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ngbak
2006. 8. 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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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의 과보 |
구명시식 전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빛'이라고 답한다. 빛이 태양에서부터 1억5천만 킬로미터를 달려 지구에 도착하는 시간은 8분13초. 가시적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것은 단연 빛이다. 그러나 염(念), 즉 생각만큼 빠르진 않다. 빛은 8분13초 전의 태양을 보게 해주지만, 염은 생각하는 순간이 태양이다. 일본은 이를 초고속 열차인 신칸센에 응용했다. 신칸센 중 두번째로 빠른 기차의 이름은 '히카리(光)'로 '빛'이란 뜻이지만, 가장 빠른 기차는 '노조미(念)'로 '염'이란 뜻이다.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힘인 염력. 그러나 염력은 양날의 칼과 같아 잘 사용하면 문제가 없지만 잘못 사용하면 큰 과보를 받게 된다. 중고등학교 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로레슬링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날도 빨간 벽돌을 수도(手刀)로 격파하는 천규덕 선수에 대해 얘기하던 중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빨간 벽돌을 가져오게 했다. "야, 그건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가능한 거야." 어디선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향해 보란 듯이 빨간 벽돌을 날려 천규덕 선수처럼 산산조각을 냈다. 염력이 얼마나 무서운 힘인지 몰랐던 나는 친구들이 부탁하면 손목에 찬 스위스제 시계를 손도 안 댄 채 멈추게 하거나 시침을 거꾸로 돌렸고, 때론 여자 속옷 색깔도 훔쳐보고 고스톱 패를 맞추는 등, 할일 없이 재미와 과시용으로 염력을 낭비하다 급기야 큰 과보를 받고 말았다. 약관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한쪽 폐가 모두 썩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충남 마곡사 부근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피를 토하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지나가던 스님이 "당신의 병은 흙 속에서나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몸이 모두 나으려면 적어도 한 달은 비가 와선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사라지자 당장 그 말씀을 실행에 옮겼다. 죽을 힘을 다해 구덩이를 판 뒤 옷을 모두 벗고 흙 속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비가 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주셨는지 한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았고 덕분에 무사히 마지막 사투를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구명시식처럼 반드시 염력을 써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쓰지 않는다. 하늘이 허락하는 범위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즉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마치 손오공이 나쁜 짓을 하면 삼장법사의 주문으로 그의 머리에 씌운 금고주가 작동해 두통을 일으키는 것처럼, 나도 염력을 사적으로 사용하면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과보를 받는다. 하지만 적시적소에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얼마 전 절친한 언론인이 "그때 일을 기억하십니까?"라며 운을 뗐다. 90년대 초,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한 극단이 공연을 하던 중, 주연배우가 연기를 하다가 그만 천정에 달린 전등갓을 치는 바람에 육중한 전등갓이 객석 쪽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만약 누군가 맞았으면 중상이거나 사망이었다. 그런데 포물선으로 날아가던 전등갓이 갑자기 수직으로 뚝 떨어지며 '쾅!' 소리가 났다. 공연장에 있던 그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이 '대형사고'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객석은 조용했다. 조심히 전등갓이 떨어진 위치를 확인하던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봤다고. "전등갓은 법사님 발 앞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힘의 원리상, 포물선으로 날아가던 전등갓이 갑자기 수직으로 뚝 떨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법사님 뒤쪽으로 더 날아갔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럴 경우엔 누군가 크게 다쳤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에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뭐라 답하겠는가. 나는 그날 공연을 끝까지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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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의 시작] |
초등학교때 홧김에 누른 놋그릇 깡통처럼 찌그러져 |
'인간의 의지 또는 의도로, 힘 또는 작용이 물질적 매개 없이 대상 물질에 작용한다고 생각되는 힘 또는 작용.' 이것이 염력의 정의다. 불전에서는 염력을 오력(五力) 중 하나로 여겼으며, 초심리학에서는 'PK'라는 약자로 부르고 있다. 초능력자 유리 겔라가 한국에 왔을 당시, TV를 보던 시청자들은 일제히 유리 겔라를 따라 숟가락을 구부렸다. 그날 망가진 숟가락이 전국에서 몇 트럭은 나왔을 것이다. 유리겔라의 초능력을 두고 시시비비가 많지만 어찌됐건 전 국민이 염력의 실체를 경험한 이례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염력은 유리 겔라 같은 초능력자만 갖고 있는 능력은 아니다. 염력(念力)은 '생각의 힘'으로 인간 뿐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까지도 염력을 갖고 있다. 불가에서 육식을 하지 마라는 이유도 염력 때문이다. 무릇 인간도 죽는 순간 한을 품게 마련인데 이는 짐승도 마찬가지. 따라서 육식을 금하는 까닭은 한 서린 음식은 먹지 말라는 의미로 보면 된다. 생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생물이라고 해서 날 생선을 최고로 치지만 어류를 주식으로 하는 일본에서는 생물보다는 냉동생선을 주로 먹는다. 