문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18세기까지도 제 스스로 일식관측조차 하지 못한 일본도 16세기에는 중국 대륙으로 가서 명을 노략질했다.
삼국 시대 너른 바다를 수시로 오간 나라가 신라 말고 또 있었는가. 로마가 있다. 그러나 로마가 활동한 곳은 사방이 대륙으로 에워싸인 지중해였다. 그에 반해 황해는 한 해에도 수십 개의 태풍이 지나가는, 지중해와는 비교가 안되는 거친 바다다. 그 바다를 신라 선박은 끊임없이 오갔던 것이다.
황해를 수시로 건너는데, 과연 주먹구구식으로 감에 의존해 항해했겠는가. 한반도에서 양자강구까지는 600km쯤 된다. 조금만 방위가 틀려도 엉뚱한데 기항하게 된다. 정확히 방위를 계산해야 했던 것이다. 과연 서양처럼 나침반 이전에 별자리를 보고 항해했을까. 조선의 후예들이니까, 천문관측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실제로 삼국은 천문관측에서 뛰어난 실현율을 자랑했다. 그렇다면 배마다 천문학자들을 태우고 항해했을까. 그보다는 방위를 알려주는 장치를 개발하는 게 간편하다. 또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 중에서 뛰어난 천문학자는 고사하고 보통 수준의 천문학자도 없었다는 점에서 모든 선박에 일일이 태울 정도로 천문학자가 넘쳐난 건 아니었다. 신라가 황해를 건너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끊임없이 오가야 했다는 점에서 나침반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이 당시 중국의 상황은 고작 티벳고원 북부에서 강물 따라 오간 것이 전부다. 삼국에 조공하고, 삼국의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동남아와 사신을 주고받을 때만 강을 따라 중토를 빠져나간 것이다. 강을 타고 오가면서도 나침반을 사용해야 했단 말인가.
598년 수문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다가 폭풍을 만나 배가 다 파괴되고 전멸했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패수를 따라 올라간 수군은 신라군이다. 수군의 총지휘관 고경의 지략이 부족해서 패전했다고 평가한 인물은 신라의 진평제다. 역사날조하면서 수문왕에 배당하고, 신라군이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자연재해를 끌어들인 허위기사까지 착실하게 베꼈던 것이다.
백제는 한자를 그대로 썼다. 중노도 우리나라를 따라 한자를 사용했다. 심지어 한자에 맞춰 말까지 바꾼 중노다. 신라는 이두문자를 만들어 썼다. 한반도 남부 백제 영토라고 착각하는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신라의 이두문이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향찰은 삼국 말에서 고려 초까지 사용된 문자다. 그렇다면 주원장이 빼앗은 서적은 향찰이 아닌, 다른 문자로 쓰여 있었다는 결론이다.
(주원장이) 주산군도의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 있어 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는 명사의 기록은 바다의 주인이 중국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http://my.dreamwiz.com/pensword/history/marineboy.htm)
전술했듯이 한글이다. 한글은 고려 시대에 만들었다. 어쨌거나 주산군도의 주민은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화교는 백제 유민이나 신라 유민이 아니다. 화교가 얼마나 많은데, 그 옛날 주산군도에서 살았단 말인가. 화교는 현재 중국인과 똑같은 유전자를 가졌다. 양자강 이남이 주원장에게 넘어갔지만, 중노의 능력이야 뻔하다. 예맥족에게 넘어간 동북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한문명이나 우려먹었을까, 개발하고, 개선하는 것은 전무하니까, 생활과 문명수준이 저하됐다. 화교는 명이 양자강 이남을 차지한 직후 반짝하고 살다가 도로 궁색해지자, 명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사람들이다.
당 때 이르러 비단길을 장악하고 이때부터 서양과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고? 비단길은 타클라마칸사막에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조선시대의 설유 땅이었다. 흉노가 있고, 선비가 있고, 몽고가 있었다. 고구려에 쫓긴 북흉노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기원전 4백년 경에 중토로 침입했다. 3세기 중엽에는 선비까지 중토로 밀려나 각축전을 벌이다 세운 나라가 수다. 그런 수의 양광을 살해하고 물려받은 나라가 당이다. ‘천하고 작은 생선’ 선비족 당이 도로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뛰쳐나가 비단길을 장악할 수 있는가.