물고기일망정 날 것을 죽이는 순간 한이 서린다하여 냉동실에서 독기를 식힌 뒤에 식탁에 올려야 탈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염력은 사람부터 미물까지 모두 갖고 있는 능력이지만 사람마다 염력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골프 칠 때마다 "법사님 오늘은 염력 스위치를 꺼주십시오"라는 주문을 많이 받는다. 과거 염력으로 몇 번 장난을 친 이력 때문이다. 한 번은 프로수준의 골퍼와 라운드를 돌았는데 그의 골프 매너가 형편없어서 홧김에 한 자리에서만 오비를 7번이나 내게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실력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 생기자 이후 지인들과 염력을 안 쓰겠다고 다짐을 한 뒤 골프를 치는 것이 순서가 돼버렸다. 나의 염력은 어디서 왔을까. 처음으로 내가 갖고 있는 신비한 힘에 대해 자각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우리 집엔 6.25로 집을 잃은 이종사촌형 2명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식구가 많다 보니 늘 식사시간이 문제였다. 그때는 온 가족이 한 방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이상하게 밥 먹을 때마다 형들이 나를 약 올렸다. "멸치볶음에 파리 들어갔어.", "계란부침에 벌레가 죽어있어." 은근히 나를 예뻐하신 외할머니께서 내 앞에만 맛있는 반찬을 놓아주시자 심술을 부린 것이다. 물론 어린 내가 외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알 리 없었다. 그날도 내가 계란부침을 막 입에 넣으려던 찰나 형들이 "길진아, 파리 들어갔어!" 이러는 거였다. 놀란 내가 얼른 계란부침을 내려놓자마자 형들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자기 밥 위에 올려 놓았다. 또 놀린 것이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내 앞에 있던 놋그릇을 손바닥으로 확 눌러 버렸다. 그러자 놋그릇이 깡통이 찌그러지듯 납작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도 놀랐고, 형들도 놀랐고, 온 가족이 모두 놀라 찌그러진 놋그릇만 바라봤다. "길진아, 다시 한번 해봐!" 나는 형들을 바라봤다. 형들은 놋그릇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 번 더 해보라고 빈 놋그릇을 건네줬다. 방금 전까지 형들에게 화났던 감정은 모두 잊고 놋그릇을 내 앞에 가지런히 갖다 놓은 뒤 기를 모아 재도전했다. "얍!" 그러나 이내 나는 손을 부여잡고 "으악!"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까처럼 놋그릇이 찌그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 잘 됐는데 이제 안되네." 밤새 찌그러진 놋그릇과 그렇지 않은 놋그릇을 두고 고민했지만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똑같은 놋그릇인데 하나는 찌그러지고 하나는 찌그러지지 않다니. 그 원인을 알아낸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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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의 염력] |
11세때 기도로 장대비 멈추게 해 |
어린 시절, 내가 갖고 있는 이상한 힘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 힘이 언제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 또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끔씩 내가 바라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즐거워했을 뿐이다. 주로 그 사건의 대상은 함께 살았던 이종사촌 형들이었다. 놋그릇 사건 후에도 형들은 줄기차게 나를 놀렸다. 그러면 홧김에 "다리나 부러져라!", "머리나 터져라!"라고 소리쳤는데, 그때 마다 정말 축구하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들어오고 누가 던진 돌에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며 울곤 했다. 형들 뿐 아니었다. 하루는 학교 선생님께서 이유 없이 나에게 가혹한 체벌을 하셔서 벌을 받는 동안 '일주일동안 선생님을 안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등교하니 선생님이 안계셨다. 심한 감기몸살이 걸려 일주일간 못 나오신다는 것. 그때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던지. 그러던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슬픈 사건이 다가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공주 금강에서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는 무더운 여름에 오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나는 상복을 몇 겹씩 껴 입고 상주 자리에 앉아 문상객들과 절을 주고받으며 나흘 밤을 단 한 숨도 안자고 버텼다. 가족들은 내가 쓰러질까봐 억지로 재우려 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으로 눈꺼풀이 내려와도 자지 않고 버티는 힘. 생각해보면 그것은 체력이 아니라 염력 덕분이었다. 열한 살 꼬마에게 그런 체력이 있을 리 없었다. 드디어 관을 공주에서 전주 선산으로 운구하는 날이 왔다. 가족들은 모두 걱정스런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비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에서는 천둥 벼락을 동반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장 몇 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는데 관을 운구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 나는 작은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제발 우리 아버지가 타신 차가 전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비를 그쳐주세요." 얼마 후 갑자기 어디선가 '우와!'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멈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운구차가 진행하는 방향만 비가 그쳐 햇빛이 쨍쨍하고 그 주변으로는 여전히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기상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차일혁 총경님 같은 분이 돌아가셔서 하늘이 도와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설마 하늘이 어린 소년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기상이변 덕분에 운구차는 무사히 전주 선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입관을 하려면 땅을 파야 하는데 비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의 관을 묻을 수 있게 비를 멈춰주세요." 