감숙성 둔황에서 합쳐져 외길이 되어 한수(황하) 유역까지 이른다는데, 한수(황하) 유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땅이었다. 감숙성은 고구려 영토였다. 타클라마칸사막도 고구려 영토다.
북도의 누란이 있는 호북은 삼국이 나눠가진 땅이고, 남도의 미란이 있는 호남은 백제 땅이다가, 고구려, 신라 땅이 된 지역이다. 3세기경부터 로브노르 일대의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북도는 둔황에서 북행하여 천산산맥의 동단, 투루판분지를 경유했다는데, 역시 고구려 영토다.
당이 비단길을 장악한다 한들, 티벳고원 그것도 북부에 틀어박힌 ‘천하고 작은 생선’이 팔 물건이나 있는가. 또 비단길을 장악해 서방과 교역했으면, 왜 당이라는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가. 고구려, 고려는 코리아라는 이름을 남겼는데, 어째서 당은 탕, 땅, 덩, 텅, 떵, 그 무엇 하나 남기지 않는가. 제 땅에서 무역하고도 당이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면, 고구려, 고려가 남의 땅에 가서 무역하고 고작 해상무역해서 코리아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냐는 거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대진국, 고려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해상무역왕국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한반도와 그 이북으로 제한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대진국, 고려는 다 중국 대륙에 있었다. 비단길을 이용해서 무역을 한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다. 물론 비단 제조기술을 보유한 나라도 우리나라다. 자오지 한웅이 중토를 정복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땅으로 가서 누에치고 비단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 기술이 발전했을 리가 없다. 왜? 귤화위지의 땅이니까. 그러니 중국 대륙에 온 중앙아시아나 아라비아인들이 과연 어느 나라 비단을 구입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해상무역왕국이었다면, 열도가 벌거벗은 미개인들의 땅으로 남을 수가 없다.(토우테이칸) 옷이 없어 벌거벗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 무역을 하는 것이 가장 수지타산이 맞는다. 바로 대한해협만 건너면 되는데?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벼이삭을 따는 열도(타무라 엔쵸)로 가서 철기농기구를 판매하는 것이 가장 이윤이 높을 게 아닌가. 610년 담징에게서 맷돌 제작법을 배울 필요도 없다. 가야나 신라가 해상무역으로 벌써 판매했을 테니까. 6세기까지 흙구덩이 속에서 살 필요도 없다. 가야와 신라가 해상무역하면서 집 짓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을 테니까. 열도인이 번듯한 집을 지어야 기와부터 해서 건축재료를 판매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서양이 아시아와 어메리카로 진출하면서 상품판매에 혈안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비록 아편이 주력상품이었지만, 해상무역국가는 이윤이 남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열도가 6세기까지 벌거벗은 미개인으로 살았다는 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해상무역왕국이 아니라, 비단길을 통해 무역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한반도의 나라라면, 해상무역왕국이 아니라 해도, 남해 정도는 가뿐히 건널 수 있었을 테니까(한반도인들도 기원전 3세기부터 열도로 이주했다.), 열도는 어느 수준까지는 문명화되었어야 했다.
종이는 후한의 환관 채륜이 개발했다고 날조했지만, 그 이전 시대에도 있었다. 그래서 채륜은 기존의 종이에 개선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니 채륜은 종이의 개선조차 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소리다. 한나라는 티벳고원 북부조차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나라다. 흉노에게 공물은 물론이고 공주까지 진상한 나라다. 치우씨의 후손이 나라를 세웠다고는 했지만, 후한은 이미 문명국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치우씨의 형제들이 그 땅을 찾아간 지도 2700년이 지났다. 후한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와의 격차가 너무 나서 한구(漢寇)라 불렀던 것이다.
중국은 문자조차 개발한 적이 없다. 은나라는 금사강 상류에 있다가, 색불루 단제 때, 금사강 너머로 쫓겨난 조선의 제후국이다. 하남성의 은허는 일식기록으로 본 우리나라 영토다. 삼국의 영토가 맞닿은 곳이다. 갑골문자는 은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개발한 문자다.
기원전 2181년에 가림토 문자가, 5900년 전에 녹도문(녹서)이 있었다. 문자만 만들고 종이는 개발하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초기의 녹도문은 짐승의 가죽에 새긴 거라 하지만, 수천 년간 가죽만 사용할 수 있는가. 종이 역시 우리나라가 만들었던 것이다.
글자없는 갑골, 즉 `무자갑골'은 만주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에까지 분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서만주 발해만 북쪽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 지금의 한자꼴은 발해만 지역과 산동반도에서 먼저 나타났다.
(무자갑골이 일본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중히 연구해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까지 날조한 일본이기 때문이다. 405년 전래된 한자와 병행해서 비석에 새겨놓는 문자는 언제 쓴 것인가. 물론 405년 이후다. 신들이 사용한 문자가 있는데, 일본에 한자를 전해준 왕인 박사를 문자의 신으로 떠받는 건 뭔가. 신대문자가 있었다면, 역사왜곡하느라 설쳐댄 18세기가 아니라, 그 옛날에 발견했다. 설령 무자갑골이 일본에서 발견됐다고 해도 그건 무자갑골을 처음으로 사용한 시기에 한반도인이 이주했다는 뜻이 아니다. 갑골문자는 점치는 문자라서 한자 개발 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한자는 중국이 만든 게 아니고 우리민족이 만든 문자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자를 쓴 것은 우리나라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자를 쓰는 건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자오지 한웅과 치우씨 형제가 우리민족이기 때문이다. 지배자가 우리민족이라서 우리나라가 문자를 개발하자, 가져다 쓴 것이다.
향찰이나 이두문자까지 합치면, 우리나라는 10개 내외의 문자를 만들었다. 전세계적으로 지금까지 만든 문자는 200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민족이 얼마나 많은 문자를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다.
“병신년(B.C. 924)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받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번한세가)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중노사를 보면, 주나라 선왕(宣王) 때 이르러서야 주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왕문이 만든 이두법이 날조사의 한자 개발시기보다 앞선다. 이두문은 한자로 되어 있으니까, 이두법 개발 전에 한자를 개발했다. 적어도 10세기 초나 11세기에는 한자를 개발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처음부터 한자를 사용한 나라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사리탑에 넣기 위한 보물로 제작됐다.
정결한 몸으로 신비로운 축문 다라니를 한 자 한 자 베껴 쓰는 사경 작업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극 정성을 담아야 한다.(역사스페셜 3권)
보물이 아닌 책으로 인쇄, 보급하기 위해 만든 활자도 아무렇게나 파내진 않았을 것이다. 책이란 읽기 위해 만드는 거니까.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백만탑다라니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백만탑다라니경에 대해서는 우리 조상들이 만든 일본 문화재를 소개한 책자 등에도 나오지 않는다. 백만탑다라니경은 770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770년이라면, 어떻게든 열도에 백제를 재건하려고 몸부림칠 때다. 신라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것도, 신라 기술자가 직접 만든 것도 아니다. 물론 삼국 이전부터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단지 현존하는 인쇄물 얘기다.
일본의 인쇄술의 역사는 오래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여러 증거가 남아 있다.
우선, 천무 때(673~ 686)까지도 종이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담징이 610년에 종이제작법을 가르쳐주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천무의 능에서 수천 개의 목간(나무패) 유물이 발굴되었다. 7세기 이전에 천황이라 호칭했다고 날조하기 위해서 넣어둔 것이다.