빗줄기는 조용히 잦아들어 땅을 파서 입관할 때까지 딱 40여분 동안 내리지 않다가 장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무섭게 퍼부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됐다. 전학 가던 날, 배웅 나온 반 친구들 사이에서 C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똑똑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했던 C는 종종 반장인 내게 심술을 부리곤 했는데 고맙게도 배웅을 나와 준 것이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는 순간, 나는 가슴의 교표를 뜯어 C의 손에 쥐어주며 "꼭 우리 학교를 빛내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차가 우리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팔이 빠지도록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몇 십 년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난 C는 놀랍게도 정상이었다. "니가 내 손을 꽉 잡았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가 내 몸으로 들어왔었어. 그때부터 굳었던 몸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한 것 같아." 현재 그는 대학교수가 되어 강단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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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석학' 영혼문제에 깊은 관심 |
지난 9월 6일, 나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함께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를 만났다. 그는 현정은 회장과 북한 문제를, 나와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 대담하길 원했다. 첫 질문은 "앞으로 종교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 같습니까?"였다. 지금까지 앨빈 토플러의 예상은 적중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 용접공에서 세계적인 미래학자가 된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을 적중시켰다. 30년 전, 이미 세계가 정보 중심의 사회로 재편성된다고 저서에 언급했으며 2000년 초,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국이 IT와 BT사업에서 세계 일류 국가가 되리라 예상했다. 그런 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해왔다. 첫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종교상을 묻는 순간 나는 우리 집 주변을 지독히 천천히 걸어 다니는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얼마 전 중풍에 걸려 몸에 마비가 찾아온 뒤 일정한 시간이 되면 꼭 집 주변을 산책했다. 마치 한쪽 다리를 질질 끄는 것처럼 안쓰러운 산책이지만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느린 산책을 즐겼다. 과거 폐결핵으로 생사를 넘나들었을 때의 내 모습도 그와 같았다. 나는 한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구토를 하며 길바닥에 쓰러졌다. 죽을 힘을 다해 걸어도 일곱 발자국을 못 넘기고 쉬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걸음은 빠르지만 바삐 걸으면서 놓친 것도 많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고 달리는 말 위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산을 보려고 해도 말의 속도가 빨라 놓치는 게 많듯이 인생도 빠르게만 걷다보면 길가에 피어난 아름다운 들꽃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느리게 기다리면서 사는 삶은 빨리 뛰는 삶보다 더 청명한 지혜를 안겨준다. 그의 두 번째 질문은 "앞으로 영혼의 DNA가 밝혀지겠습니까?"였다. 분명 미래는 지식의 시대를 넘어 영성의 시대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앞으로의 과학자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에도 아무도 이를 증명하지 못했다. 영혼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제 객관의 차원이 달라져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객관은 어떤 이론이 정립한 관점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보는 방향, 자신의 주관이 된 관점이 바로 객관이다. 즉, 영혼의 문제는 대중적 관점의 객관적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마음이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마음이 영혼을 안다면 굳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미소로 침묵하자, 그는 자신이 만난 한국 유명 인사들과는 사뭇 다른 대담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는 나와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별로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큰 감흥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구명시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연구해보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 내가 앨빈 토플러에게 받은 편지를 지인에게 보여주자 깜짝 놀라며 "도대체 어떻게 하셨기에 이런 편지를 받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말에 나는 토플러에게 했듯이 말없이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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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후암정사"차길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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