일본이 백제 식민지였을 때는 물론이고. 백제 멸망 후에도 일본왕들은 백제 후왕의 복식을 했다. 백제 멸망 후 일본왕이 된 부여용의 왕호 천지가 ‘상국(天)에 복종하여 슬기(智)를 다했다.’는 의미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근데 천지는 상국에 복종하여 슬기를 다하지는 못했다. 백강 전투에서도 패했고, 나중에는 천무에 의해 비와꼬로 내쫓겼다. 상국에 복종하여 슬기를 다하는 건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일본왕들은 백제 멸망 후에도 백제 식민지를 자처했던 것이다. 신라계 왕인 천무의 왕호조차 ‘천하를 판가름하는 모국(天)의 대업에 무용(武)을 다했다’라는 뜻으로 본국 신라에서 내린 것이다.(일본의 역사는 없다.) ‘한에 예속된 노예나라의 왕’이라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 지상 최대의 자부심인 일본의 우두머리가 과연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가.
실제로 천황 호칭은 1889년에 헌법의 공포에 의해 확정되었다. 그 전에는 온갖 호칭으로 불렀다. 대대로 우리나라 속국으로 살면서 무슨 수로 천황이라 불렀다는 건가.
686년에 사망한 천무의 능에서 목간이 대량으로 발견됐으니, 결론적으로 담징이 가르쳐준 종이제조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종이박물관까지 세워놓고 전세계 사람들에게 종이제작법을 보여주면서 왜(倭)가 독자적으로 만든 방법이라고 우기고 있다. 서양종이보다 우수하다고 자랑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일본서기마저도 담징이 종이며 먹, 채색, 맷돌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신라 역사서를 보고 쓴 책이다. 신라 역사서에 과연 고구려인 담징이 신라 혹은 백제 식민지에 종이제작법 등을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해두었을까. 모든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뿐이다.
왜곡 일본사 교과서에는 고구려의 담징(담징은 백제인이다. 한반도 북부가 고구려 땅으로 날조되자, 일본도 따라서 날조한 것이다. 담징이 종이며 먹, 채색, 맷돌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기사는 고사기에서 베낀 기사다.)에 의해 종이, 먹, 채색법이 “전해졌다”로 축소해놓았다. 물론 호오류지 금당 벽화가 담징이 그린 것이라는 말은 빼버렸다.
둘째, 정창원에 보관해온 보물에도 상품의 문방사구는 신라 것이고, 일본의 것은 하품이다. 정창원은 756년에 세워졌다. 이 당시에도 일본의 종이질은 형편없었던 것이다.
셋째, 임진왜란 때 고려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강탈해갔다.(靑木美智男 外 일본사, 三省堂. 1993, 尾藤正英 外 日本史, 1991)
넷째, 에도 시대(에도시대에는 역사왜곡할 목적으로 조선통신사로부터 학문을 배운다고 정신없었다.)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가장 널리 읽힌 조선어 학습서 교린수지가 200년간 필사본이었다가 메이지 14년(1881년)에 와서야 인쇄본이 나오기 시작했다.(薺藤明美, 교린수지 연구의 의의, 1998년)
임진왜란 때 금속활자를 약탈해갔음에도 3백년이나 지나서, 조선어 학습서 인쇄본을 내야 한 이유는 뭘까. 인쇄활자를 만들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 분명한 건 이 당시부터 역사날조와 침략을 위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이씨조선의 정치상황을 파악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출판 연구가라는 일본의 다라니회 회원의 견문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도대체가 훌륭한 서체입니다. 우리 ‘백만탑다라니경’의 글씨는 상당히 치졸합니다만, 이것은 차원이 다르게 정돈된 풍격이 있는 서체입니다. 아마도 이 다라니경을 팠을 무렵에는 이미 목판의 조판인쇄 기술이 상당히 진보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천지 8cm의 한지로 보이는 얇은 용지는 이미 아주 다색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만, 글자의 먹색은 아직 매우 선명하고 돋보입니다. 또한 볼록판으로 인쇄했을 때 글자의 선이나 괴선의 가장자리 부분으로 잉크가 몰려 안쪽이 엷어지는 현상인 marginal zone이 천지에 있는 괴선부분에서 확인된 것으로 볼록인쇄임이 확실합니다.
한 마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너무나 훌륭하고, ‘백만탑다라니경’은 너무나 치졸, 조악하다는 것이다.
과연 저런 치졸하고 조악한 ‘백만탑다라니경’을 만들어 보물로서 보관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또 보물이 아니라 책으로 인쇄, 보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 해도 책을 만들면 해독이나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허겁지겁 파낸 듯한 모양이 아닌가. 누가 그런 것을 보물로 삼을 것이며, 책으로 인쇄해 보급할 것인가.
일본이 임진왜란 때 이씨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를 가져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활자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다는 것은 일본의 주장이고, 실은 이씨조선의 금속활자에서 일본이 활자를 모방하여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참이나 나중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이 문맹자의 나라였기 때문에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낼 수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학 혹은 미도학이라는 역사날조학의 성과는 하나같이 치졸한 것들이다. 자칭 국학자라는 인간들이 허겁지겁 서툴게 날조해낸 게 바로 백만탑다라니경이다.
‘백만탑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 대진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날조의 대국 중국은 중노 거라 우기고 있었다. ‘백만탑다라니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보다 백년에서 2년 빠지는 해만큼 앞서 만든 것으로 못 박아 놓고 있다. 제작 연도가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 발견되자, 시기와 질투심에서 날조한 것이다. 화하족에게서 전적으로 문물을 전수받았다고 우기면서, 화하족보다 인쇄술이 먼저 발전했다고 날조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면 백만탑다라니경을 어떻게 날조해낼 수 있었는가. 백만탑다라니경이 목판 자체라면, 옛날 나무 조각부터 구해야 한다. 오래된 나무 조각이 아무 데나 굴러다닐 리는 없다. 이 역시 그 옛날 문화재인데, 표면을 밀어내고 거기다 허둥지둥 글자를 파냈을 것이다. 백만탑다라니경이 인쇄물이라면, 옛날 종이만 구하면 된다. 옛날 종이라면 이세 신궁이나 정창원 같은데서 구했다. 근데 얼마 전 일본이 30만 년 전, 전기구석기 시대 것이라 날조한 인골(도치기 현 구즈)이 15세기 것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나무 조각, 종이라고 그 옛날 것을 사용했을까 싶다.
고려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동아시아를 강역으로 했다. 5300년을 일군 우리나라 땅이 화하족에게 넘어가, 중노가 주인인 양 행세할 뿐이다. 화하족이 아니라 그 어떤 미개인을 갖다 놔도 5300년을 일군 우리나라 문명에 둘러싸여 있으면 다 문명국이고 문명인으로 보인다.
중노는 역대 왕조 대대로 장안성과 낙양, 북경에서 살았다고 주장해왔다. 중노의 장안과 낙양, 북경은 티벳고원 북부 내에 있었다. 현장안과 낙양, 북경은 우리나라의 황성이었다. 장안성은 조선, 고구려, 대진국, 고려의 수도였다.
명이 자금성을 세웠다고? 명의 영토는 양자강 이남이었다. 청도 황하 이남에서 세워진 나라다. 현북경은 청이 2차로 이씨조선 땅을 빼앗았을 때 청의 영토가 되었다.
자금성이 있는 북경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다. 신라의 북원경이다. 개, 보수나 했을까, 건립한 건 절대 아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게 주특기인 이런 중노가 과연 뭘 발명할 수 있겠는가. 왜노보다 낫은 게 있는가. 왜노가 곧 중노인 것을. 허풍과 과장, 거짓말을 빼고 나면, 뭐가 남는가. 벌거벗은 미개인이다.
노예종족도 우리나라가 건설한 문명에 둘러싸여 있으면, 세계 4대 문명을 이룬 문명인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한 마디로 한문명의 우수성을 증명한 거다. 결국 중국사, 중국문명, 일본사, 일본문화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명, 문화를 도용하여 제 것이라 우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문명, 일본문화는 없다.
출처 : 문명은 한제국(桓帝國)에서 퍼져나갔다.
글쓴이 : 신실한이상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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